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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19-33 (하나님의 본심을 붙잡자)
성경본문 예레미야애가 3: 19-33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21.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29. 입을 티끌에 댈찌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찌로다
30.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찌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32.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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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김학규 목사
요즘 정치하시는 분들을 보면 정치에 대해 뭔가 잘 모르는 나도 속에서 열 불이 날 때가 있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치는 국민들을 안정케 하고 나라를 발전하는 일에 필요한 것이 정치입니다.
그런데 요즘 정치하시는 분들을 보십시오.
정말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보다는 자기 당, 자기 자리, 자리 욕심에 빠져서 정치만 하고 있습니다.
진짜는 중요한 것은 뒷전이고, 덜 해도 될 자기 당, 당권, 당의 규묘나 세력 넓히기에 혈안입니다.
요즘 대선 후보 경선을 하는 사람들도 보십시오.
정말 정정당당하게 자기들의 실력을, 자기들의 정치의 면들을 보여주면 되는데 자기가 불리하니까 남에 대해서 별것 아닌 것들을 끄집어내서 그것을 문제화하고 초점을 맞추어 서로 물고늘어지는 모습들을 볼 때 답답합니다.
하기사 목사는 목회만 하면 되겠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볼 때 얼마나 속보이는 일들을 하는지....
왜 제가 서두에 정치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제 이야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진짜 붙들고 좇아가야 할 것이 있는데, 즉 알맹이를 붙들어야 하는데 알맹이는 놓아두고 껍데기만 붙듭니다.
정말 얻어야 할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인데 알맹이는 뒷전이고 껍데기만 관심을 두고 좇아가는 모습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질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본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말씀을 들을 때, 특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건을 보면, 우리가 볼 때에는 예수님께서 병자나 고치고, 배고픔의 문제나 해결이나 하고, 이적과 기적을 행하는 모습으로만 비추어질 때가 많습니다.
사실 성경이 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교회를 다니는 것을 축복 축복하고, 병 고침 병 고침하고, 내 잘먹고 잘 사는 것을 위한 예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병을 고쳤고, 복을 주셨고, 잘먹고 잘살게 하는 일들을 이루셨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고, 말씀하시는 일들에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요,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수단이요, 방편일 뿐이고 정말 그 일, 그 사건, 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본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그런 본심을 볼 줄 알아야 하고, 정말 우리가 붙들기 위하여 좇아가는 것이 본질을 붙들어야지 껍데기만 붙들고 나아가면 안 됩니다.
그 한 예가 요한복음 6장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난 후 제자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고 계시느냐 하면,
(요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즉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은 바로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임을 말씀하시고 사람들로 그 예수님을 믿는 자 되어지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하시니 그를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요 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그리고는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요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들은 주님의 본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본질은 놓아두고 껍데기만 좇아 다녔던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가슴 아파하면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요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제자들은 주님의 본심을 바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오늘을 살고 있는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왜 예수님 앞에 나옵니까?
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합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행하고 있는 많은 모습 중에 본질은 놓아두고 껍데기만 붙들고 나아가고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기에 우리가 어떤 것이 본질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고, 우리가 정말 어떤 것을 붙들고 나아가야 할지를 말씀을 통해 바로 듣고 바로 믿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1.하나님이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건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말씀하시고, 여러 모양으로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복을 주신 다든지, 병자를 고친다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 다든지 여러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이 때 우리 사람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사람들이 사람이 병 고침을 받은 것, 귀신이 쫓겨 난 것, 문제가 해결된 것,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이 주어진 것 등 온통 하나님이 주신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왜 나에게는 주지 않을까?
왜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시면서 나에게는 주시지 않을까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본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그래서 사람들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붙들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들기 위하여 그들 앞에 나오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삶을 마치고 이제 얼마 후에 들어가 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무엇을 상기시킵니까?
“(신 8: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신 8: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신 8: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 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신 8: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신 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 8:17)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신 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정말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한두 가지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십니다.
하나님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고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정말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놓칠까봐, 하나님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많은 것을 가져도 하나님을 잃으면, 하나님을 놓치면 내게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2.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중히 여깁니다.
또 두렵게 여깁니다. 물론 십자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뭔가 두려움이 생기면 그 두려움을 좇아 내려고 십자가를 들이댑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아무리 많이, 아무리 큰 것을 드러 대 보십시오.
십자가를 천 개, 만개를 갖다 대도 소용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수단이요, 방편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두려움을 좇아내고, 예수님이 귀신을 제어하고, 예수님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닐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모신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기만 하면 우리 가운데 승리의 역사, 능력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정말 우리가 붙들고 쫓아가야 할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보다 더 앞서고, 예수님 보다 더 크게 의지하고, 예수님보다 더 중히 여기고 나가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3.영광을 누리는 것이지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고난이라고 합니다.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고난을 당하면, 즉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면 무엇부터 생각합니까?
우리는 당한 고난만 생각합니다. 내가 힘든 것을 생각합니다.
이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문제 속에, 어려움 속에 더 깊이 빠져 가고 맙니다.
그런데 오늘 읽었던 성경에서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가 근심하며 걱정하며, 고통 당하는 것이 본심이 아니십니다.
(렘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 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고난 가운데 힘들고 어려워하라고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고난 가운데 집어넣어서 골탕을 먹이고 우리를 못살게 하려고 하심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끌어낸 목적이 광야입니까? 가나안입니까?
그렇습니다. 광야가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만 가나안을 주셨을 때 그것을 누리고 다스리는 실력자 되도록 하나님께서 광야라는 40년을 주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들에게 광야가 없었다면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가나안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빼앗기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들로 어떻게 하든지 더 좋은 것 가운데 있게 하시기 위하여 광야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몰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 광야 가운데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시시 때때로 `돌아가자, 왜 우리를 이렇게 하느냐`고 불평을 틀어 놓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습니까? 여호수아는 어떻습니까?
왜 모세라고, 여호수아라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았기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 원망하고 불평을 하기 전에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립니다.
(민 20:6)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게 고난이 와 있습니까?
어려움이 와 있습니까?
문제가 와 있습니까?
그것 자체만 보지 마십시오.
문제 자체만 보고, 일 자체만 보지 마십시오.
문제 저 넘어에 있는 해결을 보십시오.
고난 저 넘어에 있는 영광을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능히 잘 감당해 나가게 하실 줄 믿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바로 우리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신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목적이 아닙니다.
해답이 있습니다.
해답이 목적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고난보다 고난 다음에 주실 영광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누군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고난은 가장 된 축복이다`
맞습니다.
고난은 가장 된 축복입니다.
고난은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안에는 엄청남 영광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믿음으로 살 동안 수많은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고통과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난의 자리가 힘들다고, 죽는게 억울하다고 도망하고 팽개치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히 11: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 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 11: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히 11: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히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 느니라
(히 11: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 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더 좋은 부활(35), 좋은 것(40)을 바라보았기에 믿음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고난 중에 있습니까?
지금 어려움 가운데 빠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본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고난 다음에 주어질 영광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더 큰 은혜와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4.속 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이지, 겉 사람이 강건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믿음 생활의 목적,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왜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교회를 다니는 것을, 예배드리는 것을, 봉사를 하고 헌신을 하는 것을 마치 내가 그렇게 함으로 인해 이 땅에서 잘먹고 잘 살수 있는 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초점이요, 목적이요, 그것이 전부인줄 생각하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전혀 아닌 것이 아닙니다.
물론 복이 주어집니다.
건강이 주어지고, 물질이 주어지고, 일이 잘 되는 일들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일이 잘 되게 하신 것은 단순히 여러분과 저를 이 땅에서 잘먹고, 잘 사는 자되도록, 육신이나 건강하고, 땅에서나 복 받은 자로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주시는 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복, 이것을 이 세상의 복이라고 하고, 겉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붙잡는 것에 온 신경과 관심이 있고 쫓아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온 관심은 단순히 우리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이 세상의 복, 즉 겉 사람을 붙잡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든 겉 사람이 어떻게 되게 되어 있습니까?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겉 사람은 후패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후패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낡고, 없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온 관심은 우리의 겉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속 사람이 강건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이 일, 저 일을 동원하시고, 우리에게 붙여 주시는 것입니다.
왜요?
(고후 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러니 여러분!
신앙생활의 목적이 내가 하나님을 믿어서 이 땅에서 잘먹고 잘 사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지 마십시오.
내가 기도하고, 내가 예배드리고, 내가 봉사하고, 내가 물질을 드리고, 내가 주신 재능으로 쓰임을 받을 때 그것이 목적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로 예배드리고, 교회에 나오고, 기도케 하시는 본심은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그것을 붙들고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즉 우리가 죽거나 주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이게 하라고 주신 예배, 교회, 기도, 말씀, 봉사를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속 사람이 강건했는지? 얼마나 우리가 예수님을 닮았는지? 그것을 재어 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어떻게 하신다고 합니까?
“(고전 3: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고전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 3: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 본심을 바로 붙잡고 쫓아가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과 영광을 얻게 되는 자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열심히 행하여 얻은 것으로 겉 사람을 살찌우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통해 우리의 속 사람을 강건케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겉 사람의 것, 세상의 것, 이 모든 것은 어떻게 하십니까?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본심을 압시다.
제발 우리가 껍데기를 붙들고 나가지 말고 알맹이를 가지려 합시다.
그러면 껍데기까지 내 것이 될 줄 믿습니다.
본질은 하나님이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본질은 영광이지 고난이 아닙니다.
본질은 속 사람이지 겉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알고 행하면 여러분과 저의 삶 속에도 엄청난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붙잡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갖게 되는 자 될 줄 믿습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