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픽션]
달동네, 나무문 너머의 세상
어느 날 오후, 흙먼지 날리는 골목을 따라 허름한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면, 좁은 골목 안쪽으로 이어지는 낡은 판잣집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판잣집들 사이사이에는 사람들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만 열려 있는 좁은 길들이 얽히고설켜 있었고, 길 위엔 언제나 바람에 휘날리는 쓰레기와 낡은 신문지가 굴러다녔다. 그곳은 서울 변두리의 달동네. 제대로 된 전기나 상하수도조차 없어 불편하고도 팍팍한 생활이 이어지던 곳이었다.
주인공 명자는 그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좁은 골목을 뛰어다니며 놀았지만, 어릴 적부터 가난이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명자의 집은 낡은 철판으로 덧대어진 작은 판잣집이었다. 집 안에서는 언제나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배어 있었고, 창문 하나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전부였다. 부엌에서는 쌀을 아끼려 주린 배를 쥐며 밥을 짓는 어머니의 모습이 익숙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올라와 도시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다친 이후, 제대로 된 일거리를 구하지 못해 주점에서 술에 절어 살았다. 그는 술만 마시면 화를 내고, 한없이 울곤 했다. 가족들에겐 가난과 고통만을 남기고 있는 현실이 버거웠다. 명자의 어린 동생들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두려워하면서도, 또 동시에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변해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었다.
달동네에서는 모두가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근처 시장에서 힘겹게 장사를 하며 사는 사람들, 건설 현장에서 일당을 벌며 하루를 견디는 사람들, 온종일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고물이나 폐지를 주워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는 눈앞의 현실을 떠나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작은 희망이 있었다.
명자는 학교에 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비록 신발이 해지고, 교과서를 사는 것도 어려웠지만, 명자는 공부만이 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알았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들은 그녀에게 작은 창문을 열어주었다. 창문 너머의 세상은 마치 이 마을과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그곳에서는 가난이란 단어가 없어 보였고, 사람들은 걱정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듯했다.
명자의 친구 중 하나인 순이는 꿈을 일찍 접어야만 했다. 순이의 집은 명자의 집보다도 더 형편없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병으로 누워만 계셨다. 순이는 아침부터 밤까지 동네 가게에서 일을 해야 했고, 학교에는 거의 가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명자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같은 가난 속에서도 누군가는 희망을 놓고, 누군가는 그것을 붙잡고 살아가는 차이를 느꼈다.
어느 날 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명자의 집 천장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잠이 들었고, 어머니는 그를 깨우려다 포기한 듯 무기력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자는 어머니를 도와 바가지를 들고 집안 곳곳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 순간, 명자는 결심했다.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 결심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었다. 명자는 오랜 시간 버텨야 했고, 누군가에게 기대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고물상 할아버지에게서는 작은 일이라도 기꺼이 해야 한다는 자세를,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아주머니에게서는 무언가를 나누는 기쁨을 배웠다. 그 모든 것이 명자에게는 그곳을 떠나기 위한 힘이 되었다.
명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서울 도심의 작은 직장에 취직했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 그녀는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낡은 집 앞에 서서 어린 시절의 자신이 힘겹게 살았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곳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명자는 더 이상 그곳의 일원이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었고,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모를 일이었다.
나무문 너머의 세상. 그것은 가난과 절망을 넘어 새로운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 열려 있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