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들의 맛 집 순례와 옛 증언
안창옥
최근 우리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다. K- 푸드라 이름 지어진 불고기, 김치 등의 우리 음식이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핵가족 시대를 맞아 각종 가공식품이 개발되어 환영받고 있는데 데워서 바로 먹을 수 있다. 라면과 같이 뜨거운 물을 붓거나 끓이면 바로 먹을 수 있어 간편하다. 맞벌이 부부인 작은 아들 내외는 밥을 따로 하지 않는다. 1회용 밥을 먹는데 바쁜 생활에 맞는 선택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은퇴하여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하루 세끼 집 밥을 먹는 소위 삼식이가 아니다. 직장 동료들과 회식하거나 구내식당을 이용할 기회는 없어도 자주 외식을 하는 편이다. 가끔씩 맛 집을 찾아다니고 때로는 사무실에서 중국 음식을 시켜 먹거나 텃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다 저녁은 아내와 같이 외식하는 행복한 노후를 즐기고 있다. 아직도 굶주리고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이 있는 현실에서 너무 호사하는 것 아닌가 자책도 할 때가 있다.
특별한 외식은 매달 다섯 돌들의 점심 순례 모임이 있다. 유명하고 맛난 음식점을 찾아 유유자적의 여유를 즐긴다. 점심시간 번잡을 피하기 위해 매월 첫 주 화요일 오후 1시에 모인다. 만나서 수다를 떠는 것은 여자들만의 특권이 아닐진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여유도 즐긴다. 점심을 먹고 그냥 헤어지기 아쉬어 커피숍을 찾는다. 서울까지 오가려면 거의 하루가 걸리지만 여행의 즐거움이라 생각하고 감수한다.
만나는 사람들은 50여 년간 한결같은 고등학교 동무들이다. 까까머리 고등학교 시절 문예 신문 반에서 교지와 학교 신문을 만들던 친구들이다. 우리는 이름대신 “~돌”로 호칭하는데, 돌과 같이 변하지 말자는 의미도 있다. 좀 장황하지만 여섯 돌들 이력을 소개한다.
한국외환은행에서 본부장으로 일한 큰 돌, 오뚜기 그룹에서 사장을 지낸 흰 돌, 상업은행에서 지점장을 지낸 청 돌, 삼성그룹에서 임원을 지내고 일본에 거주하는 삼 돌, 대학에서 퇴직하고 텃밭을 열심히 가꾸는 판 돌은 필자이다. 회장으로 여고에서 국어교사로 한 길만 걸어온 장 돌은 작년에 원주 출렁다리 등산 중 불의의 사고로 먼저 하늘나라에 갔다. 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나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돌들은 정말 당황스러움과 슬픔을 동시에 맛보게 되었고, 그의 빈자리가 아직도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동안 순례한 맛 집들은 한식, 중식, 양식을 망라하여 수 없이 많다. 그중에는 대통령이 다녀간 맛 집도 몇 군데 있다. 대통령이 앉았던 봉황 표지가 있는 자리에 앉아 잠시나마 대통령이 된 기분을 가져 보기도 했다. 청평의 초계국수집 등에서는 대기 번호표를 받아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다. 내가 호스트가 된 천안 병천 순대집 대기 줄에서 30분 이상이나 기다린 일도 있다. 서울광화문 시민회관 옆 복요리, 을지로 2가 중국집의 중국요리, 신당동의 얼큰한 떡볶이, 이른 봄 통영 쑥국 도다리 탕, 효자동 삼계탕, 오장동 냉면집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힘이 부친다.
중국과 미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여행을 즐기며 그 나라 특식을 맛보기도 했다. 중국 요리는 종류도 많지만 다양하고, 태국 해안가에서 한 없이 먹은 게 요리도 인상에 남는다. 미국은 땅 덩어리도 크지만 햄버거 양이 엄청나게 크고 많은 것도 문화 차이로 이해한다. 여행 중에 우리 음식이 그리워 마트에 들러보면, 우리의 라면, 과자, 소주 등을 볼 수 있어서 반가웠고 K-푸드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60여 년 전 특별한 먹거리를 회상해 본다. 지금 초등학교를 그 때는 국민 학교로 불렸던 시절, 학교에는 천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랜드마크인 오랜 역사가 있는 학교였다. 교실이 부족하여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공부하였고, 겨울에 난로를 피우기 위해 장작개비를 들고 등교하던 때였다.
가을 운동회 점심은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 찐 계란과 군밤은 별미였고, 손수레에서 둥글둥글 돌려지면서 커지는 솜사탕은 잊지 못할 추억의 음식이었다. 그 시절 꽈배기도 인기였고, 중국집 찐 빵은 특식이었다.
그 시절 특별한 체험을 증언해야 할 책무를 느낀다. 지금 75세 전후가 된 당시 학생들이 경험한 팩트로 젊은이들이나 어린이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 때는 제대로 못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많았다. 기계충이라는 머리가 빠진 어린이들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교단에서 커다란 주사기로 간유를 입안에 두어 방울씩 떨어뜨려 주셨다. 마치 어미 새가 먹이를 물고 와 입을 벌리고 받아먹는 아기 새의 모습과 흡사했다. 입으로 두어 방울씩 떨어진 간유의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맛을 잊지 못한다.
어디 그것뿐인가? 분유를 도시락에 배급받아 실컷 먹고 설사를 한 기억도 생생하다. 어릴 때 그런 아픈 경험을 가진 아련한 추억을 되새기며, 맛 집을 찾아 순례하는 현재를 생각해 보니 격세지감 隔世之感을 느낀다.
걸어 다닐 수 있는 건강이 있는 동안 맛 집 순례가 계속되기를 소원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들이 가난과 배고픔의 설움에서 벗어나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한다. 맛있는 식품 개발과 음식 문화선양에 기여하는 오뚜기식품 그룹의 무한한 발전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