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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파트너 박경수 목사
성경본문 : 잠언 29: 18
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목적:하나님의 파트너로서 목표를 세워보자. 그것이 내 창조의 목적이다.
귀머거리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아버지의 보호에서 벗어나 학교에서 자신을 위해 통역해주는 여인의 보호 아래 있게 해 달라고 법원에 청원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오래 전에 떠나버렸기 때문에 이 소녀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딸을 키우기 위해서 집에 있었지만, 딸이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수화를 한 동작도 배우지 않았다. 그 소녀는 울면서 “나와 이야기하기 원하는 누군가와 있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판사는 아버지를 불러서 화를 내며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았습니까?” 소녀의 아버지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 줄 몰랐죠. 내가 주목하기를 바란다면, 아이는 그저 뭘 두드리거나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뭔가를 집어 던지면 되었거든요.”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딸에게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목적하는 것이 없었다. 당연히 목적하는 것이 없으니, 하고자 하는 것이 없었다. 딸을 진심으로 더 많이 사랑하기를 원했다면 분명 딸과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목적하는 것이 없으니, 방법이 없다.
목사님 한 분이 딸이 입원해 있는 어린이 병원을 방문했다. 병원에서는 목사님에게 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만나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내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을 만난다? 목사님은 의아해 했다. 병원에서 요구하는 것은 간단했다. 지금 병원에 아버지라는 사람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는 것이다.
병원의 이야기는 이런 내용이다.
많은 아이들이 장애를 갖고, 아픔을 갖고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들의 모습에는 부모들이 원하는 축구 선수나, 미스 코리아, 연예인 같은 사람들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 부모들은 주저하지 않고 갖다 버렸다. 부모의 기대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집 밖으로만 버려진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으면서도 버림 받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공부를 못하니까, 성격이 나를 닮지 않았으니까, 장애가 있으니까……. 갖가지 이유를 들어 집 안팎으로 아이를 내다버린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기대를 걸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교회는 하나님의 기대에 충실했을까? 나는, 나는 하나님의 기대에 충실했을까? 불행히도 절대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그렇게 버리셔야 할까? 거룩하게 살지 못하니까, 완전하지 못하니까, 큰 열매 맺으면서 살지 못하니까?
창 6장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이야기한다.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하다. 생각 자체가 악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면서 느끼신 감정, 그것은 한탄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이 아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의 책임을 물으셨다. 자신 있게 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7).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음 받은 목적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밥을 먹기 위해서, 큰 집에 살기 위해서, 유명해지기 위해서,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을 창조하셨는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인생에서 가장 큰 비극은 죽음이 아니라 이유 없이 사는 것이다. 우리에게 왜 삶이 주어졌는지 알지 못하면서 사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가 아는 인류 역사의 맨 처음부터, 인간은 항상 질문해 왔다. “내가 왜 여기 있는가?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주와 피조물과 인류의 존재 이유가 있을까?” 이런 질문은 보편적이다. 인종, 피부색, 혈통, 사회, 경제적 지위, 국적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의 질문이다.
사람은 의미와 관계를 간절히 찾으려 한다. 이런 내적인 열정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여 움직이게 한다. 이것은 결정의 방향을 정하고 행동을 조종하며 상황에 대한 반응들을 지시한다.
그런데 인생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큰 비극이 생기기도 한다. 많은 경우 자살이 이를 반증한다. 또한 대량 학살이나 연쇄 살인범들은 자신들의 반사회적인 행동이,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거나 중요한 사람이라는 점을 느끼기 위해서라고 고백했다.
“아직 공직에 대한 강한 열정이 있습니다. 다시 출마해서 이길 자신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도 두어 권 쓰고 싶고 강의도 하고 싶습니다. 고민 끝에 다음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남은 임기 동안에도 노스다코타주와 미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5일 바이런 도건 상원의원)
“제 아내가 난소암에 걸렸습니다. 이제 저는 아내 곁에 서서, 그를 지켜내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의회를 떠나려 합니다. 캘리포니아주 선거구민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지난해 12월 29일 조지 라다노비치 하원의원)
멋스럽기도 하고, 솔직하기도 하고, 조금은 감동적이기도 한 미국 의원들의 차기 선거 불출마 변이다. 워싱턴DC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은 백악관이 아니라 의사당이다. 의사당 회의장은 우리나라 법정처럼 생겼다. 의원들의 자리는 재판부가 앉는 법대처럼 높게 배치돼 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건, 별 넷 계급장을 단 스탠리 매크리스털 아프가니스탄 주둔군 사령관이건 의원들을 우러러 보며 증언해야만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권위와 영예가 보장된 자리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회의원이라는 자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쓰고 싶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인생의 후배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난소암에 걸린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기꺼이 국회의원의 자리에서 떠나고 싶다……. 인간은 이토록 자기 인생에서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젊고 튼튼한 수영 선수가 물에 빠져 죽어가는 노신사를 구해주었다. 그 동안에도 노신사는 제발 자기를 죽도록 내버려두라고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두 사람은 해안에 도착했다. 노신사는 즉시 화를 냈다.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청년은 노인을 보다 깜짝 놀랐다. 노인은 캠브리지씨다. 20년 동안이나 알고 지내던 사람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업가이며, 도시에서 가장 큰 부자이며, 잘 키운 세 명의 아들이 있고, 아내와의 사이도 무척 좋다고 소문났다. 많은 친구들이 있고, 많은 추종자들이 있다. 청년 역시 캠브리지씨를 존경한다. 그런 그가 왜 죽으려고 하는 것일까?
캠브리지가 고백한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고. 성공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실패자라고. 부모님이, 아내가, 자녀들이, 회사 직원들이 자신을 보며 칭찬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늘 공허했고 절망스러웠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기대에 맞추며 살다보니, 막상 자기 인생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왜 사는지 알지 못하면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쪽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캠브리지는 청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자네, 나처럼 애쓰지 말게나. 자네가 누구인지 발견하고 자아를 이루게.”
사람의 인생이 돈으로 평가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자이다. 지위나 경력으로 평가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자이다. 유명세나 권력으로 평가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자이다. 의미 있고 효과적이고 성취감 있는 인생을 살려면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돈이나 지위 그리고 경력은 목적이 아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목적이 없는 곳에는 자기 통제도, 도덕적인 확신도, 윤리적인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원칙은 개인 생활뿐 아니라 공동생활에서도 점점 명확해진다. 미국은 1년 동안 석유보다 마약에 더 많은 돈을 쏟고 있다. 조만간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의 사회적 질병은 짧게 생각하는 것이다. 장기적인 비전을 잃어버렸다. 소명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목적이 없고 살아갈 이유가 없으니 훈련이나 자기 통제가 있을 리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있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피조물을 창조하셨다. 모든 피조물에는 목적이 있다. 그 피조물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소명이라고 한다. 사람이 살고 싶은 대로 살면 죄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참 목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전 9:26)
월드컵이 국내에서 열리며 어린이들이 축구에 몰려들었다. 유명 연예인이 한류스타가 되는 것을 보면서 연기를 배우려는 어린이들이 학원에 몰려들었다. 그래도 역시 실력이라며 영어를 외치자 혓바닥을 일부러 자르려는 어린이들이 병원에 몰려들었다.
누구나 성공을 원한다. 어린이들도 성공을 원한다. 문제는 성공의 기준이 돈이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갖는 것이 성공이다. 돈을 벌기 위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다. 그렇게 좋은 대학에 가고, 돈을 벌어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목적이 없으니 그 돈으로 타락하게 될까, 천국을 그 돈으로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사용할까?
목적이란 창조주의 마음 가운데 있는 고유의 의도를 말하는 것이다. 창조주는 그 의도를 가지고 특정 물건을 만든다. 어떤 제품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제작자의 마음속에는 어떤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는 제품의 디자인과 제작을 위한 실질적 재료가 된다. 따라서 목적이 제작보다 선행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분명한 목적을 가지시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 세대가 당신 삶에 있는 무엇인가에 필요를 느낀다는 증거다. 그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삶의 부산물처럼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목적을 이루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리고 세상은 나, 우리의 기여로 유익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비를 창조하신 시간만큼 꽃을 창조하시면서도 똑같이 시간을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비를 창조하신 능력만큼 꽃을 창조하시면서도 똑같이 능력을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대통령을 창조하신 시간만큼 나를 창조하시면서도 똑같이 시간을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대통령을 창조하신 능력만큼 나를 창조하시면서도 똑같이 능력을 사용하셨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절대로 모자라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다. 하나님의 목적하심이 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요나는 가기 싫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했다. 도망치는 배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폭풍우에 휩싸였다. 선원들은 배를 안정시키기 위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버렸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각자가 믿는 신에게 기도하기로 했다. 이때 마침 선장이 배 밑창에서 잠들어 있던 요나를 발견했다.
요나는 지금 이 폭풍우가 왜 일어났는지 선원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폭풍우가 가라앉을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정말로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언제 그랬나 싶을 만큼 폭풍우가 사라졌다.
선원들의 문제는 폭풍우가 아니라 폭풍우의 알 수 없는 원인이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데려가고자 폭풍우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구하려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어도 되었다. 몰랐다는 것이 변명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폭풍우의 목적을 몰랐다. 목적을 알지 못하면 언제나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씨앗의 목적은 나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벼룩은 자기 키의 137배나 뛰어오를 수 있다. 올림픽에 나가면 금메달은 무조건 벼룩의 차지이다. 그런데 벼룩을 뚜껑이 있는 병에 집어넣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벼룩은 여전히 자기 키의 137배를 뛰는 힘으로 높이 솟아오른다. 그러다가 뚜껑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병뚜껑 높이만큼만 뛸 수 있다는 사실을. 이윽고 벼룩은 병뚜껑의 높이가 자기의 한계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병뚜껑이 사라진 후에도 자기가 느끼는 한계는 여전하다.
목표를 다시 세우자. 목표를 세우되, 큰 목표를 세우자. 내가 목표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이뤄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파트너로서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표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아직 나는 하나님의 파트너로서 성장하는 중이다.
(2) 환상 - 보고 듣게 하는 묵시 김철한 목사(오목천교회)
성경본문 : 잠언 29: 18
사도행전 16: 6~10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환상을 본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육의 눈으로 계시되는 것을 볼 수 있는가? 히브리인들은 시각적 표현을 좋아한다. 본다는 것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라아(???)’다. 이 ‘라아’는 헬라어인 호라오(?ρ?ω)가 400회, 에이돈(ε?δον)으로는 670회가 사용되고 있다. 또 블레포(βλεπ?)가 있다. 이 단어는 종종 관찰할 수 있다. “지각하다, 경험하다, 보다”와 같은 의미에서 영적 지각을 가리킨다.
아모스 선지자는 환상을 보았다. 암8:2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니이다.”
아모스는 여름 과일과 한 광주리의 환상을 본 것이다. 그것은 겉만 그럴 듯 하지만 속은 썩어서 곧 심판을 받게 될 시대를 말해준다.
스가랴 선지자는 슥4:2~3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라고 하였다.
스가랴 서는 온통 보는 환상이다.
슥5:2에도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본다. 여기서 두 감람나무는 주 앞에 모셔 서게 될 기름부음 받은 두 증인들이다. 또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은 온 땅에 내리는 저주를 말한다. 집을 살라버리는 저주의 환상이다.
환상은 나름대로 메시지가 있다.
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들어야 할 메시지가 담겨 있다. 신약의 복음의 시대에도 시각적으로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그 속에서 메시지를 전해주신다. 요한계시록은 온통 성령에 이끌리어 천상의 세계, 천상의 보좌를 보는 장면이고 장래에 일어날 메시지를 환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요한계시록만큼 시각적인 책이 어디 있으며 환상으로 가득 찬 메시지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환상을 말할 때 일고의 가차없이 외면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나의 방법이 끝났을 때, 나의 노력과 나의 능력으로 길을 찾지 못할 때 하나님 편에서 인도가 필요하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일하신다. 환상으로 삶을 인도하고 환상으로 미련한 복음 전도자를 깨우치고 환상으로 영혼을 구원케 하는 일을 하신다.
바울의 삶을 보자.
그의 삶을 바꾸어놓고 삶을 지탱해가는 방법이 환상이라는 방법이었다. 환상은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1. 율법의 사람을 복음의 사람으로 바꾸어놓을 때 환상이 있다. (행9:3~19)
행9:3~19을 보면 사울이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변화되는 회심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하늘로부터 빛이 사울을 둘러 비쳤다. 땅에 엎드러진 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였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순간이었으나 이 회심의 과정에 빛이 비치는 환상 속에 사울이 있었다.
그리고 행9:10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환상 중에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기도하는 사울을 찾아 안수해주라는 음성을 듣는다. 교회의 원수, 그리스도인에게 원수 같이 행하던 사울을 안수하는 사랑의 손, 그 손의 터치가 있었기에 사울을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다. 성령 충만하여 세례를 받고 행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를 전하는 증언의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초자연적 빛이 비추이는 역사, 들려지는 음성, 환상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이끄심, 그것이 율법의 사람을 복음의 사람으로 바꾸어놓았다.
사람이 바뀌는 것은 기적이다. 머리의 사람이 가슴의 사람이 되는데 30년이 걸렸다고 한다면 율법의 사람이 복음의 사람이 되는 변화는 몇 년이 걸릴 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면 어느 순간에 되어 버린다.
2. 여기가 아니고 저기를 가야할 때 환상을 주신다. (행16:6~10)
행16:6을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다. 바울은 무던히도 애를 썼다.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쓴다. 현재의 터키인 소아시아를 전도하겠다고 혼신을 다한다.
그러나 행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한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보았을 때 곧 소아시아를 마음에서 내려놓고 마게도냐로 가기로 힘쓰게 된다. 나의 생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기가 옳다. 그러나 마게도냐로, 저기로 복음의 발을 향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이다. 복음 실은 바울 일생을 구라파로 옮겨 싣고 떠나게 한 것은 환상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 저쪽인 빌립보, 데살로니가, 아덴은 꿈에서 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환상이 있을 때 거기로 가게 하도록 부르셨음을 인정하게 되고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빌립보로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환상은 삶의 여정이 막힐 때 그것을 알게 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삶의 인도의 방법이다.
환상을 조롱하지 말라. 환상은 내 영혼의 네비게이션이다. 보여주고 들려주는 환상은 길을 보게 하고 길을 알게 하며 길을 찾아 달리게 한다. 이 환상이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을 보면 곳곳에 비전(Vision)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3. 대적자들의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의 삶이 필요할 때 환상이 있다. (행18:9)
바울의 전도 여행은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서 옥에 갇히는 고난을 겪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들은 소동을 일으키고 야손과 몇 형제를 끌고 갔다. 이유는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바울 일행의 전도팀을 맞아들였다는 점에서다. 결국 행17:10에서 바울과 실라는 밤중에 뵈뢰아로 간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뵈뢰아로 가서 거기 있는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한다. 바울은 다시 아덴으로 떠나갔다. 아덴에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변론하고 쟁론했다. 말쟁이란 말도 듣는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설교를 하는데 이 설교의 반응은 조롱과 다시 들어보자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울은 사실 전도자로서 지역 지역을 밟고 있으나 어떤 면에서는 대적자와 맞부딪쳤다. 참으로 힘들게 만드는 도전이었다. 탈진하다 못해 혼절할 대적이었다.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은 다시 고린도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니 그 유대인들은 대적하여 비방을 한다. 바울은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으로 옮겨간다. 그때 회당장 그리스보를 비롯해 수많은 고린도인들도 믿고 세례를 받는 열매가 있었는데 행18:9을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그래서 바울은 힘을 내고 1년 6개월을 고린도에서 흔들림 없는 용기로 머물렀다.
사역이란 탈진과 혼절의 지경에 떨어질 수 있다. 다 내팽개치고 어디론지 달아나고 싶을 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환상을 주실 때 삶의 용기가 살아난다. 사역에 대한 새로운 확신과 강력한 파워가 살아난다.
박세록 장로, 그는 서울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전문의로서 학회 회원이 된 이다. 그는 1988년부터 20년 넘게 내 동포 돕기를 위한 샘복지재단을 만들고 의료 선교를 하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데 힘을 썼다. 북한의 진료소 5,000군데에 왕진 가방 10,000개를 보내어 약을 공급하고 병원과 약 공장을 평양 단동에 세웠다. 왕진 가방에 이어 2편 왕진 버스란 책을 보면 북한 당국으로부터 4번이나 출입 금지를 당했는데 200여는 이름 모를 안가에 끌려가서 남한에 들어가 북조선의 가난과 어려운 현실을 강연한 것에 관한 자료를 다 공개를 하며 추궁받게 되었다. 그때 어떻게 될지 모를 때 환상으로 새 힘을 얻고 두려움을 이긴 바울의 행적 때문에 자신도 담대하게 섰다. 북한 당국자에게 설 수 있게 되었음을 간증한다.
환상에 대한 이야기만 믿어도 용기가 생긴다. 하나님의 개입과 용기를 주시는 일이 직접 경험된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하물며 환상을 본다면 분명 용기의 메시지를 듣게 될 것이다.
4. 안전한 평화를 누리게 하려고 환상이 있다. (행27:25)
바울은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로마로 간다. 배에 탄 276명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14일간 파도에 시달린다. 구원의 여망도 없고 여러 날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파도와 씨름하며 지쳐간다. 그러나 바울은 275명의 사람을 위로한다. 먹지도 못하고 사망의 그늘에 던져진 선원과 승객들에게 선포한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였다. 그 말씀의 요지가 무엇인가?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섬에 도착하게 될 것이며 배가 난파되어도, 파도에 표류하여도 결코 죽지 않기에 안심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14일을 파도와 싸우는 사람들! 어찌 죽음에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바울의 평안을 보라. 위로하는 바울의 심령 상태를 보라. 절대 평화를 지닌 바울이다. 이는 어제 밤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자를 환상 중에 보았기 때문이다. 환상이 있을 때 사망의 파도도 평화를 깨뜨릴 수 없다.
바울의 사역을 이끌어가는 하나님은 결정적일 때마다 환상을 주셨다. 그 환상을 부인하지 말라. 그 환상을 보는 자가 되라. 환상을 보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처음 환상을 보았다. 교회의 기도실에 엎드려 있을 때 나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림을 보는 자가 되었다. 보는 환상이 내게 나타났다. 장엄하고 찬란하며 가슴 뛰는 그림이었다. 그 한 번의 그림, 지구를 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을 보는 환상이 나를 오늘도 이끌어 가고 있다. 하나님이 이 우주의 주인이시다. 하나님 손 안에 만물이 다 있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아들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사역이 잘 되느냐, 못 되느냐,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등 이런 고민거리가 아니다. 아들로서 내가 하나님의 집인 우주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어린 아이가 큰소리치고 논다. 조금도 굴하지 않는다. 승객들이 “야, 너 왜 이렇게 떠드냐? 가만히 있어라.” 그래도 너무 신나게 논다. 승객이 물었다. “네 아버지가 뭐하는 분이기에 이렇게 노냐?” 아이가 대답한다. “우리 아버지요? 우리 아버지가 이 기차를 끌고가는 기관사예요. 우리 아버지가 저 앞에 운전대를 잡고 운전하는 기관사예요.”
그렇다. 환상은 막연한 신비적 현상이 아니다. 보게 하므로 듣게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 특수 묵시다. 잠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고 하였다. 삶의 고비마다, 만 가지로 얽혀 있는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은 묵시를 통해 나를 방자히 행하지 않게 하시고 나를 지치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도록 그리고 사역을 잘 다듬질해 가도록 역사하신다.
기도향연축제, 이 기도 축제의 날은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묵시의 환상을 보고 그 메시지를 귀로 듣는 날이다. 성도들의 영혼이 살아서 움직이는 영혼의 대축제가 되고 주님과 교제한 기쁨이 파도처럼 충만한 한 주간이 되어 승리의 한 해를 만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