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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 3
- 원수를 대적함 -
참(站: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신을 신고...믿음의 방패를 가지고...투구와 검...을 가지고...기도하고...깨어...구하라"(엡6:10-11, 13-18)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앉는 것으로 시작하여 행하는 것으로 인도되지만, 이 두 가지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서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은 반드시 전쟁 준비를 잘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는가를 알아야 하며 또한 이 땅에서 그분과 함께 어떻게 동역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대적에 대하여 어떻게 서는가도 알아야 한다. 에베소서의 셋째 단락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전쟁의 일이다(6:10-20). 이것이 바울이 말한 "우리와 악한 영들과의 씨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다시 한번 에베소서가 우리에게 설명한 이러한 일의 순서가 '앉고(坐)...행하고(行)...서는 것(站)것' 이라는 사실로 자신을 일깨우기 원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먼저 그리스도와 그분이 이루신 일 안에서 우리 안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분별되어 실제적으로 그분을 따르는 생활을 배우지 못하고서는 영적인 전쟁에 들어가는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에게 위에서 말한 것 중 어느 것 하나라도 결핍되어 있다면, 영적인 전쟁에 관한 모든 일이 그에게는 다 이론 일 뿐 그는 결코 그 실제를 알지 못한다. 사탄은 그를 무시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높여지심의 가치와 그분의 내주하심의 가치를 아는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는 사람"(6:10과 1:19, 3:16을 비교하라)이 될 수 있다. 이 두가지의 공과를 참으로 잘 배운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세 번째 원칙인 '서다(站)'에 내포된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영적 전쟁의 두 보좌
하나님께서는 큰 대적이 있다. 그의 권세 아래에는 무수한 귀신과 악한 천사가 있어서 사악한 방법으로 세상을 침략하고 또한 하나님을 그분 자신의 나라에서 배재시키려 한다. 이것이 에베소서 6장 12절의 의미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주위에서 발생한 일의 해석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를 반대하는 '혈기에 속한' 것, 즉 단지 대적하는 왕이나 주관자나 죄인이나 악한 사람이 만든 세상 조직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이러한 것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한" 싸움이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마귀의 궤사와 싸우는 것이다, 이 전쟁에는 두 보좌가 있다. 하나님은 땅에 대한 통치권을 얻기를 원하시며, 사탄은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탈취하려 한다. 부르심받은 교회는 사탄을 현재의 그의 영역에서 몰아내고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머리가 되시게 해야 한다. 이 일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전쟁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나는 먼저 일반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생활을 말한 후에 비교적 전일하게 주님이 우리에게 위임하신 일을 말하려 한다. 물론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법을 파괴함으로 생긴 어려움을 사탄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성도의 몸과 생각을 공격하는 악한 자에 대하여 우리는 반드시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물론 대적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공격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이러한 공격에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당신의 거점을 지키라
우리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늘의 위치에 있다는 것과 세상에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어떻게 행하는가도 배웠다. 그러나 우리는 이 대적, 곧 그분의 대적과 우리의 대적앞에서 어떻게 처신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서라!',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고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는 것이다. 11절의 '대적하고 서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당신의 거점을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명령 안에는 귀한 진리가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른 영역을 침범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현대의 용어인 전쟁이라는 말은 '전진'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군대가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정복하기 위해서는 전진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일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전진할것이 아니라 서야 한다. '서다'라는 말은 대적과 전쟁하는 거점을 포함하며, 그 거점은 사실 하나님의 것이므로 또한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발 디딜 곳을 얻기 위해 애써 싸울 필요가 없다.
전쟁의 무기
에베소서에 묘사된 전쟁의 무기는 거의 방어용이다. 검만이 공격용과 방어용으로 쓸 수 있다. 방어전과 공격전의 다른 점은 전자는 내가 거점을 얻고 단지 그것을 지키는 것이며, 후자는 아직 거점을 얻지 못해 전쟁으로 그것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주 예수께서 하시는 전쟁과 우리가 하는 전쟁의 다른 점이다. 그분이 하시는 전쟁은 공격하는 것이고, 우리가 하는 전쟁의 승리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분이 사탄과 하시는 전쟁은 승리를 얻기 위한 것이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분은 전쟁을 음부의 문까지 확대하셨고 사탄에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 내셨다(엡 4:8-9). 오늘날 우리가 사탄과 하는 전쟁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신 승리를 유지하고 견고히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이 흑암의 모든 영역에서 승리하신 것을 선포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거점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 전쟁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든 도전자를 대적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방법이 아닌 영역의 문제
우리의 일은 지키는 것이지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진의 문제가 아니라 영역 - 그리스도의 영역 - 의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은 이미 승리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승리를 우리에게 주어 지키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영역 안에서 대적의 실패는 엄연한 사실이며,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놓여졌고 대적은 패배 안에 남게 되었다. 사탄은 틀림없이 우리를 그 영역에서 쫓아내기 위해 반격하려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면에 있어서 애써 싸울 필요가 없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거점을 지키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승리자이며, 또한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롬 8:37).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선다. 오늘날 우리는 승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이미 승리한 것이다. 승리자는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승리 안에서 안식하는 사람이다.
이기려고 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하면 당신은 시작부터 패전인 것이다. 가령 사탄이 당신의 가정이나 사업에서 당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하자. 어려움이 가중되고 오해가 생겨 당신에게 대처할 방안도 피할 방법도 없게 된당면, 이러한 상황은 당신을 위협하여 당신을 압도하려 할 것이다. 당신은 여러 날 동안 기도하고 금식하며 대적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당신이 전쟁에서 이기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당신의 모든 거점을 대적에게 내주는 것이다. 당신에게 승리는 여전히 요원한 일이기 때문에 당신은 이룰 방법이 없다. 나 자신도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하나님은 나에게 데살로니가후서에서의그 불법자에 대한 말, 즉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2:8) 라는 말이 생각나게 하셨다. 그를 패배시키는 데 있어서 단지 주님의 입의 기운으로 족한데 나는 오히려 폭풍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나게 하셨다. 사탄은 단번에 영원히 패배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승리는 이미 얻은 것이다. 앉은 사람만이 설 수 있다. 서는 능력과 행하는 능력은 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앉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인의 행함과 전쟁의 힘의 원동력은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앉은 위치에 있다. 그가 만일 하나님의 면전에 앉지 않으면 대적 앞에 서기를 기대할 수 없다.
대적의 목적
대적의 주요한 목적은 우리로 범죄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완전한 승리의 위치 안으로 이끄신 주님을 떠나게 하여 이로 말미암아 쉽게 범죄케 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을 통하여 또한 우리의 지혜와 느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안식 안에 있는 우리를 공격하거나 그 영 안에서 행하는 우리를 공격한다. 그러나 그가 공격하는 각 항목을 위해 하나님은 방어용 전신 갑주를 제공하셨는데, 곧 투구와 흉배와 허리띠와 신발이며 그 이외에 그의 화전(火箭)을 멸하는 믿음의 방패가 그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높여지셨다고 말한다. 믿음은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믿음은 그분이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엡 1:20, 2:8, 3:12, 17 참조).
승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유지함
승리가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우리의 것이다. 부디 우리가 승리를 취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승리를 유지하는 것이기를 취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승리를 유지하는 것이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적이 완전히 궤멸하는 것을 볼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가 대적을 이길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해서도 안 되며, 심지어 그분이 승리하기를 앙망해서도 안 된다. 그보다 우리는 그분은 이미 그것을 이루셨고 또한 그분은 승리자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완전히 그분을 믿는 데 달려 있다. 우리가 만일 주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많은 기도가 필요치 않을 것이며 더 많이 그분을 찬미할 것이다. 그분 안에서의 우리의 믿음이 간단하고 분명하면 할 수록 이러한 상황 안에서 우리의 기도는 더 줄어들게 될 것이고 찬미는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
내가 다시 한 번 말하건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자이다. 그런데도 만일 우리가 승리를 얻기 위해 기도한다면 - 찬미가 가득한 기도가 아니라면 - 분명히 우리의 기본적인 위치를 잃으므로 실패할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은 실패를 체험한 적이 있는가? 당신은 어느날 강해져서 승리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나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의 독자를 위해 기도한 것과 같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다. 곧 하나님께서 새롭게 당신의 눈을 여심으로 당신 자신은 이미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이나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되신 그분과 함께 앉아 있음을(1:20-21) 보기 원한다는 것이다. 당신 주위의 어려움은 아마도 사라지지 않고 사자도 이전과 같이 큰 소리로 으르렁거릴지 모르지만, 당신은 더 이상 승리하기를 바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당신은 전쟁의 승리자이다.
그분의 이름 안에서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에베소서는 6장에서 말한 것은 우리 개인적인 전쟁의 방면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 즉 복음의 비밀을 말하는 것과도 관계된다. 이 비밀에 관하여 바울은 이미 많은 말을 하였다(3:1-3 참조).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이제 그분의 말씀의 검과 그것에 따르는 무기인 기도를 가지고 우리를 장비시킨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려 하심이니라"(6:17-20).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전쟁을 하는 면에 관하여 나는 조금 더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아마도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분명히 한 면에서 우리의 주 예수님은 이미 모든 정사와 권세를 초월하여 앉으셨으며, 또한 이미 그의 발아래 복종케(1:21, 22) 하셨다. 틀림없이 이 완전한 승리의 빛 가운데서 우리의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한다(5:20). 그러나 다른 한 면에서 우리는 아직 만유가 그분께 굴복되는 것을 보지 못했음을 시인해야만 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 곧 이 세상 주관자들의 배후에 있는 어두움과 악한 권세가 응당 그분께 속해야 할 그 영토를 점령하고 있다. 우리가 치루는 이 방어전은 정확히 어느 단계까지 이르러야 하는가? 우리는 잘못된 가정(價定)을 하기를 원치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외면적으로 대적에게 속한 영토를 점령하여 주 예수의 이름 안에서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대체 어느 상황까지 정당한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도움을 입기 원한다. 이 이름 안에서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에 관해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우선 아래 두 단락의 말씀을 보기로 하자.
"진실로 저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0).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요 16:23-24, 26).
그분의 이름의 권능
예수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도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 이름의 권능을 모르고도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받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사도 바울은 위의 성경 구절에서 말한 '이름'이 단지 그분이 사람 가운데서 행활하실 때 사람에게 알려진 이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지적한다. 물론 이것은 그분의 인격을 이름하는 것이지만 이 이름은 그분이 죽기까지 복종하신 후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주신 칭호와 권위를 포함한다(빌 2:6-10). 이것은 그분이 고난받은 결과이며, 이 이름은 그분이 높여지시고 영광을 얻으신 이름으로써 오늘날 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안에서 모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바울이 말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위에 인용된 둘째 단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요16:24, 26).
제자들에게 말한 '그날'과 22절의 '지금'은 매우 다른 것이다. 그들(제자들)이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날에는 얻게 되는데, 그들은 얻은 후에 그것을 사용할 것이다. 그것이 곧 그분의 이름이 가진 권위인 것이다.
우리의 눈이 반드시 열려서 주님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큰 변화를 보아야 한다. 예수의 이름은 보좌에 앉은 그분이나 나사렛의 목수나 분명히 같은 것이지만, 이 이름이 포함한 것은 같은 것만은 아니다. 이 이름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주신 능력과 통치권을 대표하는데, 이 능력과 통치권은 하늘에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의 모든 무릎을 꿇게 한다. 심지어 유대의 지도자들과 이 이름 안에 이 같이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제자들에게 절름발이를 고친 일에 관하여 물을 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고 했다. 오늘날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권세를 그분의 아들에게 위임하셨으므로 이 이름 안에 능력이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성경 안에 '이 이름 안에서'라는 말이 사용되었음에 반드시 유의해야 하며, 또한 사도들이 이 이름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사용했는지에 유의해야 한다. 그분이 이 같은 이름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우리도 이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주 예수께서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가운데 세 번을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이 "내 이름 안에서 구하라"(요 14:13, 14, 15:16, 16:23-26 원문 참조)이다. 그분은 이미 이 권위를 우리 손에 주어 사용케 하셨다. 이 이름은 그분의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행 4:12).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이 이름의 분깃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큰 손실을 입을 것이다.
그분의 이름의 효과
그분의 이름의 능력은 세 방면에서 역사한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이 이름은 사람을 구원시키는 효능이 있어( 행 4:10-12)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며, 또한 사람을 정결케 하고 의롭게 하고 거룩게 한다(눅 24:47, 행 10:43, 고전 6:11). 우리의 전쟁에서 이 이름은 사탄의 권세를 대적하고 묶고 굴복시킬 수 있는 큰 능력이 있다(막 16:17, 눅 10:17-19, 행 16:18). 또한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우리의 간구 가운데 이 이름은 하나님께 대해 효과가 있는데, 왜냐하면 성경은 두 번이나 "너희가 만일 무엇을 구하든지"라고 말하며 또 두 번이나 "너희가 만일 무엇을 구하면"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요 14:13, 14, 15:16, 16:23). 이러한 도전적인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참으로 경건하게, "주여, 당신은 얼마나 담대하신지요!"라고 찬미하며 감탄의 말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자신을 그분의 종들에게 위탁 하신 것은 틀림없이 중대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의 세 가지 일로 이 일을 좀더 상세히 설명하겠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하고"(36원문참조).
"바울이...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내게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16:18).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니 하더라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19:13, 15).
먼저 베드로가 성전 문 앞에서 그 앉은뱅이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보기로 하자. 그는 먼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묻지 않았다. 그는 즉시 "일어나 걸으라"고 말했다. 그는 마치 자기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주님의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 이름은 결코 멀리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한 것도 이와 같다. 그는 영안에서 사탄의 활동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을 느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기 때문에 그가 기도를 멈추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했기 때문에 이 이름의 보관인이 되어 능력이 마치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처럼 즉시 행동을 취했다. 그가 명령하자 그 귀신은 '즉시' 도망쳤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사람에게 '위탁'하신 예이다. 하나님은 이미 자신을 그분의 종들에게 위탁하시고, 그들이 '이 이름 안에서' 행동을 할 때 하나님도 그들을 통하여 행동하신다. 그분의 종들은 무엇을 하는가? 매우 분명한 것은, 그들은 자신을 의지해 무엇을 하지 않고 단지 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지 않고 단지 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우 분명한 것은 다른 이름으로는, 그것이 그들 자신의 이름이든 혹은 다른 사도의 이름이든 관계없이 같은 효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주 예수의 이름의 능력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며, 그들은 권한을 부여받아 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광 안에 있는 그분의 아들을 중시하시지 땅에 있는 우리를 중시하시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와 그분이 함께 앉은 것을 보셨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과 권위를 여기에서 우리에게위탁하실 수 있다. 내가 간단한 예를 들어서 이 일을 설명하겠다. 얼마 전에 나의 동역자가 어떤 사람 편에 한 통의 편지를 내게 보내 왔는데, 그 편지에는 그 사람 편으로 돈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읽고 나서 그가 필요로 하는 돈을 보내 주었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친구의 서명이 있었기에 나에게는 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이 이름과 나이와 직업과 본적을 물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친구의 이름으로 왔기 때문에 나는 그 이름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람에게 위탁하심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분의 교회에 위탁하신 것은 큰 일이다. 그분은 이같이 하시기 위해 가장 큰 능력을 그분의 많은 종들에게 주셨다. 이 능력이 포함한 것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는(엡 1:21) 그분의 통치권이다. 오늘날 예수는 하늘 위에 오르셨으며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에게 말하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그분의 모든 기적의 역사는 다 그분의 종들이 그분의 이름 안에서 행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역사(役事)는 그분의 역사이다. 예수의 이름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큰 유산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같이 자신을 위탁한 것이 실효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분 자신이 이 이름 안에서 이루어 진 일을 책임지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그분 자신을 사람에게 위탁하기를 원하시는데 이는 그분이 다른 방법으로는 그분의 일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만일 자신을 위탁하시지 않은 일이 있다면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 불리기에 합당치 않다. 그분의 이름을 사용할 권리를 받아야만 그분의 일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일어나서 그분의 이름으로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일에는 영적인 영향력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건데 이것은 중요한 고비에서 '이루어 내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영적인 위치를 인식하고 유지한 결과인 것이다. 이 일이 반드시 필요할 때 즉시 효과를 보려면 평소에 이미 이것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여기서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라는 말씀을 인해 주님을 찬미하자! 악한 권세가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했다. 복음서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일의 많은 증거를 보여 준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한 사람이 있는데 음부도 그를 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그분 자신을 당신에게 위탁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다시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어떤 일이 나의 이름 안에서 행해졌다는 말의 뜻은 어떤 조건하에서 나의 이름을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도록 한 것으로, 그가 내 이름으로 행한 모든 일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질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수표와 나와 도장을 그 사람에게 준 것과 같다. 물론 내가 가난한 사람이고 어떤 신분과 지위도 없으며 은행에 저축해 놓은 돈도 없다면, 나의 이름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학생 때에 나의 도장을 여기 저기에 찍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책이나 노트에 뿐 아니라 주위의 어떤 물건에도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으로 수표와 은행에 저축한 것 - 우체국에 십사원이 있었음 - 을 갖게 되면서부터 나의 도장을 사용하는 데 매우 신중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위조해 사용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나의 이름이 나에게 중요하게 느껴졌다.
우리의 주 예수께서는 얼마나 능력 있고 부유하신지! 그분의 이름이 그분께 얼마나 귀한지! 그러므로 그분이 만일 그분의 이름 안에서 생기는 모든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시려면 그분은 그 이름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얼마나 신중하셔야 했겠는가! 내가 다시 묻겠는데,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 - 그분의 '은행 저축금', 그분의 '수표', 그분의 '도장' - 을 당신에게 위탁하실 수 있겠는가? 이 문제가 반드시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 후에라야 당신이 자유롭게 그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그래야만 "너희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그분이 당신에게 위탁하신 실제로 인해 당신은 그분의 실질적인 대표로서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분과 연합한 결과이다.
우리는 주님과 이렇게 연합하여 그분이 자신을 기꺼이 우리에게 위탁하시게 하는가? 우리는 항상 큰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약속의 지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지하시는가 - 지지 하실 수 있는가 - 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위탁하심의 특징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한 계시를 받는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위탁할 수 있는 일에는 네가지 기본적인 특징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서술하겠다. 첫째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우리 마음에 참으로 계시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일 내게 내게 어떤 건물을 건축할 일이 맡겨졌다면, 비록 내가 비전문가라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여기에 세우려는 것이 차고(車庫)인지 격납고(格納庫)인지 아니면 궁전인지를 알아야 한다.
나는 반드시 계획이 어떤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지혜로운 일꾼이 될 수가 없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복음 전파는 결코 복음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전체 계획과 연관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복음 전파는 사실상 목적에 이르는 방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이 머리가 되시게 하시는 것이다.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 이 그 가운데 머리가 되시게 하는 것이다.
바울 시대에 각각의 믿는 이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다 특별한 관계가 있다(특별히 엡 4:11-16을 보라). 하나님의 관심은 그분이 오시게 될 왕국에 쏠리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 기독교는 머지않아 다른 사물 -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통치-에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솔로몬 왕국과 같이 오늘날 먼저 다윗의 통치로 대표된 영적 전쟁의 시기가 있다. 하나님은 오늘날 이 예비된 전쟁 가운데서 그분과 함께할 사람을 찾고 계신다.
이것은 나의 목적과 하나님의 목적이 연합하는 문제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연합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일은 다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결국 어떤 것에도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마음의 그분의 예정하신 뜻(엡 1:9-12)을 계시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가 하려는 이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가를 자문해야 한다. 이것이 분명해지면 모든 일상적인 작은 문제는 다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을 계획하시게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있게 될 어떤 효과적인 일도 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일을 계획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축복해 주시기를 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이 일에 위탁하시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결코 '고무 도장'과 같이 우리가 계획한 일에 권한을 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에도 축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일 뿐 풍성하지는 않다. 그러한 일은 '그분의 이름 안에' 있을 수 없고, 단지 우리의 이름만 있을 뿐이다. 아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 사도행전 안에서 우리는 성령의 금지하심을 자주 본다! 16장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바울과 그와 함께한 사람이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제차 금지시키는 것 -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신지라"(6-7절) - 을 본다. 그러나 이 책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실제적으로 일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지 않은 공과, 즉 그분을 위해 중요함을 유지하는 공과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움직이지 아니하시면 우리도 움직이지 않는 공과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배운다면, 그분은 안심하고 우리를 보내어 그분을 위해 말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맡겨진 그 일의 범위 안에서 나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일은 오직 이러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참된 일의 변치 않는 원칙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뢰한다.
셋째로, 모든 일은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반드시 끊임없이 단순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의뢰해야 한다. 능력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항상 이 단어를 마음대로 사용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데 아주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그가 어떤 능력을 사용하는가를 자문해야 한다. 그것은 영적인 능력인가, 아니면 천연적인 능력인가?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천연적인 능력이 너무 많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설령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여 이루려 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분 자신을 그 가운데 위탁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만 한다.
당신은 나에게 내가 말하는 천연적인 능력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천성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청해 어떠한 일 -복음 운동이나 어떤 그리스도인 활동 - 을 책임지도록 한다. 그러나 만일 이와 같다면 그가 그 일을 위해 얼마나 기도를 하겠는가? 그가 만일 그의 천연적인 은사를 의지하는 데 습관이 되었다면, 아마도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많은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천연적으로 은사가 있다 할지라도 자신이 끊임없이 그분을 의지한다는 느낌이 없다면 우리는 감히 무어라 말할 수 없다.
스데반은 모세를 묘사할 때 애굽의 학술을 다 배웠기에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행 7:22)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신 이후에 모세는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츨 4:10)라고 말해야 했다. 어떤 천재적인 연설가가 "나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단계에 이른다면, 그는 기본적인 공과를 배웠고 참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는 길에 있는 것이다. 이런 발견은 거쳐야 할 중요한 관문일 뿐 아니라 일생 동안 거쳐야 하는 것인데, 두 가지가 다 누가 말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하는 것인데, 두 가지가 다 누가가 말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행 8:16, 19:5)라는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말씀은 모든 초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그의 천연적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있어야 함을 지적해 준다. 우리와 하나님의 역사(歷史)가운데 우리는 어찌하든 반드시 그분의 손이 우리를 만지심으로 우리의 천연적인 힘이 약화되어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 생명의 입장에 서서, 죽음이 다시는 어떤 권세도 없는 데 이르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이후에 이 범위가 계속 확대되면 우리 자신의 능력은 더 많이 십자가의 역사 아래로 이끌리게 된다. 이 길은 비록 대가가 크게 요구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열매가 주렁주렁한 생명과 사역으로 이끄시는 확실한 길이다. 왜냐하면 오직 이와 같아야만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입장을 얻고, 우리가 그분의 아들의 이름 안에서 행한 일의 뒷받침이 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일 안에서 일이 항상 조직되어 있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도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일에 대한 주님의 판결은 과연 타협하지 않는 것이며,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 15:5)고 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행하는 이런 종류의 일은 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서 불의 시험이 그것들을 증명해 낼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는데, 이 능력은 유일하게 주 예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다. 그분 안에서, 십자가의 부활의 방면에서 이 능력은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나는 말을 할 수 없다"고 외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심을 발견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일이 끝나야 그분의 일이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장래의 불과 오늘날의 십자가는 같은 일을 이룰 것이다. 오늘날 십자가를 거치지 못하는 것은 나중에 불도 통과할 수 없다. 내가 나의 능력을 사용해 한 일이 사지(死地)에 이끌려질 경우 그것들 중 과연 무덤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아무것도 무덤에서 나올 수 없다!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면 십자가를 거친후에 남을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우리에게 하도록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생활을 하게 하시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은혜로 우리가 이런 생활을 하고 이런 일을 한다. 우리가 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생활이며, 우리가 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말미암아, 우리가 순종하는 성령에 의하여 이루신 일이다. 자아는 이 생활과 이 일에 유일한 장애물이다. 우리 각 사람이 마음에서부터 "주여, 나를 처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기를 원한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위탁하여 하시는 모든 일의 목적과 목표는 반드시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 가운데서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일에서 개인이 얻는 만족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일은 하나님께 진실한 가치가 더 커지는데, 이것은 신성한 원칙이다. 하나님의 일에서 사람의 영광은 지위가 없다. 사실 그분께 기쁨을 가져다주고 또한 그분의 사역의 문을 여는 봉사는 다 깊고도 귀한 기쁨이 있으나, 그 기쁨의 근거는 그분의 영광이지 사람의 영광이 아니다. 모든 것은 다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한 것이다(엡 1:6, 12, 14).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참으로 해결된다면,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위탁하실 것이다. 나는 그분이 우리가 그분께 이같이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을 허락하시리라 믿는다. 우리가 중국에서 체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만일 우리의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이 일과 관련된 기도를 허락지 않으신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만일 일이 완전히 그분으로부터 나온 것이면 그분은 기묘하고도 자기 자신을 위탁하신다. 나중에 그분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 안에서 당신은 그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음부도 당신이 이와 같이 행하는 권위를 인정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임한 일에 있어서 그분의 능력을 사용하사 그 일 가운데 계신 그분을 증명해 내시며 또한 이 일의 창시자가 되신다.
엘리야의 하나님
결론적으로 나의 체험을 말하겠다. 우리의 사역이 시작된 지 수년 이후에 우리는 엄중한 시련이 시기를 맞았다. 그것은 실망스럽고 거의 절망적인 날이었다. 우리가 취한 입장 때문에 우리는 많은 비평과 오해를 받았으며, 심지어 주님의 참된 백성까지도 우리에 대해 냉담했고 우리를 멀리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죄상을 열거하며 고소하는 것을 성실하게 대하며 관찰하고 연구했다. 왜냐하면 비평에 대해 우리는 "아, 그는 나를 비평하는 것이 일이야!"라고만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고, 항상 엄숙하게 받아들이고 관찰하며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특별히 이 어려운 일 년의 마지막 무렵에 그동안 그분이 우리에게 참으로 회개하여 구원받은 몇 백 명의 사람을 주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다. 나중에 연말에 이르러서는 최고봉에 달한 것 같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매년 설날 연휴 때 각 성(省) 각처의 믿는 이를 위해 도시에서 대집회를 여는 것이 우리의 관례였다. 그런데 이 집회를 주최하는 사람은 나에게 참석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는 나에게 타격이었다. 나는 이것이 악한 자가 나와 나의 형제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식의 입장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였음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다.
설날 연휴는 십오 일간 계속되는데, 대집회 때 이외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간이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구한 후에 그분께서는 우리가 이 기간을 이용해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다섯명의 형제들과 함께 중국 남해의 한 섬에 가서 십오 일 동안 복음을 전하기로 계획을 했다. 마지막 순간에 한 청년 형제(오 형제)가 이 여행에 동참했다. 그는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일찍이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가 최근에 복학되어 생활에 큰 변화가 있었다. 그는 함께 가기를 매우 갈망했고 나는 망설이다가 그를 데리고 가는 것에 동의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모두 일곱 명이 되었다.
그 섬은 상당히 큰 곳이었고 중심이 되는 큰 마을에는 60여 가구가 있었다. 나의 오래된 동창이 이 마을에서 교장으로 있었으므로 나는 먼저 그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가 정월 초부터 십오 일간 머무를 수 있는 방을 안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했을 때 날이 이미 저물었고 그(교장)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것을 알고는 숙소 제공을 거절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을을 다 돌아다니며 유숙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한 약재 상점의 주인이 동정하여 그들의 누각에서 묵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우리는 그곳에 판자와 짚을 깔고서 상당히 편안한 잠을 잤다.
오래지 않아 이 약재 상점의 주인이 첫 번째로 회개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조리 있고 정연하게 열심히 일했으며, 또한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매우 예의 바른 사람들로 봐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섬에서 얻은 열매는 매우 적었는데, 우리는 이것이 왜 그런지 이상히 여기기 시작했다.
정월 9일에 우리는 공개적인 복음 전파를 했다. 그때 오(吳) 형제는 다른 몇 형제와 함께 마을 안의 어떤 곳에서 갑자기 공개적으로 "여러분 가운데에는 왜 믿으려는 사람이 없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즉시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신(神), 즉 대왕(大王)이 있습니다. 그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습니다. 그는 영험한 신입니다" 라고 말했다. 오 형제가 "여러분이 그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자, 그는 "우리는 280년 동안 매년 정월에 한 날을 택해 명절 행진을 해 왔습니다. 먼저 복괘(卜卦)를 통해 날짜를 선정하는데 매년 어김 없이 그 (대왕)의 날에는 날씨가 좋아 비도 오지 않았고 구름 한 점도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오 형제가 "올해는 언제 명절 행진을 합니까?" 라고 묻자, 그는 "정월 11일 오전 8시로 정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오 형제는 성급하게 "제가 여러분에게 장담하겠는데 오는 11일에는 틀림없이 비가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사람들은 즉시 고함을 지르며 "그만두시오! 더 이상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소. 만일 11일에 비가 온다면 당신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오!라고 했다.
이 일에 일어났을 때 나는 그 마을의 다른 것에 있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곧 이 일이 매우 엄숙한 것임을 알았다. 이 소식은 불이 번지듯 순식간에 이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즉시 전도를 중단하고 전심으로 기도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넘었다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을 구했다. 우리는 매우 절박했다. 우리가 행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심각한 실수를 범했든가 아니면 감히 하나님께 기적을 구한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께 기도의 응답을 얻으려 하면 할수록 당신은 그분과 더욱 분명해지기를 갈망하게 된다. 교통에는 반드시 의문도 없고 그림자도 없어야 한다. 만일 당신의 믿음이 충분하다면 당신은 그분과 쟁론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충분치 않다면 그럴 수 없다. 우리가 만일 잘못을 범했다면 쫓겨난다 해도 개의치 말아야 한다. 결국 당신은 하나님을 그분의 뜻에 어긋난 일 안으로 끌어들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간증이 이 섬에서 끝난다면, 그것은 대왕이 영원히 통치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제 떠나야 하는가?
이렇게 되자 우리는 비를 내려 달라는 기도를 하기가 두려웠다. 그런데 어떤 말씀이 번개처럼 내게 임했는데 그것은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에 계시니이까?"(왕하 2:14)였다. 이 말씀은 매우 분명하고 힘이 있어서 나는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믿었다. 나는 믿음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나는 응답을 얻었습니다. 11일에는 비가 올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우리는 그분께 감사하고 나서 찬미를 발하며 함께 나가서 각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 안에서 마귀의 도전을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마귀의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사람에게 알려야 했다.
그날 저녁에 그 약재 상점 주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솔직한 말을 해 주었다. "의심할 바 없이 대왕은 영험한 신입니다. 마귀와 그 우상은 함께 합니다 그들은 그(대왕)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여러분도 비교적 이성적인 해석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어부입니다. 그들은 이삼 개월 동안을 바다에서 보냈으며, 15일에는 또 바다로 나가야 합니다. 그들 모두는 오랜 경험을 통해 이삼 일 전에 비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이 말은 우리를 방해했다. 우리는 저녁에 다시 모여 비가 오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주님은 우리를 엄히 책망하시며 "엘리야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하셨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자신을 의지해 출구를 찾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 안에서 안식해야 하는가" 엘리사가 그러한 말을 했을 때 그는 무엇을 했는가? 그는 영광 안에 있는 자신의 주인 엘리야가 일찍이 행한 기적을 체험 가운데서 행했던 것이다. 신약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신 역사의 입장 위에 선 것이다.
우리는 다시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우리는 "주여, 우리는 11일 아침까지는 비가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가서 잠을 잤고, 다음날(10일) 아침 인근의 섬에 가서 하루 동안 전도를 했다. 주님의 은혜가 많아서 그날 세 가정의 사람이 그분께 돌이켜 공개적으로 그분을 시인하고 그들의 우상을 태워 버렸다. 우리는 매우 늦게 돌아와 몹시 피곤했지만 매우 기뻤다. 우리는 다음날 늦게까지 편히 잘 수 있었다.
다음날 누각의 유일한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나를 비춰 깨웠다. 나는 "비가 안오네!"라고 말했다. 시간은 이미 7시가 지났다. 나는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주여, 비가 오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그 말씀이 다시 내 귀에 들려왔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나는 하나님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조용하게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우리는 앉아서 아침을 먹었는데(우리를 접대하는 사람을 포함하여 여덟 명이었음) 모두가 매우 조용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으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었다. 우리는 식탁 앞에서 머리를 숙여 주님께 간구했다.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비를 내리셔야 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구합니다." 우리는 조용히 기도했고 이번에도 주님의 응답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책망의 뜻이 전혀 없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우리가 아멘도 하기 전에 우리는 기왓장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가 밥 한 그릇을 먹고 두 그릇째 밥을 먹는 데 비가 제법 내렸다. 나는 "우리 다시 한번 주님께 감사를 드립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밥을 두 그릇째 먹기 시작할 때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우리가 밥을 다 먹었을 때 거리에는 물이 이미 많이 불어서 방문 앞에 있는 세 번째 계단도 잠겨 버렸다.
얼마 안되어서 우리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들었다. 비가 막 올 때 비교적 청년 한 무리가 공개적으로 "하나님이 계시구나. 대왕은 더 이상 없다! 그는 비에 묶여 못 나온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왕은 묶이지 않았다. 그들은 가마로 대왕을 들어올리며 대왕이 틀림없이 비를 멈추게 한다고 했다. 그러나 비는 계속해서 억수같이 쏟아져 십미터도 못 가서 가마를 든 세 사람이 넘어졌다. 가마가 넘어지자 대왕도 따라서 넘어져 머리가 엉클어졌고 왼쪽 손과 팔이 부러졌다. 큰비는 여전히 아주 견고하게 급히 대왕을 수리하여 가마에 두고는 비틀거리면서 바닥에 끌다시피 하여 마을을 반쯤 돌았다. 큰 비는 여전히 그들을 덮었다. 그 마을에 사는 60세에서 80세 된 노인들은 대왕이 좋은 날씨를 줄 것이라고 믿고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나왔다가 아주 심하게 넘어졌다. 행진은 그렇게 마쳐졌고 우상은 집으로 들여졌다. 그들은 다시 복괘(卜卦)를 치고는 "오늘 날짜는 잘못되었다. 14일 저녁 6시에 행진을 합시다" 하고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이 소식을 듣고 마음속에서 '14일에도 하나님이 비를 내리실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었다. 우리는 "주여, 14일 오후 여섯 시에 비를 내려주시고, 그 이전 나흘 간은 우리에게 맑은 날씨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날 오후에 날이 개었고 사람들은 복음을 잘 들었다. 사흘이란 그 짧은 기간에 그 마을에서 우리에게 30여명의 진실로 회개하여 구원받은 사람을 주셨다. 14일이 되어서도 날씨는 여전히 맑아서 좋은 집회를 가질 수 있었다. 저녁이 가까워졌을 때 우리는 다시 정해진 시간에 모여 조용하게 이 일을 주님 앞으로 가져가 그분이 기억하시기를 구했다. 그분의 응답은 조금도 늦지 않았다. 폭우가 전과 같이 쏟아졌다.
다음날 우리가 떠나야 할 때가 이르렀다. 우리는 그 섬을 떠난 후로 다시 가보지 못했다. 다른 사역자들은 그 섬을 원했지만 우리는 한 번도 그곳이 누구의 것인가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 대해 말하자면 중요한 것은 사탄이 그 우상 안에서 소멸되는 것인데 그것은 영원한 일이다. 대왕은 더 이상 '영험한 신'이 아니다.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뒤이어 일어날 수 있지만 이 중대하고 변치 않는 사실과 비교해 볼 때 그것은 부차적인 일이다.
우리 모두의 인상은 오래 지속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위탁하셨다. 우리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의 권위를 시험해 보았는데, 이 이름은 하늘과 땅과 음부에서도 능력이 있다. 그 짧은 기간에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중심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에게 더 이상 모호하거나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체험을 서술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함께 그분의 뜻의 비밀(엡1:9, 3:10)을 힐끗 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전진해야 한다. 수년 후에 나는 오(吳) 형제를 만났다. 우리는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가 여전히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니 형제님, 당신의 의도는 내가 이 모든 것을 체험하고서도 그분을 버릴 수 있느냐는 말씀이지요?"라고 말했다. 당신은 '서다(站)'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보았는가? 우리는 입장을 얻으려고 하는 거이 아니라 다만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입장 위에 서는 것이며, 그곳에서 움직이기를 단호히 거절하는 것 뿐이다. 우리의 눈이 참으로 열려져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주이심을 본다면, 우리의 찬미는 자연스럽고도 끊임없이 흘러나올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입을 열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미하며 범사에 그분의 이름 안에서 항상 감사할 것이다(5:19-20). 마지못해 하는 찬미는 힘이 들고 화음이 잘 맞지 않지만, 그분 안에서 안식함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찬미는 항상 순결하고 달콤함 음조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리스도와 함께 앉고(坐), 그분을 따라 행하며(行), 그분 안에서 서는(站) 것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주 예수께서 이루신 역사 안으로 안식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안식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속적이고 견고하게 행하도록 하는 힘의 원천인 것이다. 모든 어두움의 새력과의 격렬한 전쟁의 막바지에서 우리는 결국 승리의 대열에서 그분과 함께 설 것이다.
"영광이 세세토록 그분께 있기를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