족보族譜
최 방식
코로나 격리기간이 끝날 무렵 집안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족보를 정리해야 되는데 현재 집안의 제일 어른이 삼촌입니다. 일가친척들의 인적사항에 관한 여러 가지 도움을 주셔서 족보를 기록해야 된다.”며 설명을 하였다. 퇴직 후 일상을 조금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지금까지 족보에 대한 생각과 관심은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왔다. 평소 조상을 숭배하고 감사하며 그 얼을 잘 보전해야 하는데, 조카가 먼저 전화를 하여 이 문제를 거론하니 미안하였다. 현제까지 족보의 등재가 늦어진 이유는 문중에서 누군가 책임을 맡아 일을 처리 할 사람이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 많은 세월이 흘렀다.
개개인의 구체적인 인적조사는 직접 만나서 확인해야 하는데 대부분 직장 따라 전국적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어 어떻게 연락이 할지 의문이고, 또 만만찮은 경비가 소요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자신과 조상들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자식들과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리가 되어야 한다는 조카들의 생각이 믿음직스럽고 대견스러웠다.
한국인의 생활 속에는 조상들의 공경과 족보에 대한 애착이 뿌리깊이 내려 있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이것들이 퇴색이 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벌초나 명절날에는 함께 식사를 하며 집안 어른들과 형님들에게 항렬과 촌수 등 족보에 관한 것들을 귓전으로 듣고 배웠다. 지금은 묘는 오래전에 이장이 되었고 명절이 되어도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내지 않은지도 오래 되었다. 집안에 새 식구를 맞이해도 오랜만에 결혼식장에 잠시 만나 인사를 나누면 끝난다. 다음에 만나도 누가 누가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이것이 요즈음 현실이다. 빠르게 변하는 우리사회는 유교의 형식적인 의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족보에 관한 문화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족보 문제로 어떤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한 번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친구들과 족보 이야기가 나오면 시조가 누구이며 몇 대손이며 본이 어디다 이정도로 이야기하다가 대화의 흐름이 바뀐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족보에 대한 개념은 잊어버린다.
현대의 젊은이들도 핵가족화 되고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으니 족보에 대해 관심도 없어 보인다. 심지어 아들도 지금까지 나에게 족보에 관한 질문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집안의 조카가 나에게 족보에 관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부끄럽게도 그 질문에 정확하게 알지 못하여 답을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여 마음에 찜찜하게 남아 있었다. 집안의 큰 집에서 족보를 보관하고 있어 육촌형님께 족보를 보여 달라고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차일피일 미루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녔을 때 문중에서 가첩을 만들어 한 권씩 배부를 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없어졌다. 어떻게 분실 되었는지 알 수도 없고 가첩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 했다.
족보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 오래 전에 읽었던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라는 소설에서 노예로 팔려온 자신의 조상에 대한 뿌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미국, 유럽, 아프리카의 수 십 곳의 문서 보관소를 찾아다니며 쿤타킨테 집안 6대에 걸쳐 찾아낸 가족의 생생한 기록이 뿌리다. 그의 자서전적인 이 작품에서 조상의 뿌리를 찾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무에서 유를 만들듯 백방으로 노력했던 그를 생각하니 앉아서 전화 몇 통하고 발품을 파는 것이 호사처럼 느껴졌다.
뿌리가 깊고 튼튼하면 큰 나무로 자랄 수 있고 많은 열매와 꽃을 피울 수 있다. 흐르는 물도 근원이 있듯이 조상 없는 후손은 존재할 수가 없다. 조상들의 역사를 지금까지 잘 정리 되어 있는 족보에 등재되지 않은 집안의 후손들을 찾아 정리하여 약간의 경비와 함께 서원의 도감에게 인터넷으로 전해주면 된다.
족보에 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경주에 있는 서악서원을 방문하였다. 조상들의 손길이 닿아있고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이곳은 고즈넉하였다. 도감을 만나보니 마침 올해 시월까지 책으로 만든 활자 족보를 정리하고 내년부터 전자 족보로 넘어 간다며 잘 찾아오셨다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주변이 잘 정리 되어 있는 서원의 옛집 상서장에서 족보 보는 법을 가르쳐 주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족보를 만드는 과정과 혈통을 올바르게 관리하고 족보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오래전에 족보장사가 있었다는 것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조카들과 모여 집안 친척들의 거처를 확인하다 보니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육십 년 전만해도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 왔을 때는 가족관계를 쉽게 정리를 할 수 있었다.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삶의 터전을 이곳저곳으로 옮기다 보니 전국으로 흩어져 연락 할 길이 없는 것이 제일 어려운 문제였다. 연락이 닿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중에 원망이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 또 장남이지만 딸만 있는 집안에 족보가 나에게서 끝이 나는데 굳이 경비를 들이고 족보를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며 반문하는 이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옛날처럼 양자를 잘 들이지도 않는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 한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족보를 보니 몇 십 년 전만 해도 여자들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딸과 사위도 족보에 등재되어 여기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목사님이 미국의 하버드대학의 도서관을 방문 했을 때 한국의 족보가 있어 목사님의 가문의 찾아보니 그 족보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것을 발견하여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수백 년의 유구한 역사에서 조상들의 면면을 충실하게 기록으로 남겨놓은 민족은 유대민족과 한국인이라고 한다. 한 가문의 조상을 같이하는 씨족의 혈연관계를 체계적으로 그 관계를 기록한 책이 족보다. 우리 가문도 조상들의 유산인 족보의 가치를 잘 알고 다음세대에도 면면히 이어 갈 것을 기대해 본다. 연락이 닿지 않아 족보등재를 하지 못한 집안 친척과 형제들에게 미안함이 남아있다.
첫댓글 1대를 30년으로 계산해서 우리 집안은 30년에 한번씩 족보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up date)
조상님들 묘소 벌초,묘사도 겨우 하고있고 조부모 제사도 생략하는 요즘에는 족보에 대한 관심은
1도 없는것 같습니다.
삶이 글로벌화되고 먹고 살기도 팍팍한 세상이니 더 그런것 같습니다,
가첩이 서랍어디에 있을것 같은데 한번 찾아 봐야겠네요.
뿌리를 중시하는 우리의 전통이 좋은 문화인데 퇴색되어가는게 안타깝다는 생각입니다.
어느 집안이나~~
족보! 정말 중요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