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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두 가지 방법
(슥 14:16-21) 피영민 목사
오늘은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연속극에서 마지막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 장면을 아슬아슬하게 만들면 다음 주에 어떤 내용이 나올까 궁금해하며 보게 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시원찮게 끝나면 그 다음 주는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서 다음 회 연속극의 시청률이 달라집니다.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독자에게 강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사명은 우선적으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16년 동안이나 성전을 짓지 못하고 있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너희를 위해서는 살만한 집을 짓고 성전은 짓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 백성들을 격려하여 성전을 짓는 것이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일차적인 사명이었습니다. B.C. 520년에 두 선지자가 예언을 시작해서 4년이 지난 B.C.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으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사명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스룹바벨 성전의 완공은 연속극 한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회가 끝나고 또 다음 회를 기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되면 그 성전에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서게 되실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 즉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시대를 메시아시대 혹은 신약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관한 예언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말론적인 용어로는 “already but not yet”이라고 합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14장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완성될 것입니다. 결국 스가랴 선지자는 신약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달성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근본 목적은 인간의 존재 목적과 동일합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사 43:7).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647년 영국에서 재정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이 ‘인간의 최고 목적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인간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로 모이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십니까? 우리가 자식들을 키우면서 자식들이 부모와 함께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하지만 연락도 하지 않고 부모에게는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면 속상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아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Ⅰ.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구약시대는 제사시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시대가 되면서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루살렘이 아닌 모든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함으로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이고 신약의 예배는 실체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민족적인 제한이 있지만 신약의 예배는 민족적인 제한이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의 제한이 있지만 신약의 예배는 그런 제한이 없습니다. 어디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드렸지만 신약의 예배는 이미 오신 메시아를 기념하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스가랴 14장 16~19절까지는 신약의 예배에 관해 네 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첫째, 예배의 대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진리를 우리가 실천하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절만 되면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우상숭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귀신은 우리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명절만 되면 드리는 제사는 죽은 사람에게 예배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사상을 차리면 죽은 조상이 와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이 무슨 밥을 먹습니까? 밥은 살아계실 때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절에 아무리 모든 친척, 가족들이 연합해서 핍박한다 할지라도 제사는 지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친척 중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지 얼마 안 되었는데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시누이가 제사를 지내야 된다고 압박하자 초신자니까 어쩔 수 없이 제사를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사 지내고 두 가지 어려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첫째,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뻔했고 둘째, 이웃집에 갔다가 개에게 물려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는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불신자가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몹시 싫어하시고 강한 징계를 내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절에는 제사를 지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징계를 자초합니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명절만 되면 고생을 많이 하시는데 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귀신들은 우리가 강하게 나가면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타협하고 자꾸 뒤로 물러가면 귀신들은 더욱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 지내라고 압박하는 어르신이 계셔도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강하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저희 큰 집이 오랫동안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을 믿고 큰 집에 전화했더니 그날 밤 형수가 꿈을 꿨답니다. 길 양쪽으로 한쪽에는 절이 있고 한쪽에 교회가 있었는데 절의 스님들이 목탁을 치면서 우리가 졌다고 하자 교회의 목사님이 어서 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큰 집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적으로 강하게 나가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귀신들도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의 주체에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다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유대인들만 예배를 드렸는데 신약시대에는 이방인들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또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완성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0절은 천국에서 이 예언이 완성된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천국은 예배의 장소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장소입니다. 천국에서는 족속과 방언을 가리지 않고 각 나라에서 나온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영광과 어린양의 은혜를 찬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 예배의 내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14장 16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했는데 유대인에게는 일곱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 장막절과 초막절은 같은 것입니다. 초막절은 7월 15일에 시작되는데 7일 동안 원두막을 짓고 원두막에서 사는 것입니다. 원두막에 들어가 7일을 지내고 8일째 되는 날 거룩한 성회로 모이는 것인데 초막절은 왜 지키는 것이냐? 레위기 23장 41~43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초막절은 지금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지만 과거에 애굽의 노예였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편안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과거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면서 장막에 거하며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7일 동안 원두막을 짓고 거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것과 광야 생활 가운데 보호하시고 축복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지키는 절기인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시대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지옥과 영원한 멸망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악한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를 풀어 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고 광야 같은 세상에서 지금까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이 예배의 내용인 것입니다.
넷째, 예배의 상벌을 하나님께서 보장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에게 현세에도 복을 주시고, 내세에도 복을 주시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슥 14:19). 어떤 분은 이 구절이 예수님의 재림 이후 천년왕국에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천년왕국을 믿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천년왕국이나 천국이 아닌 교회시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축복이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심판과 멸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 구원이 아닌 저주와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이중구조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8).
예배 생활에 성공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주일이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리십시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우리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이 실현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예배의 주체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되고, 예배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에 행해주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상이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고 영예며 축복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Ⅱ. “성결”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슥 14:20~21).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전면에 있게 하라” (출 28:36~37). 구약시대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머리에 쓰는 관이 있었는데 이 관 앞에 정금에다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서 매달았습니다. 그러면 이 관을 쓴 사람이 대제사장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말 방울은 말의 목에 달아 말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게 한 것인데 이것의 의미는 천하고 보잘 것 없는 것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솥도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성전에서 사용되는 솥만 성물이었는데 메시아 시대가 되면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다 성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히 여겨졌던 제단 앞에 피를 담는 주발 또한 성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성물이라던가 성결이라는 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따로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그릇이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면 거룩한 그릇이고, 사람이 쓰면 거룩하지 않은 그릇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나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만 하나님께 구별되어 사용되었지만 메시아시대에는 천하게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도 구별되어 거룩하게 쓰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가인데 스가랴 14장 14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신약시대가 되면 제사장과 평신도의 구별이 없어지고 모든 신자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별되어 쓰임 받는 사람에 대해서 민족적, 지역적, 교육적, 신분적 차별이 없어지게 되고 아무리 천하고 더러운 존재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으면 하나님께 구별되어 쓰임 받는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이 원리를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랍비 등 거룩한 척하고 누구보다 의롭다고 생각했던 자들에게 회칠한 무덤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창녀로 살던 여인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르자 거룩한 여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 남편이 여섯 번이나 바뀐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을 갈취하던 세리 마태도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것을 다 내놓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절대 불가능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 중에서도 아주 먼 곳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거룩한 존재가 되었으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수종들고 영광을 돌리도록 구별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쓰시겠다고 하면 “예”라로 대답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데 “왜 부르십니까?”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아낌없이 드리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출세하는 것이 사람의 목적이 아닙니다. 돈을 버는 것도 사람의 목적이 아닙니다. 돈, 건강, 인기, 명예 이런 것들은 다 살아가는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 한마디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첫째,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둘째, 하나님께 구별되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함으로써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스가랴 14장에서는 두가지 표현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누구에게 숭배합니까? 여호와께 숭배합니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슥 14:20).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됩니다. 스가랴 마지막 장을 보면서 우리 마음에 두 표현 ‘여호와께 숭배’와 ‘여호와께 성결’이 강하게 새겨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크게 영광 돌리는 자가 받는 복
(슥 14:16-21)
이 시간에는 “크게 영광 돌리는 자가 받는 복”이라는 제목입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주어질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복락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 때 선민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하나님의 택하신 남은 자들이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 모여 감사의 초막절을 지키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 때의 있을 감격이 지금 느껴지지 않습니까?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복될까요? 반드시 그럴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참고로 초막절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와서 과거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지내던 때를 기념하면서 구원과 보호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쁨의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우리들이 장차 천국에 올라가서 이 세상 나그네 길에서 구원하시고 돌봐주신 그 은혜를 노래하는 신령한 초막절의 귀한 예표입니다.
그런데 이 초막절은 신령한 의미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지켜야 할 절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을 영광스럽게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시제로 보면 우리 구원은 과거 즉 이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며 살 때 그것이 바로 신령한 초막절이며 이 찬양이 우리의 잔치가 되고 축제가 될 때 그것이 바로 온갖 복락을 누리는 초막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크게 영광 도리는 자가 받는 복은 무엇일까요?
1. 성령의 비를 넘치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17-18절에 “천하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그랬습니다. 초막절을 지키지 않으면 비를 내리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초막절은 다른 말로 곡식을 저장하는 수장절인데 수장절도 지키지 않는 자에게 어찌 잘 되라고 비를 주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재미있는 것은 비가 와야 수장절이 아니라 수장절을 지켜야 비가 존재한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당장 내 손 안에 주셔야 할 수 있다는 생각이지만 하나님은 이미 주셨으니 믿고 순종하면 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믿고 초막절 잔치 축제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이처럼 신령한 초막절을 지키면 성령의 단비를 주십니다. 진정 기쁨으로 지키면 하늘의 단비는 물론 애굽의 나일강의 창일함 같이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서서 날마다 감격 속에서 나를 예수 안에서 구원해 주시고 영화롭게 해주시고 영원한 복을 주신 하나님께 항상 찬양하며 감사하는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주실 것을 믿고 하는 찬양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믿고 드리는 찬양이어야 합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주신 것을 믿는 것과 주실 것을 믿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천국 가는 것 아닙니다. 이미 나의 구주가 되셔서 구원해 주신 것을 믿을 때 천국 가는 것입니다. 이 복음적인 믿음에 서서 날마다 우리 신앙이 감사의 축제가 될 때 그 복음의 실재를 누리는 은총을 받게 됩니다.
2. 모든 저주도 재앙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18-19절에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재림 후에 무슨 재앙이 있고 벌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의 복음을 지상에 나타날 사건 혹은 그런 표현을 빌려서 진리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혼동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지 영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가 복음에 서서 구원하심을 감사하며 초막절을 지키듯 온전한 예배생활이 정착되면 재앙도 벌도 다 사라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이런 삶이 부족하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진리를 알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구원의 잔을 들고 찬양하세요. 그 때 무슨 재앙이 오겠습니까? 다가왔던 재앙도 물러가게 됩니다. 이렇게 복음 안에 서서 찬양함이 귀한 것입니다.
3. 속됨도 다 사라지고 하나님 쓰시기에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20-21절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주님이 재림하시면 그 때 온통 거룩함만이 존재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말씀처럼 짐승의 목에 단 방울까지도 거룩하게 된다면 세상에 거룩하게 되지 않을 물건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당시 성전에서 고기 삶는 솥보다 보혈을 상징하는 피 담는 주발을 더 귀히 여겼는데 그 날에는 솥도 주발만큼 귀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성속 구별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을 보면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까지도 다 거룩해져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쓰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상할 수 없는 거룩한 세상이 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기도 하지만 우리가 현재 복음 안에서 감격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 모든 죄도 악도 세속도 다 사라지게 될 것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여기 가나안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속의 멸해야 할 죄의 사람입니다. 복음 안에서 살 때 이 죄악의 속성이 사라지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기도와 이방인의 기도가 다른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주신 것을 믿고 감사하지만 이방인의 기도는 지성을 다해 빌어서 신에게 얻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그런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믿음과 기쁨과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막11:24에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셨습니다.
복음 안에서 볼 때 우리가 예수 안에서 받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1장을 보면 이미 받았다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엡1:3을 보면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4절에는 택하셨다. 5절에는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6절에는 거저 주셨다. 7절에는 죄 사함을 받았다. 11절에는 그의 기업이 되었다. 13절에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롬8:30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진리를 알고 믿는 것과 무조건 믿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버림받은 이스라엘이 그랬듯 진리 없는 열심은 단지 종교적일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납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복음 가수들이 이 진리를 좀 더 깊이 알고 작사 작곡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복음에 선 구원의 노래가 더 많아져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구원과 승리의 찬양들이 더 많아져야하겠습니다.
그런데 초막절은 7일 동안 지켰습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우리 믿음이 지식에 머물거나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는 초막절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이 그야말로 잔치가 되어야합니다. 요즘 축제라는 말을 쓰는데 이방인의 축제가 아니라 거룩한 축제가 되어야합니다. 우리가 힘을 다해 복음의 축제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예배의 축제가 될 때 하나님의 온전하신 복이 그대로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심과 승천과 영광은 바로 우리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히시는 놀라운 구원과 영광과 승리와 복락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온전히 감사하며 크게 영광 돌리는 신령한 초막절을 지키십시다. 불신과 불평의 소리가 나오지 않게 합시다. 그래서 성령의 단비가 홍수와 같이 임하고, 어떤 재앙도 저주도 벌도 사라지고, 어떤 죄악과 속됨도 다 사라져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귀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