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한남정맥 04차(양고개~지지대고개) 용인시, 수원시 산 행 일 : 2016. 02. 13.(토) 산행코스 : 양고개~소실봉~43번 국도~응봉~버들치고개~형제봉~광교산~백운산~지지대고개 (거리 19.1km) 산행참가 : 22백두.
<산행코스>
산행 출발지가 신갈이라 대중교통으로도 접근이 쉬운 편이어서 버스료 60만원을 아껴볼까 하고 살짝 고민을 했었으나,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너무 많아 일찌감치 포기를 했다. 그리고 지난번 산행 도중 매서운 추위를 피해 편의점에서 아침식사를 한 이후로 따뜻한 아침식사에 대한 요구들이 빛발쳐, 부득이 아침식사 장소 물색에 총력을 기울였다. 수지 상현지구에 연고가 있는 분들로부터 몇몇 곳을 추천받아 살펴보았으나, 거리관계 또는 패점으로 불가하여 부득이 스트리트뷰를 보며 '아침식사 가능'을 찾아야만 했다. 다행히 산행 노정에 있는 해장국 가계를 발견하고 부탁을 드려 가계문 여는 시간을 1시간 정도 앞당기기로 하고 예약을 하였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내 돈 내고 밥 먹겠다고 하는데도..ㅉㅉ 매서운 추위와 싸웠던 지난 산행의 기억이 생생한데, 이번 산행에는 비가 내린다는 예보다. 요즘 날씨는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세상살이와도 닮은 듯하여 씁쓸한 기분과 함께, 겨울산행에 눈도 아닌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여간 걱정스럽지 않았다. 다행히 양도 작고 산행 시작 전에 그친다는 예보만 믿어 볼 뿐이다.
양재를 출발한 버스는 금새 신갈 만골근린공원 앞에 도착하였고, 기~인 긴 시간 동안 자다 깨다를 반복 하며 산행 출발시간을 기다린 끝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누군가가 불을 켜달라고 하여 산행 준비에 들어간다.
만골근린공원 앞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보니 간밤에 내린 비가 아직 흥건한 상태다. 그나마 지금은 그친 상태라는데 만족을 하고, 도보 대신 버스로 한남정맥 잇기를 시작한다.
산행 준비를 마치고 양고개까지는 버스로 한남길을 이어가기로 한다. 버스로 새천년그린빌 5단지 앞으로 이동하여 좌회전하고, 용인운전면허시험장까지 진행한 다음, 다시 우회전하며 영동고속도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오늘 산행의 시작점인 양고개에서 하차하여 도보 산행을 시작한다.
<양고개> 23번 지방도(천안-파주)가 지나며, 용인시 구성읍과 기흥읍의 경계에 있다. 신갈오거리와 죽전을 연결하는 도로이며, 그 위로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양고개 SK충전소 앞에서 하차하여, 횡단보도를 건너 수원국토관리사무소 입구로 진입하며 산행을 시작한다.
수원국토관리사무소 입구 직전에 표지기들이 한두 개 걸려 있는 우측 숲으로 들어간다. 작은 언덕 수준의 능선에 올라서니, 우측에 경기도 여성인력개발원 울타리쯤으로 보이는 철망이 처져있어서 잠시 동안 철망을 따라 진행하는데, 우측 기흥구 마북동 방향으로 시가지 불빛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임도 수준의 도로를 통과하여 건너편 절개지로 오르는데, 빗물을 머금은 황토흙에 신발이 한없이 빠저든다.
다시 능선에 올라서니 좌측으로 경부고속도로 신갈JC가 보이고, 어둠 속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서울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다 보면, 신갈JC가 한남정맥을 차지하고 있어서 정맥꾼은 돌아갈 뿐이다.
고속도로 임시비행장으로 사용되었던 넓은 공터로 내려서게 되고, 아스팔트 포장의 넓은 공터를 가로질지르면, 경부고속도로를 건널 수 있는 지하통로가 나온다.
경부고속도로 지하통로를 통과하면, 이젠 구성읍을 벗어나 수지구로 접어들게 된다.
지하통로를 나와 잠시 진행하면 4차선 도로와 만나, 좌틀하여 도로를 따라 한진교통 방향으로 진행하면, 우측 아래로 최근 확장 개설된 용인과 수원을 연결하는 43번 국도가 내려다 보인다.
한진교통 건물 앞을 지난다. 수지에서 역말고개를 넘어가는 길에 정맥꾼들에게 이정표가 되는 택시회사 한진교통 건물이 있다. 한진교통 앞으로는 용인~내곡동 간 고속도로가 지나가는데,
한진교통을 50m쯤 지나 용인~내곡동간 고속도로 밑에서,
우측 콘크리트 옹벽으로 올라,
다시 산길로 접어드는데, 앞서 가던 분들이 들머리가 미심쩍은지 기다리고 있다.
돌아본 용인~내곡동 간 고속도로.
뚜렷한 등로나 표지기도 없이 이어온 한남길에 반가운 정맥 표지판이 반갑고,
당집 같은 건물도 지난다.
좌측 아래로 43번 국도 가로등 불빛이 내려다 보이는 능선을 따라 비에 젖은 한적한 오솔길이 이어지더니,
우측 사면으로 내려서면 울타리 철망문이 있는 임도로 내려서게 되고, 임도를 따라 43번 국도가 있는 삼막곡 고개로 내려선다. 43번 국도 위로 생태통로를 만들어 놓았는데, 이름을 '해오라기터널'이라 붙여 놓았다.
<삼막곡고개> 용인과 수원을 잇는 43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로, 생태통로(해오라기터널) 아래로 대낮처럼 밝힌 도로가 시원스레 뚫려있다.
터널 위를 통과하여 다시 숲으로 들어 묘지를 지나 오르면,
여러 기의 묘지를 지나 능선을 따라 오르게 되고, 갑자기 커다란 초소가 나타나며 이중으로 된 철조망이 앞을 가로막아 서는데, 수자원공사 용인 취수장이 정맥길을 차지하고 있다.
철망 울타리를 따라 우측으로 내려가니 다시 묘지들이 즐비하고, 따라 잠시 더 진행하다가 우측 밭으로 접어든다. 돌아본 정수장 방향.
개간지 우측 가장자리를 따라 산으로 오르면,
소현중학교 울타리를 만나는데, 이곳과 소실봉 사이의 한남정맥 능선에 자리한 학교를 통과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정맥꾼들은 소현중학교 울타리를 따라 우측으로 우회하여 소실봉으로 가게 된다.
어둠에 싸여 있는 소현중학교 모습.
소현중학교 울타리를 따라 우측으로 내려서면,
앞쪽 기흥구 보정동 방향으로 시가지 불빛들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통나무 계단길을 내려서면 보정동 아파트 단지에서 소현중학교로 통하는 길에 내려서게 되고, 길을 따라 좌측 소현중학교 방향으로 오르면, 우측으로 소실봉 오르는 들머리가 있다. 소현중학교 정문 방향.
소현중학교 입구를 앞두고 우측 소실봉 들머리로 들어서서 잠시 오르면 절개지 위 능선에 서게 되고,
소실봉 가는 능선 좌측 절개지 방향으로 수자원공사 용인정수장이 보인다. 능선을 조금 따르면 금방 소실봉에 도착하니,
소실봉 정상은 널찍한 공터에 몇 개의 체육시설들이 설치되어 있다.
<소실봉(紹室峰, 188.7m)>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과 구성읍 보정동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소소봉(蕭韶峰) 또는 소실봉(巢室峰)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소실봉 유래와 관련된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 이곳에서 노아의 방주 같은 홍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이 세상은 온통 물바다로 변하여 웬만한 산은 모두 다 물에 잠겼는데, 이 소실봉은 주변 산보다 높아 봉우리가 조금 남았는데, 그 봉우리가 멀리서 보니 꼭 새집같이 보였다고 해서 소실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의 산 이름은 문소산(文小山)이었다고 한다. 문소산의 유래는 이곳에 있었던 문수사에서 따온 듯하다. 문수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준말로서 문수사가 있었던 좌측 계곡을 중느골이라 하여 절에서 경작하였던 전답이 있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본디 소실봉은 중국의 유명한 소림사가 위치한 숭산에 존재하는 산으로도 유명한데, 용인의 소실봉은 지역의 난개발로 인하여 주변 산들이 절반 이상 잘려나간 상태이고, 봉우리를 포함한 반쪽만이 달랑 남아있는 형국이다. 산행 출발 두시간여 만에 처음으로 봉우리에 올라 단체사진을 남기고,
아파트를 짓느라 산의 반쪽을 잘라낸 절개지 위를 따라 소실봉을 뒤로한다.
잠시 능선을 따라 내려오니 공사용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고, 가림막을 우회하여 들어서니 앞쪽으로 만현마을 아파트들이 보인다. 가림막을 통과하여 공사장 안으로 들어서는 백두들.
공사장 내부 도로로 내려서서 만현마을 아파트 단지가 둘러싸고 있는 상현초등학교 앞으로 내려간다.
내리는 비로 진흙탕이 된 임시도로를 따라 내려서는 백두들.
상현초등학교 앞에서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진행하는 백두들.
상현2동 주민센터 앞에서 좌틀하여, <늦은고개(만현마을 아파트 단지)> 지금은 늦은 고개란 말은 없어지고 만현이란 말이 아파트단지 이름으로 붙어있다. 횡단보도를 건너 좌측 아이파크 5단지 삼거리까지 진행하고,
아이파크 5단지 삼거리에서 우틀하면 바로 아침식사를 예약해 놓은 식당에 도착한다.
우리가 확실히 시간을 잘 지킨다. 산행시간을 짐작하여 7시에 예약을 해 놓았는데, 정확히 7시다! 선호의 차이가 있겠지만, 순대국보다는 콩나물국밥이 더 인기다. 겨울 산행에서 '뜨듯한 아침식사'라는 호강을 누린다.
비에 젖은 등로 같지 않은 등로를 찾아 헤매다가, 따뜻한 아침식사로 표정이 한결 여유로워진 백두들이 다시 출발 준비를 마치고, 한남정맥길을 더듬어 간다.
주변 아파트만큼이나 멋대가리 없이 커 보이는 수지방주교회 건물 앞을 지나고,
<교회> 이곳은 새로 생긴 주택단지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교회들이 여러 개 보인다. 하긴 우리나라 교회 숫자가 편의점 숫자보다도 많다고 하니 이해도 되지만, 그래도 저렇게 큰 교회 건물은 상당한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주변 경관과 어울리게 정성들여 지은 종교건물들이 좋지않을까 생각한다.
정면의 포은대로 망현육교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육교 아래로 통과하고, 상현동 현대홈타운 버스정류장 뒤편의 계단으로 올라,
육교를 통해 성복2로를 건너며 아름교회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좌측으로 보이는 수지영락교회도 경쟁하듯 커다란 몸체를 뽐내고 있고,
다른 백두들은 육교가 아닌 횡단보도를 건너오고 있다.
아름교회에서 계속 직진하여 삼성쉐르빌 아파트 앞으로 진행하여, 돌아본 아름교회 방향. 라임카운티라는 빌라도 지나고,
심곡초등학교 직전, 우측 골목 오름길로 들어선다. 수지풍산 아파트로 가는 골목길 모습.
수지풍산아파트 단지로 들어서서, 102동과 104동 사이로 나가면,
수지풍산아파트 정문으로 나오게 되는데, 우측 숲 두산인력개발원이 자리한 곳과 전방의 상현골프클럽이 자리한 곳이 한남정맥 마루금인데, 그곳으로 갈 수가 없으니 그 옆 도로를 따라간다.
직진의 도로 우측 능선이 한남정맥 능선인데, 건물이 차지하고 있어서 도로를 따르다가 매봉초교를 지나 우측 능선으로 붙게 된다.
힐스테이트 아파트를 보며 수지로를 횡단하여 건넌다.
<응골(103m)> 교차로 대각선 방향에 광교힐스테이트 아파트가 보이고, 우측에 공원으로 꾸며 놓은 곳을 응골이라고 하며, 이 지역 사람들은 망가리골 이라고도 한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있던 서원말이라는 자연부락이 예전에 LG아파트 근처 길이 막혔다 하여 막힌 거리라는 이름의 망가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사진에서 우측의 골프장 그물이 보이는 곳에서 이어지는 언덕이 한남정맥 능선이다.
힐스테이트 아파트 옆 도로를 따라 매봉초등학교까지 진행하면, 등로는 매봉초등학교 정문 좌측으로 이어진다. 돌아본 수지풍산아파트 방향.
우측에 매봉초등하교 옹벽을 끼고 진입하면 등산로 들머리가 나온다. 한남정맥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로 들어서며 돌아본 응골 전경. 들머리로 들어서서 한남정맥 능선으로 오르는 백두들.
한남정맥 능선으로 오르면 공사장 가림막이 앞을 막아서는데, 좌틀하여 오름길을 따라 응봉으로 향한다. 우측의 가림막이 철제 울타리로 바뀌며 응봉 오름길도 제법 가팔라지고,
응봉 오르기 직전 T자 갈림길에서 왼쪽 방향이 조광조 선생 묘지 방향이라 표시하고 있고, 한남정맥은 우측 형제봉 방향으로 이어진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 500여 년 전 조선시대 유학자요 정치가로, 개혁을 주창하다 돌아가신 분이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출사 하여 당시 임금 중종의 큰 신임을 얻었으며, 영남 유림의 수장이라는 김종직(1431~1492)을 이은 김굉필(1454~1504)의 제자였다. 정암(靜庵) 조광조는 유교적인 이상향을 급진적으로 추구했던 인물로, 타인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다고 한다. 급기야는 정적들의 반대에 몰렸고, 임금까지 등을 돌려 귀양에 보내져 결국 사약을 받아 서른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암의 개혁정책은 실패했으나 그의 학문이나 정신은 후에 존중되었다. 지도에 보면 상현동에 서원말이란 이름이 보인다. ‘서원’을 붙인 초.중.고 학교도 있다. 조광조 묘지에는 심곡서원(深谷書院)이 있다.
응봉(應峰, 230m) 정상에는 커다란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어서 부득이 울타리를 따라 우회를 하여야 한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좌측 군부대 울타리를 따라야 하는데, 직진 방향도 약수터 방향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잠시 알바 아닌 알바 길에 들어선다. 매봉약수터 방향 능선으로 가야 하는데, 산너울길을 따라 매봉약수터 방향으로 잠시 알바를 시작한다.
알바 아닌 알바는 편안히 진행되고, 좌측 약수터 방향은 사면 내림길인데, 표지판의 메봉약수터 방향으로 진행하면,
좌측 계곡 방향으로 내려가는 내림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도 되기는 하지만 최대한 한남정맥 능선에 가깝게 진행해야겠기에 알바를 멈추고 돌아선다.
다시 삼거리 갈림길로 돌아와 군부대 울타리를 따라 매봉약수터 방향으로 진행하면, 부대 울타리 옆을 따르는 능선길도 편안하게 이어지고,
우측 성복동에서 올라오는 등산로 갈림길을 지난다.
매봉재쯤에서 우측 사면 길로 들어서고, 갈림길에서 약수터 방향으로 오르면,
매봉(응봉)약수터에 도착한다.
매봉샘의 모습만 담고,
다시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능선 위에 서게 된다. 수원둘레길 안내판이 보이기 시작하며 능선길이 편안히 이어지다가,
버들치고개에 도착한다.
<버들치고개(175m)> 경기도 수지구 성복동과 수원시 하광교동을 잇는 고개로, 이곳부터 이정표들이 용인에서 수원으로 바뀐다. 옛날 이 고개의 양쪽이 늪지대였는데, 버들이 무성하여 키나 고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버들을 많이 채취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버들치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광교산 등산 안내도.
버들치고개를 지나 능선 위로 오르니, 완만한 소나무숲길이 이어지고,
좌측 철탑 사이로 서울용인간 고속도로가 발아래 성복터널로 이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쉼을 하던 백두들을 만나, 함께 형제봉을 향한다.
좌.우로 약수터가 있는 문암재쯤을 지난다. 우측으로 가면 천년악수터, 좌측으로 가면 백년약수터가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잠시 더 완만한 능선길을 오르면 수원시 광교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만난다.
<수원시(水原市)> 수원지역을 최초로 차지하였던 국가는 백제였다. 백제는 3세기 중엽 고이왕 때에 이르러 급격히 발전하여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고대 국가체제를 완성하였는데, 지금의 경기도지역 대부분이 당시 백제의 영토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인해 한강유역과 수원을 포함한 그 주변지역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이때 수원의 고유지명은 ‘매홀(買忽)’이었다고 한다. 매홀은 물고을이라는 발음의 표기로 추정되며, 여기에서 한자식 지명인 수원(水原)이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해양교통로의 중심지였던 당항성(현재 화성시 소재)은 삼국 간의 항쟁이 매우 치열하였다. 이렇듯 해양활동의 주무대였던 수원지역은 삼국의 각축장으로 삼국이 번갈아 점령하였는데, 마침내 신라는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하고 553년에 신주를, 557년에는 북한산주를, 561년에는 남천주를 설치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9주 5소경의 설치에 따라 수원은 한산주(漢山州)에 속하였는데, 757년(경덕왕 16)에 전국의 지명을 한자(漢字)로 바꿀 때 한주(漢州) 소속의 수성군(水城郡)이 되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수주(水州)라 하였고, 1271년(원종 12)에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가 되어 ‘水原(수원)’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였다. 이후 수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수원부, 수원군, 수원부로의 변화를 거듭하였다.
갈림길 이정표.
갈림길 옆에는 비닐천막 포장마차가 있는데, 뜨거운 어묵굴물과 막걸리를 나눠 마신다.
이의동 갈림길을 지난다.
이의동은 원래 용인시 수지 관할이었는데 1983년부터 수원시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좌측 수원의 경기대 쪽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만나 우측의 형제봉으로 올라가게 된다.
형제봉 오름길은 왕래하는 등산객들이 많아서 그런지 널찍한 나무데크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형제봉 직전 능선에 올라서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제봉은 밧줄을 타고 올랐는데, 이제는 데크목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형제봉 정상에서 수지 방향 구름을 배경으로.
<광교산 형제봉(448m)>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과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형제봉능선은 광교산 줄기에서 가장 멋있는 능선이며, 봉우리의 양면이 벼랑이고, 동쪽 봉우리 건너편에 조금 낮은 아우봉(弟峰)이 있기 때문에 형과 아우가 나란히 있다 하여 형제봉(兄弟峰)이라 부른다. 정상에서는 광교저수지와 수원시내뿐 아니라 용인, 성남, 저 멀리 청계산 자락까지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조망이 좋다. 또한 이곳부터는 주봉인 광교산 시루봉이 잘 보이면서 군포의 수리산, 의왕의 모락산도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 물방울만 보인다. 형제봉 정상의 백두들. 형제봉 인증.
형제봉을 뒤로하고 광교산 정상인 시루봉을 향한다.
비가 왔음에도 거적때기가 깔려 있어서 그런지 별로 불편함이 없는 등로가 이어지고,
광교산 비로봉 오르기 직전에서 좌측으로 70m 정도 떨어진 곳에 김준용 장군 전승지를 알리는 이정표를 만난다.
<김준용 장군 전승지 및 비(金俊龍將軍戰勝地 碑)>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의 광교산에 있는 병자호란 때의 전승지 터와 그 기념비로, 충양공(忠襄公) 김준용(?∼1641)은 1608년(광해군 원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인조 14)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여, 13일 만에 수원 광교산에 이르러 청군(淸軍)과 싸워 청 태종의 부마 양고리를 비롯한 청의 장군 2명을 죽이고, 수많은 적병들을 사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1794년(정조 18), 수원성(水原城) 축성을 관리하던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이러한 사실을 그곳 사람들로부터 전해 듣고, 김준용이 대승을 거둔 이 광교산의 천연 벽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하였다. 김준용은 1640년(인조 18)에 김해도후부사가 되고 1년 만에 영남절도사가 되었으나, 다음 해에 병이 심하여 사임한 후 바로 사망하였다.
김준용(룡) 장군 전승지 및 비 안내판.
아마도 김준용 장군이 승리를 거두었던 전쟁에서 패함에 따라 장군이 거둔 전승의 빛은 바래졌던 듯하다. 또한 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조선에서 전승 장군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김준용 장군 전승지 비 갈림길을 지나 오르막길을 200m 정도 올라서니 광교산 시루봉 가는 우회길이 나타나고, 좌측의 정상으로 직진을 하니 커다란 정자가 나타난다. 흔히들 종루봉이라고 부르는 비로봉(490m)이다. 이곳을 몇 차례나 왔었음에도 이곳이 비로봉임은 한남정맥 산행 준비를 하면서야 알았다.
정자 안에는 두 편의 시가 걸려 있는데,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말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강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懶翁禪師(나옹선사 1320~1376)의 詩도 있고..,
山中好友林間鳥(산속의 좋은 친구는 숲 속의 새요) 世外淸音石上泉(세상에서 가장 맑은 소리는 돌 위에 흐르는 물소리다) 라는 한시도 있다. 시를 음미하며 느긋한 쉼을 가진다.
비로봉이란 이름이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봉우리를 뒤로하니, 이내 토끼재를 지난다.
<토끼재> 옛날에 토끼를 잡으러 다니던 골짜기 위에 있었다고 하여 토끼재라 불렀다고 한다.
토끼재를 지나 잠시 오름길을 오르면,
광교산 정상인 시루봉에 도착한다. 빗방울이 흩날리는 시루봉 정상에서의 조망은 역시나 단색만 보인다.
<광교산 시루봉(582m)> 수원시와 용인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정상석에 광교산 시루봉이라 표시해 놓았다. 시루봉은 원래 이곳에서 동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커다란 바위봉을 지칭했다. 용인시 수지 쪽에서 보면 이 바위가 떡시루처럼 보인다고 해서 시루봉이라 불리었고, 지금의 광교산 정상인 시루봉은 측량 삼각점이 있다 하여 폿대봉이라고 불리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두 봉우리를 다 시루봉이라고 부르고 있다. 광교산은 용인팔경에는 광교설경, 수원팔경에는 광교적설로 양쪽 모두에서 설경이 아름다운 걸로 치고 있다. 신경준의 산경표에 의하면 한남정맥에서 높이가 가장 높은 산이다. 택리지에 「광교산으로부터 북쪽으로 관악산이 되고 똑바로 서쪽으로 수리산이 되어서 서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본래는 광악산(光岳山)이었는데, 928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평정하고 광악산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을 위로하고 있을 때, 정상으로 광채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이 산은 부처가 가르침을 내리는 산이라 하여 산 이름을 광교라 사하였다는 일설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론 수원시이나 산자락은 의왕.용인까지 뻗어 있어 서로 '의왕 광교산' '용인 광교산'으로도 불리고 있다.
광교산 정상의 서여사님. 매일 수암산을 다니며 광교산은 처음이라고 한다. 앞으로는 광교산 메니아가 될 듯! 광교산 정상 인증.
시루봉을 뒤로하고 노루목 갈림길을 지나고,
노루목 대피소도 지나면,
이정표에 '억새밭'이라 표시된 광교저수지 갈림길을 지나게 된다.
억새밭이란 이름의 안부를 지나 백운산으로 가는 능선은, 군 통신대와 경기방송국 송신탑에 이어 미군 통신부대까지 합세하여 한남정맥 능선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다.
그래서 등산객들은 좌측이나 우측으로 우회하여 가야 하는데, 나는 우측으로 간다. 왜냐면 돌아올 때 좌측 길로 올 거니까! 산꾼들은 묘한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갔던 길을 다시 돌아오는 걸 싫어한다는 것이다.
백운산 정상 정자에 도착하니, 백운산 등산 안내도가 있고, 먼저 왔던 백두들이 돌아나온다.
백두들이 떠난 백운산 정상 인증을 홀로서 할 밖에는!
<백운산(白雲山, 562.5m)> 의왕시와 용인시, 수원시 등 3개 시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산세가 깊고 험하여 서울 근교에서는 관악산에 버금가는 등산코스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산 중에서 가장 많은 이름을 가진 백운산(白雲山). 산봉우리에 늘 구름이 쌓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백운호수로 불리는 백운저수지를 끼고 있고, 백운저수지 근처는 라이브 카페촌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백운산은 흔히들 등산 마니아들에게는 '삼관우청광'이라는 5산 종주코스로도 유명하다. 우리 백두들은 10여 년 전쯤에 한두번 걸었던 코스인데, 그 이후로 무리하지 말자는 중론으로 보신 산행만 열심히 하고 있다.
백운산에서의 조망도 역시나 단색이다.
통신부대 울타리를 따라 지지대고개 갈림길로 돌아나와, 지지대 고개 방향의 내림길로 접어든다.
잠시 계단을 내려서니 백두들이 쉼을 하고 있고,
잠시 더 내려서니 전망대가 있다. 가야 할 지지대 고개로 이어진 한남정맥 능선을 배경으로. 남서쪽 지지대고개 방향. 남쪽 광교저수지 방향.
미군통신부대를 만나 좌회길로 접어들어,
부대 울타리를 따라 잠시 진행하면, 부대 정문 앞으로 나오게 되고,
통신대 헬기장을 지난다.
헬기장에서 모락산을 배경으로. 좌측 나뭇가지 뒤로 다음 구간 가야 할 수리산도 가늠된다.
능선 내림길을 잠시 더 따르니, 선두들이 쉼을 하고 있다. 이곳은 손총무님의 관할권이라 그런지 쉬면서 지도를 꺼내지도 않는다.
조그만 봉우리를 우회하기도 하고,
어떤 봉우리는 넘기도 하며,
산불의 흔적을 간직한 소나무들 사이로 이어진 등로를 따르다 보면,
파장고개 방향 갈림길이 있는 헬기장에 도착한다.
헬기장 벤치에서 쉼을 하며 후미를 기다리다가, 후미가 도착하자 이내 지지대고개로 향한다.
등로는 소나무 그늘 사이로 호젓이 이어지다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범봉을 지나는데,
좌측 아래로 파장저수지가 내려다 보인다.
<파장골(芭長谷)> 원래 파장골은 광주군 일용면 파동(琶洞)이었으며, 흔히 파장골 또는 파장굴로 불렸다. 파장골은 파장동의 원래 터전인 일림동, 소토굴, 계명산 일대를 가리킨다. 원래는 '비파 파(琶)’ 자를 사용했으나, 나중에 '파초 파(芭)’ 자에 장(長)이 붙어서 파장동이 됐다. '비파 파(琶)’ 자에서 '파초 파(芭)’ 자로 바뀐 연유는, 조선시대 정조께서 살기 좋은 화성을 만들고자 수원으로 들어오는 길 입구에 만석거(萬石渠)를 만들고, 이 곳에 연꽃과 파초를 심었으므로 '파초 파(芭)’ 자를 사용했다 하며, ‘장(長)’ 자는 어른이 있다는 뜻에서 더하게 됐다고 한다. 한편 예전에는 파장골을 샛터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하는데, 산업도로 쪽에 있는 소토굴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펌)
조그만 봉우리를 넘으면, 본격적인 지지대고개를 향한 내림길이 시작된다.
앞쪽으로 영동고속도로 북수원TG가 내려다 보이고,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북수원 톨게이트 아래로 통하는 지하통로를 지나니,
프랑스군 참전비가 있는 효행공원이 나오며 1번 국도인 수인산업도로가 지나는 지지대고개에 도착한다.
<지지대(遲遲臺)고개> 경기도 수원시 파장동과 의왕시 왕곡동의 경계가 되는 고개로, 이 고개는 예전엔 사근현(沙斤峴)이라 불렀으며, 정조대왕이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할 때마다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이곳의 노송지대는 지지대비가 위치한 지지대고개 정상으로부터 (구)경수간 국도를 따라 도로변에 노송이 생장하는 5km 구간을 말한다. 조선 정조 임금이 부친인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더 이상 부친의 능을 볼 수 없게 되어, 이곳에 멈춰서서 뒤돌아보면서 느릿느릿 행차했다고 해서 '느릴 지(遲)' 자 두자를 붙여 지지대고개라고 불렀다 한다. 그런가 하면 '지지'라는 뜻은 보통 느리다는 뜻이 아니라 옛부터 부모를 생각해서 ‘지지’하다는 뜻으로 말하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륵당은 지지대고개에서 약 800m 떨어져 있는 화강암으로 된 석불입상으로, 속칭 미륵부처라 불리고 주민들의 신앙대상이 되고 있다. 돌아본 지하통로 쪽 날머리 전경.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參戰記念碑)>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 44-6번지 지지대 고개에 있는 기념비이다. 1974년 10월 3일, 국방부에서 건립한 것으로, 1950년 11월 29일 지상군 1개 대대와 함정 1척으로 한국 전쟁에 참여하여 싸우다가 전사한 프랑스군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기념비의 높이는 6.45m이며 둘레는 16m이다. 매년 11월 11일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서 참배행사를 거행한다.
의왕에서 땀을 닦고, 다시 지지대 고개에 있는 솔마당이라는 식당으로 돌아와, 산행의 피로를 풀어 본다. 산행이 쉬웠는지, 아침식사를 든든히 해서 그런지, 고기보다 이야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식사 후에도 이야기는 계속되고, 배려심 강한 손지점장은, 다음에 들어 올 손님들을 위해 장작불을 지핀다.
피로연을 파한 시간이 3시 반이고, 산본에서 2차를 파한 시간이 5시 반이니, 역시 산행을 좀 더 길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걸으며 시간을 보낼 것인지, 마시면서 시간을 보낼 것인지의 선택이다. 비 내린 겨울철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백두들의 산행은 영원하기를 기대한다.^^ |
첫댓글 네 이날은 봄날처럼따뜻했다고 기록되어 있네요. 콩나물 해장국으로 아침먹은 기억납니다. 시내구간이 많았다는 기억도 나구요, 6,25때 프랑스, 미군의 참전기념비가 인상적이였고 뒤풀이 오리고기와 백숙이 일품이였습니다. 많은 기억되살려주고 상식을 넓혀주신 이대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