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박해를 세계 선교의 기회로 삼다
- 엘 그레코 작 ‘성령 강림’.
초세기에 설립된 그리스도교는 이론적인 면에서 이후 유다인 철학자 필론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았지만, 설립 직후에는 실천적인 면에서 유다교와 결별하기 위해 유다교의 색채를 지워야만 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발생지는 유다 지방 예루살렘이었으며 예루살렘 도성에 있던 첫 영세자들도 유다인이었기 때문에 초대 교회 안에서 유다교의 색채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초세기 중반에 이미 사도들은 소아시아 지역뿐 아니라, 그리스를 넘어서 로마 제국의 수도까지 달려가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따라서 그리스계 유다인 출신뿐만 아니라, 유다교를 접해보지 못한 순수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에게 유다교의 색채를 강요할 수 없었습니다.
첫 신자들의 영성 생활
예수님께서 보호자를 보내기로 약속하신 대로(요한 14,16.26; 16,7 참조),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사도들은 성령 강림을 체험했습니다. 성령 체험 직후에 사도 베드로와 열한 사도들은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날만도 새 영세자가 3000명가량 증가하면서 정식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출범했습니다(사도 2장 참조).
초대 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고,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사도 2,42-47; 4,32-35 참조).
이렇게 예루살렘 모(母)교회 신자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성체성사에 참여하며 이웃과 모든 것을 나누고, 날마다 성전에서 기도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영성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실천하는 신자들을 바라보던 주변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호감을 갖고 존경하게 되면서 점점 신자들의 무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사도 2,47; 5,13-14 참조). 심지어 그들의 삶을 가까이서 목격한 이방인들은 신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사도 11,26 참조).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또 다른 유다교인들은 유다인 출신 사도들이 여전히 율법에 따라 정한 시간에 성전에 올라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사도 3,1; 5,21 참조), 그들을 유다교의 새로운 종파인 ‘나자렛파’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중에서 같은 유다인이라도 히브리계 유다인 못지않게 그리스계 유다인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그들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생겼습니다(사도 6,1 참조).
히브리계 그리스도인의 유다교화
그리스도교 출현 이후 몇 년 되지 않아 유다 지방에서 유다교의 영향력은 강화되었습니다. 36년에 시리아에 새로 부임한 로마 총독은 유다 지방의 빌라도 총독을 마음대로 파면하고 자신의 부하를 그 자리에 앉혔으며, 가야파를 대사제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요나단을 대사제로 임명했습니다. 따라서 대사제는 빌라도 총독의 승인이 필요했던 예수님의 사형과 달리 그리스계 유다인 출신 그리스도인을 돌보던 스테파노 부제를 총독의 승인 없이 바로 처형했습니다(사도 7,57-58 참조). 이후 예루살렘에는 히브리계 그리스도인만 머물렀고, 그리스계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했습니다(사도 8,1 참조).
한편 41년에 팔레스티나에서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헤로데 왕국을 다시 세운 아그리파 1세 왕은 유다인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책을 펼치면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습니다. 결국 야고보 사도는 칼에 맞아 죽고, 베드로 사도는 감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탈옥하여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사도 12,1-17 참조). 이후 히브리계 유다인 출신 그리스도인을 돌보던 장로 야고보가 예루살렘 모교회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장로 야고보는 유다교의 영향력을 의식하고 그리스도교를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들며 나지르인이나 사제처럼 행동했습니다.
잠시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회복되나 싶었지만 다시 팔레스티나 전역에서 유다교의 영향력이 막강해졌습니다. 이에 히브리계 그리스도인은 점점 유다교의 길을 걸으면서 이방 지역에서조차 그리스계 그리스도인과 대립하는 상황이 나타났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49년에 베드로 사도와 장로 야고보를 비롯한 여러 원로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첫 사도회의를 열었습니다. 결국 그리스계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따르지 않아도 좋으나, 히브리계 그리스도인 앞에서는 율법을 존중하여 그들을 자극하지 않기로 결론지었습니다(사도 15,1-21 참조).
사도회의 이후에도, 한층 심화된 히브리계 그리스도인의 유다교화는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맹위를 떨쳤습니다. 54년에 베드로 사도 일행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이방인들과 친교를 나누다가 장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눈치를 보는 일이 생겼습니다(갈라 2,12 참조). 58년에 장로 야고보는 예루살렘 모교회 안에 유다교 관습에 익숙한 그리스도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제3차 전도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을 방문한 바오로 사도에게 정결 예식을 치를 것을 권고했습니다(사도 21,17-26 참조).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계 그리스도인의 노력에도, 62년에 장로 야고보는 젊은 열혈 유다교인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로써 히브리계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조차 예루살렘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하고 66~70년 사이에 요르단 강 중류 지방으로 이주했습니다. 결국 유다교의 관습과 융합된 영성 생활을 실천하려던 히브리계 그리스도인의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히브리계 유다인 출신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영적 여정으로서의 선교 활동
유다교인이나 유다교화하려던 히브리계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를 억압했던 일은 결코 나쁜 결과만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억압을 피해 흩어졌던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정착지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선포하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로마 제국의 수도까지 복음을 전하러 갔으며, 다른 많은 사도들도 팔레스티나 인접 지역 및 이집트,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토마스 사도는 인도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맡기신 선교 사명을 따라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마태 28,19-20 참조). 그러므로 초세기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영성 생활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고 열심히 실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