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웅이 급벌찬으로 6두품 신라 귀족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지에서 호족(豪族)이 봉기(蜂起)하면서 신라 조정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했다. 호족은 진골이나 6두품 등 귀족 출신이 대부분이었지만 고급관료나 고위직 군인도 있었다. 호족들은 당대등(堂大等), 대감(大監), 제감(弟監), 장군(將軍), 성주(城主) 등 제멋대로 자칭(自稱)하면서 신라 조정을 흉내 낸 통치조직을 편성하고 군대를 갖추는 등 작은 나라 왕처럼 행세했다.
『삼국사기』<진성왕 3년(889)>에는 “나라 안 여러 주군에서 공물과 세금을 보내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궁핍했다. 임금이 사람을 파견해 독촉하니, 각처에서 도적이 봉기했다.[1] <진성왕 10년(896)>에는 도적이 나라 서남쪽에서 봉기했는데 바지를 붉게 물들여 입어 스스로 남들과 차별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고적[2]이라고 불렀다. 주현을 도륙하고 서울 서부의 모량리(건천읍)까지 와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노략질하여 돌아갔다.”[3]
신라 조정이 징수할 세금을 호족이 가로채버림으로 인해 국고(國庫)가 텅 비게 되었는데, 임금이 세금을 독촉하니 호족들이 조정에 저항하여 싸움을 벌이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또 어떤 무리는 붉은색 바지로 유니폼(uniform)까지 맞추어 입고 신라 왕궁 턱밑까지 쳐들어와서 노략질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중 가장 강한 세력은 강원도의 양길(梁吉)과 전라도의 견훤(甄萱)이었다.
<진성왕 5년(891)>에는 “겨울 10월에 북원경(원주) 도적 두목 양길이 부하 궁예를 보내 기병 백여 명으로 북원경 동쪽 마을과 명주(강릉) 관할 주천(영월) 등 10여 군현을 습격했다.”[4] 또 <진성왕 6년(892)>에는 “완산주 도적 견훤이 주에 자리 잡고 후백제라고 스스로 일컬었다. 무진주 동남쪽 군현이 견훤에게 투항했다.”[5] 그리고 <효공왕 9년(905)>에는 “궁예가 변방 고을을 침탈하고, 죽령 동북지역까지 이르렀다. 임금이 국토가 날마다 줄어든다는 말을 듣고 매우 걱정했으나 방어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성주들에게 나가 싸우지 말고 성벽을 굳게 지키라 명령했다.”[6]
궁예(弓裔)는 양길의 부하이었는데 독립했고, 궁예 부하 왕건(王建)이 고려를,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해 후삼국 시대가 되었다. 후백제는 수도를 완산주에 두었기 때문에 완산최씨 상고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후백제 역사는 『삼국사기』<열전 견훤전>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으므로 중요 부분만 검토해보기로 하겠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문경 가은읍)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씨 이었는데 나중에 견씨가 되었다.”[7] ~중략~ “진성왕 6년(892) 왕의 총애를 받는 소인배들이 측근에서 정권을 농락하자 기강이 문란해졌다.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견훤은 은근히 반란의 뜻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현을 공격하니 가는 곳마다 호응해,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에 달했다. 무진주(광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왕이라 일컫지 못하고 직접 서명하기를 ‘신라 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라 했다. 이때 북원의 도적 양길이 강성하자 궁예가 스스로 투신하여 양길 휘하로 들어갔다. 견훤이 소식을 듣고 양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으로 삼았다.”[8]
견훤은 상주 가은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무장이 되었으며,
용맹함으로 촉망받았고, 서남 해안 여러 곳에서 공적을 쌓았는데 나라는 세웠으나 차마 왕이라고는 하지 못했으므로 말하자면 무진주에서 공국[9]을 세운 것이다.
“견훤이 서쪽을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완산주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견훤은 인심을 얻었다고 생각해 기뻐했다.”[10] ~중략~ “마침내 후백제 왕을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해 직책을 분담시켰다. 당나라 광화 3년, 신라 효공왕 4년(900) 일이다.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니 오월국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 견훤에게 검교태보 벼슬을 더해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했다.”[11]
완산주 호족은 스스로 왕이 되기를 마다하고 용맹한 장수로 이름난 견훤을 왕으로 삼아 후백제를 세우고 귀족이 되는 길을 택했다. 후삼국 시대는 전쟁으로 이어지는 난세(亂世)였는데, 호족을 많이 거느려야 이길 수 있었다. 왕건은 달래고 포섭하는 전략을 사용하고, 견훤은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후백제가 더 강성하여 바다 건너 오월국(吳越國)이나 거란국(契丹國)과 외교도 벌였고, 큰 전투에서 자주 이겨 넓은 지역을 차지했으나 결국 후백제는 망하고 고려가 통일했다.
후백제에서 활동한 완산최씨로 대표적 인물이 최승우(崔承祐)다. 최승우에 관해서는 별도로 검토하기로 하겠다. 그 외에도 후백제에서 활동한 완산최씨를 『삼국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열전 견훤전(927년)>에는 “거란 사신 사고와 마돌 등 35명이 와서 예방하니 견훤이 장군 최견을 보내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했는데,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당나라 등주(산동반도)에 이르렀는데 붙잡혀 모두 살육당했다.”[12] 최견의 혈통은 정보가 부족해 알 수 없다.
또 <열전 견훤전(934년)>에는 “웅진(공주) 이북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자진해 고려에 항복했다. 견훤 휘하 술사 종훈과 의원 훈겸 그리고 용장 상달과 최필 등이 (고려)태조에게 항복했다.”[13] 최필 역시 정보가 부족하여 혈통을 확인할 수 없다.
* 각주 ------------------
[1] 國內諸州郡不輸貢賦府庫虛竭國用窮乏王發使督促由是所在盜賊蜂起.
[2] 赤袴賊.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
[3] 賊起國西南赤其袴以自異人謂之赤袴賊屠害州縣至京西部牟梁里劫掠人家而去.
[4] 冬十月北原賊帥梁吉遣其佐弓裔領百餘騎襲北原東部落及溟州管內酒泉等十餘郡縣.
[5] 完山賊甄萱據州自稱後百濟武州東南郡縣降屬.
[6] 弓裔行兵侵奪我邊邑以至竹嶺東北王聞疆埸日削甚患然力不能禦命諸城主愼勿出戰堅壁固守.
[7] 甄萱尙州加恩縣人也本姓李後以甄爲氏.
[8] 眞聖王在位六年嬖竪在側竊弄政柄綱紀紊弛加之以饑饉百姓流移群盜蜂起於是萱竊有覦心嘯聚徒侶行擊京西南州縣所至響應旬月之間衆至五千人遂襲武珍州自王猶不敢公然稱王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是時北原賊梁吉雄强弓裔自投爲麾下萱聞之遙授梁吉職爲裨將.
[9] 公國. 왕이 아닌 제후가 다스리는 작은 나라. 서양에서는 공작(公爵)이라 한다.
[10] 萱西巡至完山州州民迎勞萱喜得人心.
[11] 遂自稱後百濟王設官分職是唐光化三年新羅孝恭王四年也遣使朝吳越吳越王報聘仍加檢校太保餘如故.
[12] 契丹使裟姑麻咄等三十五人來聘萱差將軍崔堅伴送麻咄等航海北行遇風至唐登州悉被戮死.
[13] 熊津以北三十餘城聞風自降萱麾下術士宗訓醫者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