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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호목사/신앙생활의 안전불감증 (미 3:9-12)
오늘도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 가정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서로 축복해주실까요? “영혼이 깨어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 해 전에 전남지역의 한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교회가 순조롭게 잘 성장하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집사님 한 사람이 목사님에 대해 악한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해줬지만 집사님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목사님은 화가 나서 예배시간에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거짓말로 교회에 해를 끼치는 사람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정말 참소하던 집사님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목사님 심정이 어땠을까요? 교인들 앞에서 자기 권위가 세워졌다고 좋아했을까요, 아니면 자기가 심판을 선포했기 때문에 집사님이 죽은 것 같아 송구스러웠을까요? 목사님은 꼭 자기 때문에 집사님이 죽은 것 같아 몹시 마음이 아프고 송구스러웠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목사님이 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은 목사를 참소하고 교회에 해를 끼치는 사람을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이 사건으로 목사님의 권위도 높아지고 교회도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교회는 그 후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목사님에게나 교회에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마음은 아프고 슬픈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마음은 성도 중에 누구도 심판 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목사님이 참소하는 사람에게 심판을 선포한 것이 잘못입니까? 목사님이 그 사람을 미워했다면 그 점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말씀이 선포된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성도의 악행을 막기 위해 선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파수꾼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만 그 일로 사람을 미워했다면 그 점이 옳지 않은 것뿐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성도들이 악하게 사는 것을 보고 목사가 그렇게 살면 망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 목사가 악을 행한 성도들이 실제로 1년 내에 망해서 자기 말에 권위가 세워지는 것을 바라겠습니까, 아니면 10년, 20년이 지나도 성도들이 망하지 않고 회개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을 바라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악한 자에게 심판 내리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심판을 내리지 않고 그가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회개하도록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시지요. 요엘 2:13입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이 이러시다면 하나님의 종은 어때야겠습니까? 당연히 악을 행한 자들이 심판을 받지 않고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회개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그렇게 악을 행하면 무서운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해줘야 합니다. 사람은 연약해서 위협을 받아야 말을 더 잘 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성도에게 경고를 해줬는데 성도가 악을 행하다가 경고의 말씀대로 벌을 받으면 하나님 종의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다고 성도가 악을 행하는데도 경고가 성취되지 않으면 하나님 종의 권위가 떨어지고 성도들은 말을 더 듣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은 경고의 말씀이 성취되어도 난처하고 성취되지 않아도 난처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이 더욱 바라는 것은 성도가 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경고의 말씀을 전하는 목적도 성도들이 회개하여 망하지 않고 구원과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은 성도들에게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고 선포하지만 그 말씀이 빨리 성취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경고의 말씀이 성취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이 실없어 보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까지 실없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실없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심판은 임하지 않았지만 바로 그 경고의 말씀 덕분에 성도들이 회개하고 징계를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 예언은 결코 실없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주 무서운 심판의 말씀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하시더라.” 여기서 시온은 예루살렘 안에 있는 언덕이지만 그냥 예루살렘을 의미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세워주신 나라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모두 파멸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어 쓰레기더미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참 신이라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미가보다 약 150년 전에 북 이스라엘에서는 예후라는 장군이 왕이 된 후에 바알숭배를 없애려고 바알신당을 변소로 만들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바알이야 우상이니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지만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도자들이 죄를 지어서 그렇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은 백성을 착취했습니다. 미가 3:1-3입니다.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행동했습니다. 미가 3:5입니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그리고 3:11입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런 지도자들 때문에 나라와 성전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미가는 당시 지도자들의 죄를 놀라울 정도로 끔찍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가가 언제 이런 예언을 했는지 알면 더 놀라실 겁니다. 미가가 이 예언을 한 것은 히스기야왕 시대였습니다. 여러분 히스기야가 누구입니까? 열왕기하 18:3-6입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히스기야는 정말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다윗 다음으로 의로운 왕이라고 할만한 사람입니다.
미가는 이런 히스기야왕이 다스리던 시대의 정치권력자와 종교지도자를 이렇게 지독하게 꾸짖으며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지도자가 훌륭하고 공동체가 전반적으로 괜찮아도 그 안에는 얼마든지 악한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간지도자 중에 나쁜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정직해도 부하나 아들들이 얼마든지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누가 우리의 잘못을 지적할 때 쉽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정말 우리에게 그런 악이 있는지 살펴보며 고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설교시간에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저렇게 악하지 않은데 왜 저런 설교를 할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교회의 어떤 성도님은 좋은 신앙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볼 위험한 성도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판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미가의 예언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미가가 예언한지 100년이 지나도록 그가 예언한 심판은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미가의 예언은 실없는 소리입니까? 거짓 예언입니까? 아닙니다. 미가가 이렇게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유다는 구원의 기회를 두 번이나 받았던 것입니다.
미가의 예언은 오래도록 유다백성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미가의 예언이 있은 지 100년도 더 지나서 예레미야가 나타나 미가와 비슷한 예언을 했습니다. 성전이라고 안전한 게 아니라 백성이 악을 행하면 성전도 파멸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때 일부 사람들이 미가의 사건을 예로 들면서 예레미야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6:17-19입니다. “그러자 그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보십시오. 미가가 선포한 심판이 임하지 않은 것은 히스기야가 미가의 예언을 듣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미가가 전한 심판의 말씀 때문에 나라가 회개하여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이 히스기야가 의로운 왕이라고 하는데 그가 의로운 왕인 이유가 뭡니까? 아무 죄도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을 회개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미가의 무시무시한 심판의 예언은 히스기야와 백성이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예언 때문에 예레미야가 같은 예언을 하고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다시 한번 회개하고 구원받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시대의 왕들은 히스기야처럼 의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예언도 듣고 미가의 예언까지 상기할 수 있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심판을 받고 미가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미가의 예언은 두 가지로 역사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도록 도왔습니다. 둘째, 끝내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임하여 하나님은 악한 자들에게 정말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배워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판의 말씀을 주시는 것은 절대 실없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설교에서 경고의 말씀을 많이 들었지만 심판을 받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경고의 말씀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사랑의 하나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잘못된 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얼마나 심판의 말씀이 많습니까?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신 예수님도 심판을 선포하지 않으셨습니까? 누가복음 19:43-44입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으로 인함이라 하시니라.” 정말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40년 후에 이런 심판이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임하고 말았습니다.
또 마가복음 9:48-49입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지옥의 고통을 보여주며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하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회개하고 이런 심판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이천에서 끔찍한 사고를 겪었습니다. 사고의 원인이 뭡니까? 공사기간을 무리하게 단축하기 위해 동시에 진행해서는 안 될 작업을 한꺼번에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고가 날 때마다 나오는 말이 있지요. ‘안전불감증’ 이번 사고도 안전불감증 때문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전수칙을 웬만큼만 지켰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 사고뿐입니까? 서해페리호침몰, 성수대교붕괴, 삼풍백화점붕괴, 등 우리가 겪은 대부분의 참사가 안전불감증 때문에 일어난 것 아닙니까?
만일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누군가가 이러다가는 큰 참사가 일어날 것이고 회사는 완전히 망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를 했다면 그리고 그 말을 책임자들이 귀담아 들었다면 사고를 피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사회에 그런 경고의 말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또 그런 말을 한다고 누가 귀담아 듣습니까? 오히려 그 동안 늘 이렇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왜 그러느냐고 하며 바보로 취급하지 않습니까?
세상살이의 안전불감증도 문제지만 더 무서운 것은 신앙생활의 안전불감증입니다. 세상에서 사고가 나면 몸만 죽지만 신앙생활에 사고가 나면 영생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는 절대 안전불감증이 생기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에서 안전불감증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경고를 하시고도 벌을 안 내리실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고 처벌을 연기하시는데 우리는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안전불감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본문은 세상의 권력자가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도 약한 사람을 착취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교회의 지도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성전이 쓰레기더미가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도 교회를 섬길 때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우리 욕심만 부리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욕심에 빠져 교회 사역을 소홀히 하거나, 교회 일을 해도 명예욕이나 직분욕으로 하거나, 심지어 자기 사업의 이권을 위해서 하면 교회가 쓰레기더미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합니까? 오늘부터는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고 도와줘야겠다는 결심이 생깁니까? 오늘부터는 교회에서 내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교회를 섬겨야겠다는 결단이 생깁니까? 내가 오늘부터 삶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적인 안전불감증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상당히 위험한 상태입니다. 빨리 회개하고 신앙생활의 모습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참아주신 보람이 있어서 우리가 큰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꾸지 않으면 언제 징계가 임할지 모릅니다. 미가의 예언 후 100년 이상 징계가 임하지 않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니까 결국 심판이 임한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고쳐야겠다는 것이 생각나면 오늘부터 고치십시오. 오늘 생각이 났는데 고치지 않으면 다음에는 더 고치기 어렵습니다. 병을 치료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조기발견입니다. 이제는 아무리 어려운 병도 조기에 발견하면 거의 고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별 것 아닌 병도 심해진 다음에 오면 좀처럼 고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많은 환자들이 병이 생겨도 혼자 괜찮으려니 생각하며 병원에 오지 않고 한참 병을 키운 다음에 옵니다. 의사들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게 바로 환자가 늦게 오는 것 아닙니까?
영적인 병도 비슷합니다. 말씀을 듣고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나는 게 조기발견입니다. 이때 고치면 영혼이 빨리 낫고 주님의 축복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고쳐야한다는 생각이 나는데도 혼자 자기 사정에 맞춰 합리화하거나 남들도 다 그런다고 합리화하며 넘어가면 다음에는 말씀을 들어도 고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고질병이 되고 나중에 파멸까지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3장에서 이런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무화과나무가 3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주인이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동산지기가 주인에게 1년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합니다. 자기가 거름도 많이 주고 잘 보살필 테니까 1년만 더 기회를 줘서 이번에 열매를 맺으면 좋고 이번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버리자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지금 벌을 받지 않고 잘 지내는 것은 우리가 잘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참고 기다려주시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시며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미가를 통해 주시는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히스기야왕처럼 훌륭한 왕도 이런 무서운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했기에 망하지 않고 축복을 누렸습니다. 우리도 정말 영적 안전불감증에서 벗어나 주님의 경고를 진지하게 듣고 잘못된 신앙생활을 고쳐 세상에서 어려운 이웃을 사랑으로 돕고 교회에서 내 이권이나 내 명예를 위해 욕심 부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잘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세상에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잘 되도록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나 금방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십니다. 이것을 오해하여 영적 안전불감증에 빠지지 마시고 경고의 말씀을 들으면 회개하십시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며 교회에서도 욕심을 버리고 진실하게 섬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은혜를 받아 더욱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여러분 자신도 큰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