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강의 - 7강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민주주의란 국민이 주인 노릇을 하자는 ‘주의(ism)’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어울린다: 프랑스에서는 사회당이 정권을 잡은 적이 있다; 정권을 잡은 사회당은 당연히 정책 기조를 사회주의 쪽으로 바꾸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반민주 국가가 되었던 것인가? 사회당이 실각하고 나서야 프랑스는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된 것인가? 이 문제는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논하기로 하자.
정책이나 의사 결정 과정에서 국민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의견이 같을 수는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는 다수결의 원칙으로 한다. 가장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다수결은 투표로 들어난다. 국민투표에서 최고의 지지를 얻은 정당이 자신의 정강 정책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현실적으로 민주주의가 실행되는 모습이다. 다음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질문1] 흔히 교과서에서는 ‘민주주의에서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되, 소수의 의견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다수결이라는 원칙과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듯하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수결의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소수 의견을 무시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질문2] 북한도 스스로를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북한에서도 투표를 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절차를 거치고 있다. 지난 번 아시안 게임에서 보여준 김정일에 대한 존경심으로 보아 비밀 투표가 행해진다고 해도 현재의 체제가 유지될 가능성은 매우 높아보인다. 만약 북한에서 비밀 투표를 실시하여 현재와 같은 체제를 유지해나간다면 북한은 민주주의 사회라고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민주주의에서 다수결, 즉 여론의 향배를 결정하는 과정은 토론을 통해 이루어진다. 문제의 첫 번째 제시문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아무런 제한이나 금지 없이 순수하게 토론만을 통해 진리가 발전될 수 있다면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세 번째 제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유로운 토론만을 통해서는 여론이 잘 수렴되지도 않을뿐더러, 올바른 여론 수렴을 기대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교과서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중우정치(衆愚政治)’라고 표현한다. 어리석은 자들이 떼거지로 모여서 정치를 한다는 뜻이다.
사실 민주주의에 대해 ‘종우정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교과서의 설명에도 모순이 있어 보인다. 중우정치의 위험성이 있다면 다수결에 의해 수렴된 대중들의 이견에 따르지 말자는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결론ㅇ l나오더라도 대중의 의견에 따라 민주정치를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문제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두 번째 제시문에 있다, 두 번째 제시문에서는 일반 여론조사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여론조사를 보여주고 있다. 일반 여론조사와 달리 어떤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다양한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제에 대해 집중 토론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전문가들은 참가자들의 질문에 답을 해준다. 그리고 나서 심사숙고를 거친 후에 다시 설문을 받아보았더니 표와 같이 조사 결과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과정이 포함되면 여론 수렴이 보다 용이해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중들에게 필요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은 가운데 단순히 언론만으로 정치를 한다고 해서 민주주의라 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총칼로 위협하면서 특정한 방향으로 투표를 하게 한다면 민주주의가 아님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국민들의 자발적인 의견을 수렴한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수렴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가 주어지지 않은 무지(無知)의 상태에서 행한 행위는 강제적인 행위와 유사한 부류에 속한다.
강제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그 강제성의 강도에 따라 책임이 면제된다. 예를 들어, 한 친구가 당신이 아끼던 자전거를 훔쳐갔다고 하자. 당신은 물론 그 친구에게 화를 내면서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가 자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을 아주 싫어하는 폭력배의 위협(“자전거를 훔쳐오지 않으면 죽이겠다.”)에 못이겨 그렇게 했다면 그 친구들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전과 같겠는가 달라지겠는가? 그 친구에게 전과 같이 화가 나지 않을 것임은 물론, 보상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책임을 면해주는 것이다.
무지의 상태에서 행한 행위의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단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사례는 어린아이들에게 형사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다. 좀 심한 비유일 수 있겠지만, 이는 정신병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것과 같다. 좀더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보자. 어떤 도둑이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 주인이 없는 금은방에 들어가서 보석을 가져다주면 막대사탕을 하나 주겠노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그 아이는 보석을 가져다 준다. 이후 경찰에 잡힌 도둑은 그것을 자신이 훔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 아이가 자발적으로 가져다준 것을 받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도둑의 말은 논리적으로 타당한가?
강제 상태에서 행위하는 행위자는 ‘의도’를 가진 정상적인 인간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도구에 해당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저상적인 행위자이기 위해서는 주어진 행동 이외의 다른 선택지가 존재해야 한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경우,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차라리 생명을 포기하지 그랬느냐고 비난하는 것도 합당치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물건과 같은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설사 여론에 의해 정치를 했다고 하더라도, 대중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강제에 의한 정치와 다름이 없다. 어쩌면 총칼에 의한 독재보다도 더 교묘한 독재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제시문에서는 그러한 정부 제공의 역할을 전문가들이 하고 있다. 여론 결정의 참가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함으로써 ‘자발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제시문의 모델을 사회 전체로 확장 시킬 경우, ‘전문가’ 의 역할은 누가 담당하는가? 학자, 시민 단체, 지식인 등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줄 가장 중요한 장치는 역시 언론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언론의 자유가 필수적인 이유는 자발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더 제기할 수 있다. 전문가는 지식의 양과 질에서 대중을 압도한다. 전문가는 마음만 먹으면 정보를 조작하거나 편향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여론의 향배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는가? 사려깊은 사람이라면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 문제도 제시문에서 해결되어 있다. 제시문에서는 ‘다양한’ 전문가들이 참가자들의 질문에 대답해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견해를 가진 전문가들이 정보를 제공할 경우, 전문간들 안에서도 이견이 있기 마련이다. 질문자에게 조작되거나 편향된 정보가 주어질 경우, 반대편 의견을 가진 전문가는 즉시 반론을 제기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 줄 수 있는 다른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정보는 전문가들에게서 나오지만 궁극적인 판단은 대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모델을 다시 한 번 사회 전체로 확대해본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자유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언론의 다양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나라처럼 편향된 특정 시각을 가진 신문사들이 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할 경우 그 폐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과거 한 보수 언론사의 사증은 스스로를 ‘밤의 대통령’이라고 칭하면서, “낮의 대통령은 유한하지만 밤의 대통령은 영원하다.”고 말했다고 할 정도다.
북한을 민주주의 사회라고 부르기 힘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북한에서도 분명 투표를 통해 여론을 수렴한다. 그러나 북한 사회는 철저하게 정보가 통제된 사회다. 만약 서방의 언론에 보도되는 권력층의 비리가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러한 비리가 북한 주민들에게도 알려진다면, 지금과 같은 국가와 권력에 대한 충성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두 번째 제시문에 나온 것과 같은 형태의 여론 조사를 국내의 한 방송사에서 토론 프로그램에 적용한 적이 있다. 특정 주제에 대해 찬성 10명, 반대10명, 중립80명으로 구성된 100명의 관중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전문가들이 양편으로 나뉘어 참가한다. 토론 시작 전에 먼저 그 주제에 대한 참가자들의 의견을 조사한다. 그리고 나서 전문가들 간에 토론을 벌인다. 토론 중간에 참석자들에게 질문의 기회가 주어진다. 토론과 질문 시간이 끝나고 나면 다시 한 번 투표를 통해 의견을 조사한다.
방송에서는 시간의 제약으로 인해 여론 수렴의 정도가 제시문에서 처럼 확연하기 드러나지않는 경우도 적지않다. 그러나 일부 사안들에 대해서는 뚜렷한 여론 향배의 변화가 드러남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의사 결정에서 정보의 중요성을 실감케 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 제시문에서 제기된 두 가지 문제 중 여론 수렴과 관련된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가지 문제, 즉 올바른 여론이 수렴되지 않는다는 문제는 어찌 되는가? 이 문제는 제시문 자체에서 답이 주어지지 않는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있어야만 설명 가능한 부분이다.
민주주의에서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앞에서 공부한 바 있듯이, 그러한 진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그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만약 모든 사람이 절대적인 진리를 알 수 있다면 현실적으로 의견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절대적 진리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부 극소수만 그 진리를 알 수 있으며, 거기에는 물론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고 주장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극소수만 진리를 알 수 있다면 대중의 의견을 수렴할 필요는 없어진다. 대중들의 의견을 수렴하더라도 극소수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결론이 나올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경멸했다. 자비의 원칙에 의거해서 볼 때, 독재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마도 대중이란 어리석은 결론을 내기 마련이라는 생각 아래에서 독재 정치를 했을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을 원칙으로 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이미 절대적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상대적인 의견을 갖는 사람들만 존재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상대적인 의견들을 비교할 수 있다. 서로의 의견을 공개하고 평가해봄으로써 가장 설득력 있는 의견을 결정한다. 기준이 ‘설득력’이므로, 그 결정 방법은 당연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는가에 있다.
필요한 정보가 주어진 상태에서 다수의 결정에 의해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로 인정받으면, 그보다 설득력 있는 새로운 견해가 나오기까지 그 견해는 잠정적인 진리로 인정받는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정신이다, 다수결에 패배한 소수는 더욱 설득력 있는 의견을 준비해서 다시 한 번 도전할 기회를 엿본다. 그들에게 기회는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자신들의 견해가 더욱 설득력 있다고 여겨지는 자는 누구나 공개적으로 그것을 발표할 기회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첫댓글 기모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