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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목재의 성장 요인, 끊임없는 기술력과 신용] 우선 동명그룹은 강석진이라는 개인이 맨주먹으로 열정을 가지고 리더십을 발휘한데서 출발한다. 그는 여러 분야 중에서도 목재 사업에 이어 합판 분야가 돈이 된다는 안목으로 동명목재의 도약을 이끌었다. 일본과 미국 등에서 합판 산업이 사양화되면서 한국으로 이전하고 있는 점을 포착했다. 당시만 해도 경쟁력 있는 싼 인건비에다 한국 사람들의 손재주가 합쳐진다면 합판 분야의 경쟁력이 세계 최강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마치 한국의 신발과 조선이 세계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였다. 이 때문에 강석진은 목재와 가구 생산에서 최고의 질을 추구했고, 당시에 고부가 가치 분야였던 합판 생산에 과감히 눈을 돌렸다. 목재를 구하기 힘든 시절에 판재나 각목을 만든 뒤 남는 자투리를 합판으로 만들어 원자재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가구 공장을 할 때였는데, 다 만들어 놓은 양복장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직원들을 모아놓고 망치로 두들겨 부셔버린 일이 있었죠.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는데도 최고가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 하여간 고객의 요구에 만족시킬 제품을 만들겠다는 고집이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죠. 이후 제품이 좋아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강기수 전 동명목재 부사장] 강석진의 선천적으로 뛰어난 손재주와 아이디어 창출도 동명목재의 경쟁력을 높이는 기반 역할을 했다. “강회장이 요트를 구입한 적이 있는데 더 많은 사람이 탈 수 있도록 늘려달라고 했습니다. 대한조선공사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는데 우리 팀이 강회장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요트를 더 크게 만들어 줬죠. 하여튼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창조 정신 하나만은 대단한 분이었습니다.”[조성제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이러한 강석진의 생각은 동명그룹의 연구 개발 정신으로 이어졌고 제품의 품질 향상과 신소재 개발의 원동력이 됐다. 강석진과 종업원들의 기술 개발 정신도 남달랐다. 합판의 제조 기술과 생산 공정을 연구하여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과 색채의 질 좋은 합판을 생산했다. 정규 기술 교육을 통해 배운 것도 없고 제대로 된 안내서도 없었다. 경험과 실패를 무기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는 과정이었다. 접착제의 개발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합판의 생명력은 접착력에 있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새로운 제품 개발이 먼저 이뤄졌다. 합판 접착제가 화공 약품으로 만들어져 인체에 해가 된다는 문제점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연구 결과 콩과 밀가루를 합성한 새로운 접착제인 ‘콩풀’을 개발했다. 요소 수지 등 제품의 종류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용도의 접착제도 만들어냈다. 자투리 토막과 판자 조각 나무껍질 등 폐기물들을 기계로 잘게 부수어 톱밥과 함께 새로 개발한 접착제로 뒤섞어 버물어 고열 압축 처리한 ‘파티클 보드’ 제품을 생산하기도 했다. 강석진은 이 같은 기술 연마의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백련천마(百鍊千磨), 즉 배우고 익힌 지식과 기술을 천 번, 백 번 부지런히 갈고 닦는다는 뜻의 글귀를 즐겨 썼다. 동명목재상사가 구축한 현장 중심의 마케팅과 생산 체제도 경쟁력에 힘을 실어주었다. 대리점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동명합판’의 장점을 알렸다. 경상남도는 물론 경상북도, 전라남도까지 도로변 포플러 가로수에 양철 판에 붓글씨로 쓴 동명제재소 간판을 달아놓았다. 당시 사업을 선전하거나 홍보 인식이 부족할 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모든 것을 해보자는 도전 의식과 사업 감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소비자의 만족도는 물론 기호와 취향의 변화 등도 조사했다. 조사 결과에 맞춰 제품을 개발하고 기계 설비의 확충에도 나섰다.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불량품이 없어야한다며 일찌감치 제품 실명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동명목재상사의 종업원은 많을 때는 7,000명을 넘었다. 합판의 일일 생산량만 해도 수십만 매를 기록했다. 동명에서 생산되는 합판은 생산 라인마다 고유의 표시를 해둬 불량이 나오면 어느 라인에서 누가 만든 합판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종업원들이 스스로 품질에 신경을 쓰는 체제를 구축한 셈이었다. 이미 그 때부터 생산 제품의 실명제를 실시한 것이었다. 대금 결제의 현금 처리로 회사의 신뢰를 쌓았다. 당시 대부분의 기업들이 어음 결제를 관행화한 현실로 볼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금 지급을 현금으로 지급한 것은 동명이 ‘정직’과 ‘신용’ 곧 사훈인 ‘정의’의 실천적 사례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강석진 회장의 기업 경영 철학의 하나기이기도 했습니다.”[강기수 전 동명목재상사 부사장] 철저한 사회 보국 정신도 일조했다. 기업이 튼튼하면 국가가 번성한다는 것이 강석진의 생각이었다. 이 같은 정신은 제품에 혼을 불어넣었고, 직원들을 최고 가치의 재산으로 여기게 했다. 기술 개발과 인재 교육에 최고 수준의 투자비를 쏟아 넣었다. 기업 성장의 다양한 동력을 갖춘 동명그룹은 성장세를 구가하면서 지역 경제를 한국 경제의 중심축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