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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1: 16 거룩할 지어다. - 벧전 1: 20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벧전 1: 16 거룩할 지어다. -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 (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
'기록되었으되'(게그라프타이)는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사용되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베드로가 인용한 본문은 레위기에 기록된 말씀으로(레 11: 44. 19: 2. 20: 26)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말씀이다.
1]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께서 당신을 닮아가도록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이 말씀을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요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복음 안에 산다 할지라도 율법과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을 완성한 사랑의 원리를 따라 윤리적 삶을 영위해야 한다(Lenski, Stibbs).
거룩의 기본 개념은 분리이다. 즉 모든 죄된 것들로부터 분리된 상태가 거룩이다. 하나님은 이 같은 상태에 계시므로 온전히 거룩하시다.
오늘날 성도들이 거룩한 것은 하나님이 죄로부터 우리들을 분리시켜 자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온전한 거룩함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최대한 거룩해져야 한다. 타락한 세상과 불신자들의 죄된 상태로부터 분리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성령 안에서 살아가도록 힘쓸 때 우리는 거룩해질 수 있다.
벧전 1: 17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 -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
사람들은 겉모습으로 사람들을 평가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들이 되었으므로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 생활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이 산다.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다. 우리는 그 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불순종과 불결의 죄들만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하여 더러운 죄들을 버리고 의와 거룩과 선과 진실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판단)하시는 이(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외모로 보시지 않고'(아프로소폴렘프토스)는 '얼굴을 보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사파님'에서 유래하였다. 편견에 사로잡혀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편견이나 불공평에 빠지지 아니하시고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구약시대에서는 생소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다.
* 마 6: 9 -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눅 11: 2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보살피시는 분'
* 마 6: 32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재판장으로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치셨다.
* 눅 18: 1-7 - ①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②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③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④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⑥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⑦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베드로는 이러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리스도인을 보살피실 뿐만 아니라 공의로 판단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여 위로와 권면을 하고 있다.
2]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로 있을 때'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지내는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본향이 이 세상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세상은 영원한 삶을 영위하기 이전에 잠시 거쳐 지나가는 삶에 불과한 것이다(Stibbs).
그러므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할 것처럼 안일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하나님이 원하는 악에서 떠난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한다.
벧전 1: 18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 -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
모든 성도가 기본적으로 알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배로운 피를 흘려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救贖)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은과 금 같은 세상의 없어질 가치로 예수 그리스도의 핏 값을 계산하려고 한다. 핏 값은 은, 금으로는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다. 그것은 몇 억 원을 주고도 살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님, 즉 의로우신 하나님 아들의 보배로운 핏 값으로만 가능했다. 구원받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자가 되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생활을 해야 한다.
1] 너희가 알거니와
이에 해당하는 '에이도테스'는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인 신앙에 대해 언급할 때나(Hort) 표준이 되는 가르침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Kelly) 관용구이다. '에이도테스'가 사용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1) 사도의 교훈을 심화시켜 설명할 때.
* 롬 6: 9 -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 고후 5: 6 -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2) 앞에서 명령한 구절에 대한 설명이나 이유를 보충하고자 할 때이다.
* 고전 15: 58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 엡 6: 8-9 - ⑧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⑨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이 두 가지 중 본 절의 '에이도테스'는 후자의 경우이다. 왜냐하면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절)는 권면에 이어 계속해서 그 이유를 설명해 나가기 때문이다(Michaels,Blum).
2] 너희 조상이 물려 준(유전한) 헛(망령)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한) 것이 아니요
'망령된 행실'(테스 마타이아스 아나스트로페스)는 유대인의 생활양식을 가리키기보다는 이방인의 생활양식을 의미한다(Blum).
'망령된'(마타이아스)는 이방종교의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우상 숭배와 관련되어 사용된다
* 렘 2: 5 -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 렘 8: 19 -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 행 14: 15 –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 엡 4: 17 -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구속된 것'(엘뤼트로데테)는 고대 로마의 노예 제도에서 비롯된 용어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Blum, Selwyn).
(1) 돈을 지불하고 사다.
(2) 속박에서 해방시키다.
베드로는 본 절에서 수신자들이 구속받기 위해 치른 대가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금과 은'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힘으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구속사역이 완전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Lenski).
* 막 10: 45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러한 대가의 귀함과 완전함에 대한 베드로의 진술은 '값 없이' 구속함을 받았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상치되는 듯 보인다.
* 사 52: 3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그러나 비록 문자적인 의미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전하여 (1)과 (2)의 의미를 모두 강조하고 있지만 이사야는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는 태도로 (2)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Michaels).
벧전 1: 19 흠 없고 점 없는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
'어린양 같은'(호스 암누)는 세례 요한이 예수를 가리킬 때 이미 사용한 표현이다.
* 요 1: 29, 36 -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본문의 유래에 대해 혹자는 사 53장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Bigg).
왜냐하면 사 52장에서는 구속의 대가를 예수의 보혈과 비교하며 사 53장에서 예수와 어린양을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본 절에서 어린양의 피는 예수의 보혈로 비유되는 반면에 사 53장에는 어린양의 피가 없으며 심지어 침묵하는 어린양으로만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 53장은 예수의 고난을 나타내나 구속의 보혈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차라리 본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출 12장에 나타난 유월절 어린양과 대비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은 유월절 어린양이 지닌 구원과 해방에 대비된 예수의 사역을 시사하기 때문이다(Michaels).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어린양과 같이 죄와 허물이 없으신 유일한 분으로서 그의 구속은 보다 완전하고 귀한 것이다(Blum).
* 출 12: 46 -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 요 19: 36 -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 고전 5: 7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벧전 1: 20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
1]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알리신바 된 자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세전부터 예정된 분이시다. 그는 이 말세에 우리를 위해 나타내신바 되셨다.
이 말세는 신약시대를 가리킨다. 구약 4천년의 역사가 지나고 이제 마지막 시대가 온 것이다.
이 마지막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속(救贖)을 이루셨다.
2]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본 절은 전형적인 비교 구문인 '멘...데'( ... 한편 ... 또 다른 한편)로서 베드로는 이 구문을 통해 '창세 전'과 '말세'를 비교하여 네 가지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1)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창세 전'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진실하게 진행되었다(Michaels).
(2) 동사 시제에 있어서 '미리 알리신 바'(프로에그노스메누)는 완료 수동 분사로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에 대해 '미리 알리신' 내용이 완전했음을 시사하며, '나타내신 바'(파네로덴토스)는 부정 과거 수동 분사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이 단회적으로 완전했음을 시사한다(Lenski).
(3) 내용상 '창세 전'은 메시야의 신성과 사역을 나타내며
'말세'는 구속과 부활의 증거를 보여준다(Stibbs).
(4) '프로에그노스메누'와 '파네로텐토스' 모두 수동태 분사형으로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인간의 타락이나 죄악도 하나님의 계획을 파기시킬 수 없음을 시사한다(Micha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