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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동의 기억-고물상을 운영하는 이용순(남, 1949년생)씨
2019.11.15.
충남 논산이 고향이다. 1960년대 초 원평동으로 올라와 정착했다. 고물상, 개인택시, 회사택시를 하다 고물상을 운영하며 각종 봉사활동에 앞장섰다. 원평동의 지도자급 인물이며 주요 책임도 많이 맡았다.
사장님은 언제 원평동으로 오셨어요?
56년, 57년쯤 됐나.
그러면 1963년경이네요?
63년, 64년쯤일 거여.
어떻게 오시게 되었어요?
내가 공주 계룡면이 고향인데 큰 집이 평택에 살았어요. 여기가 좀 낳겠다고 해서 오게 된 거죠.
큰 집도 이 때 오셨나요?
비슷하게 올라왔어요.
그 당시 공주 분들이 시내로도 많이 오고 원평동에도 많이 왔네요?
네 그렇죠.
당시 원평동 분위기는 어땠어요?
내가 올 때만 해도 벽돌집에다 루핑지붕 얹은 집이거나 나무로 지은 것에 루핑한 집들이 많았어요. 순 하꼬방이죠. 여기가 원평택 이거든요, 경찰서도 여기 있었고 수리조합도 여기 있었고, 그것들이 저 쪽으로 넘어간 건데... 저 왔을 때만 해도 수리조합 같은 것은 있었어요.
세무서가 6.25 후에 기호농조가 되었으니까요. 당시 원평동에서 큰 건물은 뭐였어요?
세무서, 평화병원. 세무서가 기호농조였고. 다른 큰 거리고는 대동연탄, 광신연탄이었죠.
연탄공장 있었으면 주변이 시커멓겠네요?
그렇죠. 그래서 여기 사는 사람들은 연탄공장에서 빨래비누 사서 나눠주고 그랬어요.
그럼 옛날에 있었던 여관들은 없었어요?
역 앞쪽으로 단양여관이 있었어요. 그리고 여기(서부역 좌측)가 미군 TMO자리였구요. 여기 뒤로(철길 옆)가 순 하숙집들이었어요. 무허가 하숙집. 이 동네가 다 그랬어요.
하숙집이라면 지금의 여인숙 같은 거요?
여인숙 같은 건데 무허가지. 가정집에서 사람들 재우고 몇 푼 받고 하는 집들이었지. 철길 옆으로 쭉으로 다 그런 집들 많았죠.
기본적으로 낙후된 지역이었네요. 그런 모습 보고 실망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우리 고향은 워낙 산골이어서 여기오니까 기차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도시 왔다는 자부심도 생기고 그러더라고... 허허허.
고향이 계룡면 어디세요?
계룡면 내흥리라고 아주 산골이죠. 거기는 엄청 산골이예요. 공주장을 25리씩 걸어 다녔응께.
저도 초등학교 왕복 10리씩 걸어 다녔어요.
우리는 더 걸어 다녔어요.
여기 올라와서는 뭐했어요?
여기 왔을 때는 나이가 열 몇 살이니께 하는 건 없었지. 우리가 고향에서는 괜찮게 살았다고. 아버지가 이발도 하고 괜찮게 살았는데 아버님도 배운 게 없으니께 여기 와서 쌀장사도 좀 해보고 다 안 된 거지. 가족이 다 이사 같이 온 건디. 그런디 어머니가 3년인가 4년인가 지나서 아파서 공제병원에 입원했어요. 세무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던 병원인디, 당시에는 병원이라고는 그거 밖에 없었어요. 거기에 한 1년 동안 입원 하니께 의료보험도 없을 때라 가진 돈 다 까먹고 고생 많이 했어요.
아버님은 나중에 뭐 했어요?
아버님은 나중에 고물상 했어요. 엿장수들 두고 운영했지.
그럼 사장님 사업이 아버님부터 시작됐군요?
그렇죠. 엿장사를 두고 했죠. 엿도 켜주고.
고물상은 어떤 조건으로 운영했어요?
그전에는 엿장수들한테 우리가 리어커 주고, 엿 같은 거 집에서 켜서 만들어 주고. 그거 받아서 나가가지고 고물하고 바꿔 오면 저울에 달아서 가격 쳐주고, 돈 계산하고, 집에서 재워주고, 아침 저녁밥은 무조건 해주고... 아이구 말도 마요.
보통일이 아니네요. 그럼 어머니도 없이 어떻게 운영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새로 얻었지. 아버지가 새엄마를 봤지.
그러면 고물상 해서 돈 좀 벌었나요?
아버님이 고물상하면서 나도 어려우니께 어쩔 수 없이 리어커 끌고 가서 (고물)했어요. 그거 하다가 시원찮으면 저녁에는 아이스케이크 통 들고 나서서 팔고 들어오고. 하여튼 제가 평택 와서 안 해본 것 없어요. 운동회 때는 설탕 녹여 띠는 거 있잖아. 띠기라고 그것도 해보고. 애들 소풍가면 께끼(아이스케키) 싣고 가서 팔고. 그런 생활을 몇 년 했죠.
그러면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네요?
못 다녔죠. 학교는 제 밑 동생들도 중학교 다녔는디 나는 초등학교밖에 못 다녔어요. 중학교도 입학했다 그만두었죠. 그 때는 동생들이 넷이니까 내가 벌지 않으면 살 길이 없었어요. 동생들은 새엄마 앞이라 매일 울고 있지. 내가 벌어야 그걸 다독이니께 벌 수 밖에 없었죠.
동생들이 새어머니 눈치를 많이 봤네요?
그렇죠. 그래서 제가 밖으로 많이 뛰고 그러다가...(침묵) 제가 아버님보고... (19)69년도에 운전면허 시험을 봤다가 (19)70년도에 땄어요. 내가 지금도 면허 가지고 있는데. 평택에는 학원이 없고 인천 제물포에 가서 면허를 땄어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일수(돈) 얻어달라고 해서 제가 택시를 그냥 샀어요.
아버님에게 일수를 얻어요?
그때는 아버지가 사업을 하니께 일수를 얻어달라고 해야지요. 나는 나이도 어리지 누가 돈을 안 주죠. 그 때는 보험도 없고. 1년 반 하다가 1원도 못 건지고 홀랑 들어 먹었어요.
교통사고 났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하도 고장이 자주 나고, 그 때 기사를 두고 했는데 기사도 잘 안 나오지. 그러다보니 잘 안 됐어. 그래서 1년 반 만에 접었죠. 때려 치고는 월남을 갈려고 해병대에 지원했어요.
그러면 택시 할 때가 20살쯤 됐네요? 충격이 컸겠어요?
그렇죠. 21살에 해병대 갈려고 지원을 했지. 진해 갔다가 월남 갈려고 청룡부대 김포 거기에 떨어졌는데. 거기서 근무하다가 월남 갈려고 해병대 지원한 건데. 그 때는 월남가면 월급도 주고 생명수당도 주고 해서 월남 갈려고 했는데... 3중대 3소대에 떨어졌는데, 거기서 인자 대대본부에서 1번차 기사가 부대장 차 사고를 냈어요. (그래서 기사를 바꾸려고) 수송반에 올라 가서 보니께 쓸 만한 사람 없더래요. 내가 입대할 때 사회운전면허증 가지고 갔는데 운전면허증 있는 사람 조사하더라고. 내가 있다고 했더니 대대본부로 오라고 해서 갔죠. 처음에 트럭을 주더라고. 운전하는 걸 보더니 잘한다며 3일 있다가 수송부로 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대대본부 수송부로 갔지. 거기서 6개월쯤 근무하다가 부대장 기사가 시원찮다고 차출되어서 부대장님을 모시고 다녔지.
그 때 부대장이면 계급이 어떻게 돼요?
소령밖에 안 돼요. 대대장님이 중령이니께. 그래서 7번 순찰을, 전방시찰을 한 번 나갔더니 실력이 좋다고 7번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7번이란 게 대장, 부대장, 전령하고 기사만 있는 곳인디 그렇게 딱 떨어진데가 있어요. 그래서 부대장님에게 월남 가고 싶다고 월남 좀 보내달라고 부탁했지. 그랬더니 부대장님이 그러셔. 월남 가면 많이 죽는데 뭘 하러 가느냐고.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지. 저는 동생이 학교를 가야하는데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랬더니 대장님이 내가 봉급이라도 타서 도와줄 테니 운전을 계속 하라고. 그래서 대장님이 많이 협조해줬어요. 정말 협조를 많이 해줬지. 사모님이 사제옷도 사다 주시고. 그래서 무사히 제대했어요.
전역 후에는?
제대한 뒤에 택시를 했어요. 회사 택시를 했지. 열심히 했는디. 그 때는 봉급이 참 좋았어요. 그 때는 사우디 바람이 불었잖어. 그래가지고 젊은 사람들이 사우디로 빠지고 기사도 빠지고 사람이 귀했지. 1960, 70년대에 회사원들이 우리 봉급 못 쫓아왔어요. 회사원 봉급보다 우리가 나았어요.
어디운수였어요?
그 당시 평택에 광립이 컸지. 광립이 처음에 파고다에서 시작해서 몇 번 바뀌었어요. 처음에 파고다에서 여러 개 갈렸지. 저는 광립, 거기서 젤 오래 했죠. 거기서 내가 모범운전사 그걸로 차출 되가지고 학교 앞에 가서 교통정리도 하고 그랬죠. 내가 운전을 딱 12년 했어요. 그 때부터 운전하면서 봉사로 뛰어들었어요. 돈은 없고 그래서 처음에 뭘 손댔냐면 기동순찰대라고 처음 생길 때 내가 첫 회예요. 그 때는 성내파출소(역전파출소)에서 일했어요. 제복입고, 방범들하고.
그럼 기동순찰대는 무슨 일을 했어요?
방범들하고 똑 같죠. 술 먹은 사람 데려다 주고. 싸움하는 사람 말리고. 내가 순찰대장을 11년 했나. 순찰대 하다가 여기다(원평동) 순찰대를 만들었어요. 여기가 무허가 하숙집들이 있다보니까 맨날 싸움 투성이고 우범지대고, 부랑아들도 많고, 파출소 설치해달라고 해도 해주지도 않고. 그래서 우리가 여기다 초소를 만들었어요. 동네서 땅 빌려 줘가지고 초소도 놓고 봉사 좀 해 보자 해가지고. 우리가 회비를 내면서 일했어요. 저기(철도역 앞 골목길) 골목길은 어둡고 으슥했어요. 우리 회원 중에 전기기술자가 있었어요. 그 사람 시켜서 무상으로 전기 가로등도 달고. 여기 무허가 하숙집, 옛날 실업자들도 와서 잠자고 땡깡부리고 하느라 범죄도 많고 했는데 우리가 3년 만에 하숙집을 퇴치시켰어요. 여기 발 딛지 못하게 했지. 주민들도 그걸 알고 밤에 야식도 보내주고 라면도 끊여다 주고 칭찬 많이 했다고. 그렇게 순찰대가 힘 받으니께 회원들도 20여 명으로 늘었어요. 그래서 제가 순찰대 차를 만들었어요. 봉고차를 할부로 사서 개조했지. 경찰차 마냥 경광등 달고. 행사가 있으면 나가서 질서정리해주고.
한영우씨라고 아세요?
그 친구가... 내가 옛날에 큰아버지가 하는 고물상을 인수했어요. 그만두신다고 해서 다른 사람 준다는 거 내가 인수했지. 여기는 토백이(토박이)가 많이 없어요. 토박이라고 해도 여기서 먹고 살게 없으니께 외지로 나가서 사람이 별로 없어요. 후배인데 그 친구도 활동 많이 했죠.
공주 계룡면 살 때는 아버님이 이발소했어요?
이발하면 그 전에 시골에서는 지방울이라고 어른들은 1년에 보리 한 말 벼 한 말, 애들은 5되씩 가져왔어요. 그러고 1년 동안 이발을 해주는 거지. 그렇게 받아도 시골에서는 6개 마을을 했으니께 괜찮았지. 우리도 옛날에는 상고머리나 깎고 했으니까 이발하기도 쉬웠지.
사장님은 왜 아버지 기술을 배우지 않았어요?
안 배웠어요. 나는 어려서 운동을 엄청 좋아했어요. 태권도도 좀 다녔고. 그 때는 여기서 운동을 안 하면 돌아다니지도 못했어요. 태권도 하면서 도복을 들고 다니니께 안 건드리더라고. 평택이 미군부대가 있어가지고 엄청 드셨어요(드셌어요).
사장님 성장할 때가 엄청 어려웠던 세대죠?
우리 세대가 6.25 직후에 컸던 사람들이잖아요. 그 때니께 보릿고개 있고 그랬던 시절이예요. 나도 젊었을 때 영등포 구로에 가서 하동환자동차 거기서 일했는데 한 달에 월급 6천 원 주더라고. 그것으로 동생들하고 도저히 먹고 살기 힘들었지. 그래서 고려합성 여기 저기 돌아다녔지.
고물상을 하게 된 계기는?
내가 시작한 것은 큰아버지가 그만 둔 것을 인수하면서 부터였지. 삼화고물상인데 내가 인수하면서는 계룡상회로 바꿨지. 그러다가 지금은 패룡철강으로 다시 바꿨고.
계룡상회 위치는?
여기 민자역사 만들며 철거됐어요. 여기 기차역 옆에 있었는디.
그래도 많이 성장했네요?
많이 성장했죠. 옛날 못사는 것 비하면 많이 성장했지.
고물상 인수시기는요?
택시 그만두고 했응께 1980년 중반 조금 넘거나 그랬을 거예요. 내가 택시 그만두고 모아 놓은 돈으로 했으니까 1980년대 중반은 됐을 거예요. 퇴직금은 없었고 집 사 놓을라고 모탰지.
엿장수 두고 했나요?
그 때는 엿장수는 아니고 일반 고물상에서 모태 놓으면 내가 가서 모아다가 인천제철에 납품했어요.
그럼 도매상이라고 할 수 있네요?
그렇죠. 여기저기서 모아다가 넘겼으니께. 현대에서 운영하던 인천제철에 넘긴 거여. 그 시절에는 고물 받는 데가 인천제철밖에 없으니께. 저기 당진에 한진, 지금은 현대지. 현대제철이 생기니께 고물상들이 많이 생겼지. 그 때는 많이 없었어요. 그 때는 고물상 하는 것 천하게 봤지. 크게 돈은 벌어도 좋게 안 봤어요.
주로 어떤 것을 취급했어요?
회사 같은 데서 프레스 자동차 부품 같은 것 찍으면 찌꺼기, 기리바시라고 하죠. 그거 모아다가 가져오고, 철거한 것 모으고, 공장 철거한 거 그런 거 하고.
규모가 커졌네요?
엿장수 두고, 고무신 모으고 하는 것은 옛날 얘기지. 그럼요, 지금은 장비로 일해요. 순전히 손으로 일할 때는 25명 직원까지 두고 일했는데 지금은 순전히 장비로 하니께 사람을 몇 사람 안 둬요.
연세가 드셔도 운영하는 데는 지장 없네요?
그럼, 나는 막내 동생 두고 일하니께 일은 동생이 다 하고 나는 사무실이나 지켜주고, 거래처 사장들과 차라도 한 잔 하고 골프라도 치고 그러지.
그럼 사장님은 거래처만 관리하는 거네요?
그렇지. 허허
지역이야기 좀 할 께요. 동네이야기 좀. 이 지역이 옛날에는 우범지대였고 주민구성이 다양했잖아요. 같은 원평동이라도 사는 지역마다 주민들 직업이나 생활조건이 달랐나요. 혼마치하고 다른 지역사람들하고?
다른 건 없고 여기 사는 방식이 철길에 가까운 곳, 여기에 조개탄 같은 것 쌓아뒀잖아요. 못사니께. 그거 자루 가져와서 훔쳐가고 걸리고 하다 보니 항상 살벌하지. 맨 그런 거. 옛날에 그 시절에는 물장사, 물수건 장사, 가차 서면 그것 팔려고 매달리고.... 순전히. 그런 사람이 많았지.
주민들 직업구성은 다양했네요?
우리 동네사람들은 역전에서 세멘(시멘트)같은 것 하차하는 것도 많이 다녔고, 연탄공장, 제일 많이 다닌 건 안정리 미군부대 많이 다녔지. 얼추 반 이상은 다녔다고 봐야지. 그 시절에는 인구가 많지는 않았지만 많이 다녔어요.
사람들은 어디에 많이 살았어요?
요기지 뭐 요기 평택 4리, 5리, 6리(원평동).
4리가 어디죠?
여기 동사무소 들어가는 데 있지. 농협(단위농협 원평지점) 있는데 거기여.
5리는요?
역전에서 나가는데, 본정통 거기 우측에. 6리는 본정통 좌측이고.
사는 조건은 어떤 마을이 좋았어요?
사는 건 별 차이 없었어. 논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은 좀 잘 살고. 다 비슷했어.
옛날에는 교통편이 통복동 땡땡거리로 돌아다녔잖아요. 평택역 옆에 고가다리 설치한 것은 언제예요?
저거 부순 게 10년 되었나? 내가 볼 때는 저 고가다리가 세워지고 십 몇 년 사용했을 거예요. 고가다리 없을 때는 사람들이 철로를 무단횡단하고 많이 위험했어요.
고가다리(역전 옆) 놓고 좋아진 점은?
살기가 한 결 나아졌지. 시내 나가기도 가깝고, 시장가기도 좋고.
통복고가는 버스사고 뒤에 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죠. 그게 나쁜 게 고가 놓고 좌회전 도로가 끊어졌잖아. 그것 땜에 말이 많았어요. 지금은 우회전 하는 것만 남겨놨는데 저것도 얼마 뒤에 없애려고 하는 가 봐요.
일부 주민들은 남겨서 문화상징으로 두자는 의견이 있던데요?
우리 동네서는 그렇지도 않아요. 차라리 여기서 송탄 나가는 길 좌회전하게 하는 게 낳지 뭐하러 그걸 남겨둬요.
45번 도로가 삼성아파트 쪽으로 우회한 것은 언제부터였어요?
그거는 오래되었어요. 몇 년도인지 잘 모르겠는데 거기가 본래 둑방이잖아요. 옛날에는 거기다 말 같다 메 놓고 소 같은 거 메 놓고 우리가 저녁이면 나가서 놀고 그랬거덩.
택시할 때도 길이 났었나요?
택시 할 때도 있었어. 생겼으면 그 전이지.
옛날에는 본정통으로 트럭 다니고 하니까 민원이 많았던 가 봐요?
미군트럭 다니고 차들 다니고 할 때는 문제가 많았어. 집 처마들도 다 부서지고 도로도 좁고. TMO가 역전 옆에 있으니까 미군트럭도 많이 다니고 먼지 나고. 그래서 시(市)에서 도로를 바깥으로 낸 거지.
그럼 외곽도로가 생긴 것은 주민들 민원으로 된 것은 아니네요?
우리 선배들이 해달라고는 많이 했겠지.
차량통행이 줄어들면서 피해는 없었나요?
피해는 없었지. 아무래도 나아졌지.
새마을운동은 언제 시작했어요?
1966, 7년도부터 했을 거여.
제가 아는 새마을운동은 정부가 1970년 이장들과 마을 대표들을 농업진흥청에 불러다 교육시키고 시작했거든요? 330포 시멘트 공급하고 시작했는데 여기는?
여기도 1976, 7년 경 했을 거여. 그 때부터 88올림픽까지.
어르신도 마을 통장 했어요?
나는 통장은 안 하고 새마을지도자 하다가 원평동 지도자 한 거지. 내가 원평동지도자협의회 회장을 했는데 8년은 했을 거여. 지도자를 하면서 겸직한 게 동사무소체육회장이란 게 있어. 그걸 2대인가 3대인가 하고, 동사무소 방위협의회장도 맡아 하고.
방위협의회장은?
방위협의회장은 예비군훈련할 때 밤에 가서 커피도 타주고 자원봉사하는 거지.
회장님이 참 봉사활동을 많이 했는데요?
돈이 없응께 몸으로라도 봉사하자 해서 일했지. 나이도 젊고 하니께 몸으로 때우는 것은 얼마든지 하겠다. 새마을사업할 때도 동네에 구성자씨라고 있는데 노는 땅에 하지감자도 심고 논에 벼 수확도 하고, 그걸 팔아가지고 우리 동네 노인정이 12군데, 13군데 있었을 거여. 그거 팔아가지고 노인정에 겨울에 석유 2도라무(두 드럼)씩 지원하고 그랬지.
원평동 새마을운동은 농촌하고 다르단 말예요, 주로 무슨 일을 했어요?
농촌은 초가집 개량하고 도로 넓히고 하는데 여기는 도시니께 내 집 앞 청소하고 꽃길 조성하고 풀 뽑고 하는 걸 주로 많이 했지.
낙후된 원평동 개선작업은 안 했어요?
그건 이장들, 통장들이 주로 했지. 이장들이 많이 하는 일이지.
그 당시 이장했던 분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다들 돌아가셨어요. 표영길씨 등이 열심히 했지.
새마을운동하면서 달라진 점은?
크게 변한 것은 없고 마을이 좀 깨끗해지고 우리가 노인정 같은데 지원해주고 하는 것이 나아졌지.
회장님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활동하신 거네요?
내가 순찰대하고 같이하면서 그 시절에 체육부장관상도 하나 받은 게 있어요. 내가 수원에 가서 6장짜리 낭독하라고 해서 그거 하고 왔는데.
활동을 언제까지 하셨어요?
그만둔 지 얼마 안 돼요. 지금은 노인회장을 하고 있는데, 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우리는 시(市)에서 지원하는 거 없이 돈을 내가면서 했어요.
새마을운동은 언제까지?
전경환씨 있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아요. 그 때까지 했다고 봐야지.
이 동네는 지붕개량 같은 건 안 했어요?
했어요, 내가 기억이 없어서 그렇지. 그 때만 해도 초가집이 있었어요. 그건 이장들이 나서서 해서 그렇지. 골목길 포장 같은 건, 그 땐 다 비포장 아니예요. 이장들이 시멘트 가져다가 포장도 하고.
서부역 만들어지고 좀 나아졌나요?
저는 나아진 것이 없다고 봐요. 그전만 못해진 게 원룸만 생기니께 동네가 버린 것 같아. 원룸들이 빈 것도 많은데 초창기에 잘 나가다가 옛날에 지은 것은 엘리베이터 없으니께 다들 비어서. 원평동 사람들이 옛날보다 안 좋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요. 예전에는 4통이든 5통이든 다 알고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은 서로 몰라요. 한 동네처럼 살았는데 정도 없어졌고.
옛날에는 주민들이 원평동지역 개발하라고 민원도 많이 냈잖아요?
그래서 많이 좋아지긴 했지. 도로도 새로 내고 포장도 하고.
영단방앗간에 대한 기억, 소주공장에 대한 기억은 있나요?
방앗간은 있다는 것만 알지 뭐 잘 알진 못하고. 소주공장은 방학소주가 있었는데 술밥을 몰래 훔쳐가지고 먹고 하던 기억이 나네.
그럼 소주공장은 몇 년도까지 있었어요?
내가 이사 와서도 있었으니께 1960년대 중반까지는 있었을 거여. 나중에 은실(세교동)로 이사갔지.
연탄공장은 언제 없어졌어요?
한 20년은 됐을 거여. 광신연탄은 서부역 동쪽 주차장 자리잖어. 대성연탄은 통복지하도 옆에 있었고. 일자표는 삼리에 있었고.
자녀들은?
아들 둘이여. 큰 애가 49살이고. 둘 다 신한고등학교 나왔어.
고향에는 지금도 가세요?
자주 가는 편이여. 우리가 전주 이가(李家)인디 집성촌여. 거기 산소도 다 있고.
일은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해야지. 일을 허니께 일한다는 자부심도 있고 건강하고. 골프도 한 20년 하고. 한농종묘 유상춘이하고 등산도 하고. 내가 원평산악회 창립멤버여. 유상춘이가 산을 좋아하고 컴퓨터도 잘하고 해서 회장을 오래 했지.
통복동 한농종묘 건물은?
거기가 본래 공장건물이여. 수문(水門) 만들던 공장. 백한기씨라고 연세가 많아서 돌아가셨는데 그분들하고 친목계를 같이 했어. 그래서 잘 알지. 우리 친구들 4명이 그분들하고 친목계를 했어. 내가 사업을 하다보니께 어떻게든 봉사단체든 사회단체들 들어간 거여.
사모님이 뭐라 안 하셨어요?
우리 집사람이 이해안했으면 못하지. 좋아했지. 집사람도 강원도 사람인데 협조 잘 해줬지.
지나다보니까 외국인들이 많던데요?
많아요. 중국사람들이 아주 많아. 여기 할머니들이 줍던 파지도 그 사람들이 주워다 팔고. 탈북인들이나 동남아인들은 별로 없어.
왜 중국인들이 많을까요?
여기가 역(驛)도 가깝고 집값이 싸잖어. 싸니까 많이 오지. 여기 중국사람들 가게도 많아. 우리는 지금도 술 한 잔 해도 중국 사람들 집에는 안 가.
여기(TMO 입구) 상권이 많이 죽었어요?
죽을 수밖에 없지. 역(驛)도 저쪽(서북쪽)으로 옮겼지. TMO도 운영 안 돼지. 육교도 없어졌지. 통행이 없으니께 상권이 다 죽었지.
요즘 사업은?
여기 군문초등학교 앞에 집이 있어. 3층짜리 건물인디. 우리 집사람이 거기 살고. 공장은 안정리에 있어요. 대지가 넓어서 괜찮어. 옛날에는 돈이 없다고 친구들이 노는 데 끼워주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내가 더 낫지. 술값도 내가 내고. 아들들도 큰 애는 중소기업 차장하고 둘째는 볼보자동차 다니고. 다들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