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10: 14 거룩하게 된 자들을 - 히 10: 18 다시 죄를 위하여
히 10: 14 거룩하게 된 자들을 -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 절이10,12 절과 연관됨을 시사한다.
1] 그가(저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제물로'(미아 프로스포라)는 10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프로스포라스)와 12절의 '한 제사를 드리시고'(미안 프로세넹카스 뒤시안)와의 연관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 절의 강조점은 `미아프로스포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에 있다(Lane).
2]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제사의 영원한 결과를 시사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하게 된 자들'로 만드셨으며 완전케 하셨다(Peterson).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단지 외적인 면만이 깨끗케 된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양심까지 깨끗하여졌으며 동시에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Bruce).
온전하게 하셨다(테텔레오켄)는 완료시제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심과 의롭다 하심이 완전하였음을 증언한다. 물론, 이것은 법적 개념이다. 실제적으로는 아직 우리 속에 불결과 죄성이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거룩과 의를 얻은 자들이 되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하였다(롬 10: 4).
3] 율법과 복음(Law and Gospel)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 두 용어는 기독교 신학에서,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에 의해서 고취된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인(justification)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문자적 의미는 "기쁜 소식")을 믿는 신앙에 의한 의인을 대조했다.
바울이 율법에서 의미하는 것은 구약의 제사 의식과 도덕적 계명, 이방인에게까지 알려진 인간 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었다.
이 율법의 의도는 인간이 창조자를 감사한 마음으로 신뢰하게 하는 것과 세상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통하여 고심 중에 얻은 것은 인간이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를 의롭게 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아들 관계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졌던 율법은 교만과 자랑의 기초가 되었다. 바울이 복음을 이해하고 판단한 것은 인간은 율법의 외적인 행위의 수단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인간의 불용납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용납하신다는 것이었다.
신앙은 이 복음에 복종하는 것이고 또한 복종함으로써 인간은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완성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 특히 루터(1483-1546년)는 이러한 바울의 구별을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루터는 율법과 복음 사이의 구별이 "모든 기독교 교리의 개요를 포함한다."라고 말했다.
루터는 모세의 율법이나 자연법이나 산상설교에 나오는 "할지니라."라는 율법에서 인간 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전적 요구를 발견했다.
이러한 율법의 요구는 완전한 사랑이었다. 율법이 이러한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에 죄 많은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루터는 믿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의 죄를 악화시킬 뿐이며 인간을 하나님과 교제시키는 대신에 절망시킨다.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지만 죄를 치료하지는 못한다.
루터가 복음으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폭군이나 입법자(lawgiver)가 아닌 무한한 동정심을 가진 구세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메시지였다.
루터는 이렇게 생각하여 율법을 신앙의 적이라고 매우 비평적으로 말했다.
다른 한편 그는 율법의 내면적 의미를 사랑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또한 그것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전제하는 것을 알고 나서는 율법과 복음을 그렇게 날카롭게 대조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한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자주 말했고, 율법은 요구이며 복음은 은사이나 둘 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율법이 사람을 행위로 믿게 하는 것은 비난을 받으며 복음에 비추어서 해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루터는 때때로 율법을 시민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두 용법으로 구분했다. 율법의 시민적 용법은 사회가 평화와 질서를 위하여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규정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율법의 여적인 용법은 인간에게 죄 많음을 깨닫게 하여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붙잡도록 하는 것이다.
루터보다는 칼빈(1509-1564)은 율법의 적극적인 기능인 기독교인 생활의 안내를 더욱 강조하였으나 이것은 정도의 문제이지 종류의 문제는 아니었다.
히 10: 15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
1]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증언하시되'(마르튀레이)는 현재 시상으로 성령께서 다음에 언급되는 렘 31: 33-34의 예언 신탁을 현재 말씀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 렘 31: 33-34 -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러한 사실은 성령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새 언약을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서 실현시키셨으며, 새 언약의 약속이 현재의 그리스도인들과 상관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한다(Lane).
히 10: 16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
1] 주께서 이르시되(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그들과(저희와) 맺을(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렘 31: 31-34이 본문 외에 이미 8: 8-12에서 인용되었으나 8장의 인용은 옛 언약의 희생제사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반면에 본문의 인용은 그리스도인에게 미친 새 언약의 완전성을 강조한다(Bruce, Lane).
그래서 저자는 본문에서 렘 31: 31-34의 내용 중 31: 33-34만 선별하여 인용하고 있다. 저자는 이 선별된 본문의 인용을 통해서 새 언약의 두 가지 약속에 대해 언급한다.
2] 내 법을 그들의(저희) 마음에 두고 그들의(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이것은 새 언약 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더 이상 외적인 율법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며 율법을 이마나 팔에 기록할 필요가 없음을 시사한다.
* 출 13: 16 - 이것이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
* 신 6: 8 -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결단과 의지를 나타내며 내적인 생활을 가리키는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기 때문이다(Behm, Lane).
히 10: 17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
옛 언약 하에 있던 희생제사는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어서 반복해서 제사를 드릴 수 밖에 없었다.(3 절)
1]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새 언약 하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치 아니하시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죄를 기억치 아니하신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더 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는 영원한 제사임을 시사한다(Bruce, Lane).
히 10: 18 다시 죄를 위하여 -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삶은 구약의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성령의 법으로 산다.
성령의 법은 종의 법이 아니고 자유의 법이다. 성도는 자원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와 불법을 기억지도 않으신다.
1]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죄를 위해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완전하다. 이 구원 안에서 우리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고 천국의 영광을 확신한다.
앞서 인용된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는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인해 초래된 새로운 상황과 연결된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다시 기억치 않으신다는 사실은 더 이상의 속죄 제사가 필요하지 않음을 시사하며 동시에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드려진 희생 제사의 영원한 효력을 나타낸다(Peterson).
그 결과 새 언약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게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19-22절).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율법 제도로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짐승의 제물들이 사람들의 죄들을 없이하지는 못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단번에 속죄사역을 이루셨다.
주 예수께서는 인류의 참 구주로 오셨다.
그는 인류를 위해 참으로 좋은 일을 하셨고 율법이 예표한 참 형상이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다. 따라서 그를 믿는 자들은 법적으로 거룩함을 얻었고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
뿐만아니라, 그는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계속 중보 사역을 하신다.
셋째, 그러므로 다시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것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완전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그래서 주 안에 거하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
* 롬 8: 1-2 - ①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②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미사는 이 복된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단지 순종생활에 힘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