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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호갱 입구
▶ 2호 갱 전경
2호 갱으로 간다. 2호 갱은 1976년 4월, 1호 갱 동북쪽 2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길이 96m, 폭 84m에 약 6,000㎡의 면적이라 한다. 2호 갱도 완전히 발굴이 완료되지 않았으며 부분적으로 발굴되고 있다고 한다. 갱도가 1호 갱이 정방형인데 비해 2호 갱은 L자 형이다.
▶ 2호 갱 당초의 지붕
▶ 부숴진 유물들
▶ 2호 갱 토용
▶ 2호 갱 군사 배치를 알수 있는 모습
▶ 진나라 군의 머리 모습
▶ 2호 갱에서 발굴된 병기
병사가 도열해 있는 1호 갱과 달리 2호 갱은 궁노병, 기마병, 전차병이 포진하고 있어, 진시황의 지원부대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선 89대의 목제 전차와 이를 끄는 마용 356건, 기병용 116건, 안마 116건, 보병용 2000건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 갑옷 채색이 선명하다
▶ 활 쏘는 병사 토용
▶ 말과 마부 토용
기병들 보다 마용들은 그 느낌이 더 리얼하고 곡선형태의 말 뒤태가 마치 살아 있는 듯하다.
▶ 3호 갱 입구
▶ 3호 갱 전경
3호 갱은 2호 갱 서쪽에 있다. 3호 갱은 1호 갱과 비교하면 무척 작은 규모다. 물론, 이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유물이고 대단한 것이지만, 1호 갱의 엄청난 규모의 도용을 보고 나니 조금 실망스럽다.
▶ 스카프를 두른 도용
▶ 빨간 스카프를 두른 중국 소학교 학생들
도용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목에 스카프를 두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도 중국 어린 학생들은 목에 빨간 스카프 두르기를 좋아한다. 이 스카프가 유니폼처럼 단합을 도모하고 일체감을 주어 체제를 하나의 목적으로 끌고 가는 아주 단순하며 효과적인 방법이긴 하다. 저런 모습은 중국에서 옛날부터 군사들이 했던 모습이다. 중원을 두고 혈투를 벌일 때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 목에 두른 스카프의 색깔이 아닐까? 군복이 나라마다 다르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당시는 그런 구분이 어려웠을 것이다. 장수를 따라 많은 군사가 이동할 때야 장수 이름과 나라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들었지만, 백병전이 벌어지면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 갑옷을 입은 도용
3호 갱에는 모두 68개의 도용이 있는데 진나라 군의 지휘부로 모두 갑옷을 입고 있어 장수로 보인다.
▶ 머리가 잘린 도용
머리 부분이 없는 이유는 머리가 잘렸기 때문이 아닐까? 진시황이 죽은 후에는 진시황의 변태적이고 폭압적인 정책에 대한 반발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정국이 아주 시끄러웠다. 진시황의 아방궁과 흉노를 막는다고 만든 만리장성, 남동방향의 광동과 광서지역 그리고 베트남 북부 일부까지 정복한다고 일으킨 전쟁 등등 대규모 전쟁과 공사는 모든 민초의 땀과 피와 원망으로 민초들이 봉기하는 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전국이 어수선해지면서 지방에 소영웅들이 준동하기 시작해 결국, 진시황 사후 4년 만에 항우와 유방의 연합군에 진나라는 망하고 유방은 이곳 장안에 새로운 나라를 열게 된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면 구세력의 기운을 모두 제거해야 하기에 아방궁에 불을 지르고 병마용 3호 갱 장수들의 목을 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병마용은 진시황릉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전투태세를 갖춘 체 동쪽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북서쪽은 진령산맥이 있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자연 지형지물이 방어해 주지만 동쪽과 남쪽은 물산이 풍부하고 너른 평야 지대라 곡식도 풍족한 지역이라 진시황이 동쪽을 무척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 3호 갱 도용
오늘도 병마는 진시황의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대기 중이다. 제일 앞쪽으로는 갑옷을 입지 않은 경무장 부대가 신속히 움직일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고 그 뒤를 갑옷으로 중무장한 부대가 배치되어 있다. 호위 부대는 양쪽 측면에 대기 중입니다. 가만히 병마의 얼굴을 바라보면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보인다, 모두의 모습이 달라 千人千面이라고 해야 하나?
▶ 무플을 꿇고 활을 쏘는 병사 도용
무릎을 꿇고 앉은 궁수가 보이고 장수는 투구를 썼고 일반 병사는 상투를 튼 모습이다.
▶ 도용 만드는 과정 설명도
도용을 만들 때 거푸집을 이용했을 것이고 거푸집에서 나온 도용은 장인의 손에 의해 다듬어지며 모두 다른 모습으로 변했을 것이다. 장인들은 자신이 만든 도용에 모두 이름이나 사인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장인은 모두 87명에 이른다고 한다. 물론, 한 명의 장인 아래 여러 명의 보조를 두어 여러 해 동안 만들었을 것이다. 만드는 순서는 먼저 도용이 조각된 거푸집 안에 진흙을 넣어 내부를 손으로 다지고 막대기로 두드려 단단히 붙인 다음 속의 흙을 손으로 긁어내고 하루를 둔 후 거푸집에서 분리한다. 이렇게 분리된 도용을 장인이 일일이 손으로 형태를 정밀하게 만들어가며 표정을 다르게 만들었기 때문에 같은 틀에서 찍어냈을지라도 그 모습이 새로운 도용으로 만들어진다. 이렇게 몸체가 완성되면 두 개의 앞뒤 조각 붙이고 다리와 머리를 만들어 합체해 하나의 토용이 완성되면 그 후 그늘에서 말린 후 7박 8일을 굽는데 도용 하나를 만들려면 한 달 정도 걸리니 여러 사람이 하나의 장인 아래 서로 분담해 동시에 여러 개의 도용을 만들 수 있었다. 그 후 도용에 채색하면 흙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용은 마지막으로 발밑에 고정장치를 한 사각형의 바닥 틀에 올려 이곳으로 운반되어 각자 자기 소속에 따라 배열된 것이다. 그 다음 고랑 사이의 담장 위로 가로막대를 올리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누각을 위로 올렸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니 오후 1시 반이 넘었다. 이곳에 10시경에 들어 왔으니 세 시간 반 동안 병마용 구경에 빠져 걸어 다닌 셈이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기에 박물관 한쪽 벤치에서 싸 가지고 간 도시락으로 허기를 때우며 휴식을 취한다.
박물관을 나와 출구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진나라 황제의 마차 모양을 만들어 놓고 사진 찍는 것으로 돈을 받고 있다. 이런 저런 모습도 눈에 띄지만 여기서 머뭇거리다간 오늘 화청지 관람을 못할 것 같아 서둘러 매표소 옆 셔틀버스 승차장으로 향한다.
▶ 병바용박물관과 진시황릉을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
진시황릉 병마용박물관에서 진시황릉을 오가는 셔틀버스는 병마용 통표를 보여주면 무료로 20분마다 운행한다. 병마용 정류장에서 진시황릉까지는 약 1.5km로 셔틀버스를 타면 10분 정도 걸려 진시황릉 입구에 내려 준다.
▶ 대낮인데도 황사때문에 해가 안보인다.
오후 2시인데도 하늘은 황사로 해가 보이지 않는다. 동탁이 죽던 날도 해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동탁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하늘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똑똑해야 하는데 동탁은 그게 자신의 황제 등극을 축하하는지 알았다고 한다. 공명도 남만 정벌에 나섰다가 짙은 황사로 전투까지 멈추었다고 하고 지난봄 중국여행도 황사와 짙은 연무로 이를 피해 여행지를 변경해야 했었는데 중국의 이런 자연현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닌가 보다.
진시황릉은 시안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여산(騹山)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병마용 발굴 당시 얼굴과 갑옷 등이 모두 채색이 시간이 흐르면서 모두 지금과 같은 흙빛으로 변질되었던 병마용에서의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첨단 기술을 개발할 때까지 발굴작업을 미루고 있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려 입구에서 입장권 검사를 한 다음 길을 따라 올라가면 숲이 무성한 동산이 보이는데 이 산이 바로 진시황릉이다. 진시황릉은 전에는 여산원(驪山園)이라고 불렀다고 안내판에 나와 있다.
▶ 진시황릉 축조과정을 새긴 부조벽
▶ 진시황릉의 세계문화유산 표식
진시황릉은 처음 조성 당시엔 100m의 낮은 산이었으나 2000년의 풍상에 지금은 47m로 낮아졌는데 아래 부분이 485m × 515m이고, 진시황릉 내성(內城)은 둘레가 2,525m, 외성(外城)은 6,264m에 달해 묘지 면적이 22만㎡, 총 능원 면적은 무려 218만㎡로 지하에 대규모의 궁전 누각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진시황릉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도 규모가 훨씬 크다고 하며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입구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큰 바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 진시황 초상화
진시황은 무덤만 제일 큰 게 아니라 그가 짧은 시간 이룬 업적 또한 대단하다. 영정이라는 이름의 진시황은 처음으로 왕의 칭호를 황제로 칭했다 하고 그의 친 아비는 이화접목이라는 이야기가 있는 여불위라는 말도 있고 아무튼 무척 이야기가 많은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춘추시대 100여 개의 나라에서 전국시대로 접어들며 한, 위, 조, 제와 진, 초, 연나라의 7개국으로 교통정리가 되며 이들 7개국을 전국 7웅이라 불렀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 합종연횡이 생겼고 서로가 복잡하게 얽혀갈 때 이를 한 번에 끝낸 사람이 영정 진시황이다.
▶ 좌로에서 우로 여불위, 조희, 장양왕 자초
영정의 성격으로 보아 그의 아비라는 자초보다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해 큰돈을 벌고 나라를 세우는 데 투자를 한 여불위가 장양왕인 자초보다 더 잘 어울린다. 여불위와 자초의 만남은 진시황이 태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볼모 처지였던 진시황의 아버지가 어떻게 다시 화려한 복귀를 했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다. 여불위는 하남지방에 이름난 거상으로 어느 날 한단에 애첩을 만나려고 들렸다 우연히 자초를 만난다. 자초는 진나라 공자로 진나라에 볼모로 와 있었다. 그땐 여러 나라가 서로 침략하지 말자는 의미로 왕자 하나씩 상대국에 머물러 살게 했는데 사실상 볼모인 셈이다. 만약, 전쟁이 나면 바로 죽고 전쟁이 없다면 그냥 거기서 살다 죽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방의 나라에 볼모로 간 왕자는 대권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왕자다. 이렇게 두 사내는 운명적으로 만나 여불위는 자초에 올인하고 그의 재산 모두를 자초에 투자한다. 단, 나중에 왕위에 오르면 나라를 반으로 나누기로 하고. 사실, 자초는 한 일이 하나도 없다. 여불위는 진나라 실세 화양부인을 "色衰而愛弛(색쇠이애이)"라는 말로 구워삶고 자기가 사랑했던 애첩 조희까지 자초에게 넘겨주며 자초 키우기에 열정을 다 바쳐 드디어 화양부인의 양아들이 되어 진나라로 돌아가자 화양부인의 남편인 안국군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남으로 나머지 20여 명의 공자가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보위에 오르는 행운을 누려 얼떨결에 왕위에 오르니 이가 진시황의 아비인 장양 왕이다. 여불위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승상이 되고 문신후에 봉하며 낙양 10만 호를 식읍으로 하사한다. 사실, 나라를 반으로 나누기로 하고 시작했기에 이 정도는 많은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자초인 장양왕은 즉위 3년 만에 죽자 장양왕의 씨인지 여불위의 씨인지 확실하지 않은 조희의 아들 영정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기원전 246년 보위에 오른다. 어린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올랐기에 국정의 운영은 재상인 여불위와 그의 정인이던 조희가 주무른다. 장양왕이 죽었을 때 조희의 나이가 여자로는 황금기인 30살 밖에 안 되었는데 서른 살 황태후가 과부로 산다는 일은 본인에게도 국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정은 여불위를 상국으로 삼고 중부(仲父 : 작은아버지)라 부른다. 이때 여불위 집에 하인만 만 명에, 불러 모은 빈객만 3천 명이라니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여불위도 영정이 나이가 들어가며 어른이 되니 예전만 못하고 조희와 관계는 계속되는데 조희의 음욕을 이기지 못한 여불위는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조희 아니 황태후에게 노애를 보낸다. 황태후의 사랑과 보호로 드디어 노애는 장신후라는 벼슬에 오르고 사람들은 노애와 여불위의 가세에 대해 비교하기 시작하자 환관들에 의해 세상에 비밀이 하나씩 벗겨지며 노애는 삼족을 멸하고 어머니인 조희는 옹 땅으로 추방되고 여불위는 상국 자리에서 쫓겨나 하남 땅으로 보내진다. 1년 후 여불위 주변엔 또 많은 빈객과 풍류객이 모이자 시황제는 변란이라도 일어날까 불안해 여불위에게 친서를 보낸다. "그대는 진나라에 무슨 공이 있기에 하남의 10만 호의 식읍을 갖고 있는가? 그대는 진나라와 무슨 친척 관계가 있기에 중부라는 호칭을 얻었는가? 그대는 가족을 데리고 촉 땅으로 떠나라!" 당시 편지를 받은 여불위는 시황제의 칼날이 점점 자신의 목을 향하여 들어오는 걸 느끼고 처형당할 것이 두려워 독주를 마시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색쇠이애이(色衰而愛弛)는 '아름다운 용모로 총애를 받는 사람은 용모가 쇠잔해지면 총애도 시든다.'라는 말이다. 여불위가 화양부인에게 한 말이지만 마찬가지로 권력도 실체가 무상하여 구름과 바람 같은 것이 아닐까? 여불위는 자신이 자초를 장양왕을 만들고 그 아들인 영정을 진시황으로 만들어 권력의 중심에서 한 시대를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아왔지만, 나이가 들어 쇠잔해지며 권력의 끝자락을 놓고 마지막 남은 생명의 끈마저 스스로 놓게 된다. 두 명의 왕을 모시고 전국 칠웅의 막바지에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진나라에서 여불위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승상과 중부로서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권력을 휘둘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권력도 쇠잔해지며 세상의 티끌로 돌아간다.
아마도 여불위는 역사상 최고의 장사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런 장사꾼이 있었기에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룬 진시황이 태어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진시황의 힘은 바로 여불위의 힘이다. 어쨌든 여불위는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그는 많은 재산을 한 사람에게 모두 투자를 한 세기의 도박꾼이자 선견지명이 있는 전형적인 벤처 정신이 투철한 장사꾼이다.
▶ 진시황이 최초로 축조한 만리장성
▶ 화폐와 문자의 통일
진시황은 살아생전 주술사를 자주 찾고 불로초라는 허황한 꿈을 찾아다녔고 분서갱유 등 참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그가 한 일 중에는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하기 위한 일이라든지 문자의 통일, 화폐의 통일, 도로 운하 등 엄청난 일을 짧은 시간에 해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중원에 수많은 나라를 통일한 최초의 중앙집권 국가라는 점이 아닐까? 그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친 아버지일지 모르는 여불위를 제거한 일이지만 그 후 등용한 이사를 승상에 올리며 당시 합종연횡을 하며 주변 국가를 하나씩 정리하며 그의 꿈을 이루어 간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중국을 6국을 통일하여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秦)나라를 세우고 황제란 이름을 사용한 중국 최초의 황제로 13세 때(247년)에 즉위하였고,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등 세 차례의 동방순례 중 산동성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지 37년 만에 병을 얻어 죽는다. 그런데 도읍인 시안까지 그의 시신을 옮기면서 아무에게도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감춘 채 돌아온다.
▶ 진시황릉
진시황릉은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고 36년간 공사하여 만든 곳으로 수은의 바다라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 진시황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아주 깊은 지하까지 파고 들어가 청동으로 바닥을 깔고 그 위에 시황의 관을 안치했으며 궁전, 누각, 집무실의 본을 만들고 멋진 그릇, 값진 석재, 진귀한 물건들로 묘 내부를 가득 채웠다. 기술자들은 도굴을 위해 침입자가 나타나면 석궁이 저절로 발사되도록 장치했고 무덤이 훼손되면 황하, 양자강 심지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까지 수은이 흐르고 순환되도록 장치했다. 반짝이는 진주로 성좌(星座)를 설치하고 금과 은으로 새를 만들고 옥을 쪼아 소나무를 만들었다. 마차는 바닥에 진열했다. 등불은 고래 기름을 연료로 사용하여 영원히 탈 수 있게 하였다."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사마천은 진시황이 죽은 지 100년도 지나지 않아 살았던 사람으로 어느 정도는 믿음이 가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백년도 살지 못하면서 천년을 살 것처럼 야망과 이상을 지닌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무덤은 우주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생전에 살았던 아방궁보다 더 화려한 지하궁전을 만들어 수은 속에 누워 있다고 한다. 주변을 둘러싼 병마용의 규모만 보더라도 대단하다. 기극비란봉소서(枳棘非鸞鳳所捿)라는 말이 있다. 탱자나무와 가시덤불 속에는 봉황이 살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가 진시황을 봉황이라 했지만, 진시황이 누워있는 수은의 바다는 봉황이 누워있을 곳이 아니고 그곳은 딱 참새가 사는 곳으로 보인다. 마작애상봉황(麻雀愛上鳳凰)이라고 참새도 오래도록 그곳에 누워 있으면 봉황이 되려나?
▶ 조고에게 살해 당하는 호해 벽화
진나라는 여불위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사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결국, 조고에 의해 망한다. 위대한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였던 진나라를 세우고 망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15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한 아방궁도 모래 위에 짓는다면 사상누각인가 보다. 천하를 얻기 위해 영웅으로 행세했지만, 천하가 원치 않은 영웅은 무늬만 영웅이었나 보다. 천하를 손아귀에 넣었다 생각한 사내는 겨우 49살의 나이로 순행 길에서 숨을 거둔다. 고고하게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던 그의 꿈은 못난 아들 때문에 사상누각처럼 허물어져 천 년의 꿈이 겨우 15년 만에 개꿈이 되고 말았다. 천 년 이상 살기를 꿈꾸며 불로초나 탐했던 진시황 영정도 50살도 채우지 못하고 눈을 감으며 그게 탐욕이라는 것을 알기는 했을까?
▶ 지록위마 벽화
누군가 천하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진나라의 적은 호(胡)라고 진시황에게 고하자 진시황은 胡를 오랑캐라고 생각하고 북쪽에 드문드문 남아있는 만리장성을 축조하지만 그가 오랑캐라고 말했던 胡는 오랑캐가 아니라 자기 아들 영호해(嬴胡亥)였던 것이다. 대업을 이어받아 천하를 물려주었지만, 지록위마(指鹿爲馬)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못난 아들을 두었으니 누굴 원망하랴!
▶ 진시황제를 비석
벚꽃과 복숭아꽃이 만개한 진시황릉 제단에는 넓은 잔디 광장에 진시황제릉이란 비석만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발굴 공개한 배장 묘<펌>
진시황제의 릉 주변에는 배장 묘들이 산재해 있다. 진귀한 금수(禽獸) 갱, 순장 마(馬) 도용마 갱, 진시황 자녀 묘, 진시황릉 조성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묘(진시황릉에서 서남쪽 1.5km 떨어져 있음) 등이 있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 배장 묘를 구경하지 못했지만 최근에 새로 발굴한 배장 묘가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고 하는데 배장 묘 내부에는 도용과 순장한 말들의 뼈인 마골(馬骨), 청동고리, 동전, 도자기 등이 있다고 한다.
주마간산격으로 한 바퀴 휙 둘러보고 나왔는데도 벌써 오후 3시 15분이다. 셔틀버스를 타고 병마용 입구까지 와 시내버스로 갈아타고(1人/4原) 화청지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