澗松堂文集
艮齋先生文集 (古枕 810.819 이223?) (古西 810.819 이223?)
李德弘 (1541∼1596) ; 字 宏仲, 號 艮齋, 本貫 永川.
木板本(重刊).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英祖41(1766)重刊序.
7卷.年譜.4冊 : 年譜 ; 30.7x20cm.
四周雙邊. 半匡 ; 19.4x14.6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덕홍의 시문집이다. 이덕홍은 습독(習讀) 현우(賢佑)의 아들이며 노운(蘆雲:李福弘)의 아우로 안동 예안에 살았다. 선생은 용모가 단중(端重)하고 성질이 온유하며 이미 10여 세 때 퇴계 선생에게서 수업하였다. 퇴계 선생이 궁리(窮理)의 묘를 시험하기 위하여 "혼천의(渾天儀), 선기옥형(璿璣玉衡)을 만들라" 명하시니 곧 조작(造作)함에 선생이 매우 칭찬하며 아들같이 사랑하시고 이름과 재호(齋號)를 지어 주었으며 이덕홍도 퇴계 선생을 아버지처럼 섬기며 선생의 동정(動靜)과 언어를 일일이 살펴 기록하여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이라 하고 종신토록 본받으려 했다. 선생은 저서가 많았으나 모두 퇴계 선생에게 질의하였고 남치리(南致利)와는 역학(易學)을 논의(論疑)했고 권우(權宇)와는 성리학을 토론했다. 1578(선조 11)년에 추천으로 집경전(集景殿) 참봉에 제수되어 종묘서(宗廟署) 직장(直長),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위솔에 승진되었다. 임진왜란 때 성천(成川)까지 세자의 가마를 따라갔고 1593년에 노모를 봉양하도록 영춘현감(永春縣監)에 제수되어 난민구휼에 열심하였다. 1594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이듬해 봄에 여막에서 졸하였다. 후에 호종로(扈從勞)로서 이조참판에 증직이 내렸고 향인들이 사당을 세워 춘추향사를 치른다. 저서로는 《논어주석(論語注釋)》·《중용주석(中庸注釋)》·《심경주석(心經注釋)》·《고문전후집주석(古文前後集注釋)》·《가례주석(家禮注釋)》·《자의록(自疑錄)》 등이 있다.
이 문집은 1660(현종 7)년 외증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54년, 1766년에 중간되었다. 【枕澗亭文庫】수장본은 본집 7권 4책이며 중간본이다. 부(賦)는 음양이 상호 근원이 되는 원리를 읊은 것이고, 시(詩)·서(書)는 모두 심오한 철학을 지닌 학술적인 내용이 많다. 소(疏) 가운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해에 세자가 있던 용강산성에 가서 왜적에 대한 방어책을 건의한 글로서 민심의 수습 및 애국심을 고취시킬 것과 구체적인 전술로서 바다에서는 거북선을 사용하고 육지에서는 구갑차(龜甲車)의 활용과 학익진(鶴翼陣)을 응용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상행재소(上行在疏)」는 1593년 선조에게 올린 것으로서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방법을 논술하였다. 서(書)의 문목은 모두 이황에게 올린 것으로 사서삼경, 심경, 근사록 등의 저서에 대한 질의와 유학 전반에 걸친 갖가지 문제들을 깊이 있게 논의한 글이다.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은 스승인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요체가 되는 것을 16개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한 것으로 이황의 학문과 수양은 물론 그의 스승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잡저는 학문의 정도와 윤리적인 생활태도의 근간에 대한 그의 신념을 논리 정연하게 설파한 글이다. 그 가운데 「진청란학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通辨心圖說辨)」은 진청란(陳淸瀾)의 심도(心圖)가 나정암(羅整菴)의 곤지기(困知記)의 영향을 받아 도심(道心)을 체(體), 인심(人心)을 용(用)이라 한 것에 대하여 주자 및 여러 선유들의 학설을 빌어 논박을 가한 것으로서 그의 해박한 지식과 학문적 깊이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심경질의(心經質疑)》는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의 하나로서 그 뛰어난 해설과 정연한 논지로 후인들이 다투어 필사하였으며 경연(經筵)의 강의 제목으로 채택되었다.
序 ; 李光庭.
重刊序 ; 鄭忠彦.
目錄.
卷之 1. 賦 ; 陰陽互根賦, 剝復賦.
詩 ; 四月旣望培退溪先生泛月濯纓潭(2首), 敬次退溪先生韻(附原韻), 詠懷, 淸凉蓮臺寺次退溪先生韻以示諸丈(附原韻), 迂溪精舍, 觀省齋, 觀書軒, 驗爲寮, 活潑臺, 君子塘, 迂溪揷景, 鶴巖, 釣磯, 庭梅, 溪柳, 詠滯洞, 尋春(附次韻), 與金彦遇金愼仲金士誠讀延平書, 與白文世朴士誠棲淸凉山, 座普賢庵, 次白文世韻, 次李逢原韻, 謝白文世來訪, 蓮臺月夜偶吟, 遊祝融峯(2首), 山城, 秋夜次退溪先生韻, 送金鶴峯赴湖南(2首), 與金景仁棲月?感興五絶, 讀啓蒙(2首), 次具汝膺龍山四律, 輓退溪先生, 見金景仁作(2首), 次呈雪月主人金敦?, 贈朴居中, 次南義仲韻(2首), 呈南義仲(2首)(附次韻), 次南義仲用金道盛韻寄示(2首)(附原韻), 追次退溪先生登紫霞峯所寄韻(附原韻), 次金後凋彦遇惠韻又得三絶兼呈(3首), 易東夜吟(2首), 陶山述懷, 陶山懷古(2首), 遊城山精舍敬次先師韻呈主人權章仲, 權定甫以書論學旣報而又述其未盡之義得八絶又得二絶幷呈, 李君美去甲子冬移居遠巖先師與門下詩以餞之(2首), 次金希仲陶山見盆梅有感, 詠菊, 秋日齋居, 次呈金鶴峯尹採蓮權伊溪三同人(6首), 次權松巢十五絶, 次柳德源鳴蟬韻(3首), 讀啓蒙有感, 與柳西厓見同舟漢江次西厓韻(2首)(附原韻), 在洛寄權定甫, 絶句嘲李搭彦, 絶句(4首), 贈別(3首), 次金道盛운(2首), 又次金道盛韻.
卷之 2. 詩 ; 月城, 佛國寺, 小蓬萊, 次晦齋先生小蓬萊韻, 利見臺, 烏川憶鄭文忠公, 甘浦喜日晴次先師明字韻, 與姜丈浩源洞遊過茸長野, 合四地名與姜丈集句, 八磻高洞(2首), 次姜松巖韻(3首), 通度寺, 長川, 彦陽官閣, 八谷茅亭今次從叔梅巖公韻(2首), 次呈柳西厓, 次任卓爾韻, 自道, 言學, 次寄李希淸, 送長兒蒔從李希淸學(2首), 獨坐寒齋(2首), 喜晴, 客懷, 次金止叔韻, 贈許美叔(2首), 送許美叔謫行(2首), 與趙月川遊道峯書院歸路答靑於東郭門外以近體一篇記其事次得(4首), 敬陵齋室盆菊正開感而問之, 菊花答, 次永春漁子川板上韻, 魚樂臺, 次西厓而見相送淸風凝淸閣韻(附原韻), 呈陳謝使臨淵裵令公(2首), 次盧?齋道心體人用韻, 次孫君立廬江韻, 溪上感懷贈李逢原(附次韻), 訪道山梅有感, 讀易見天心.
疏 ; 上王世子, 上行在所.
卷之 3. 書 ; 問目, 退溪先生(11).
卷之 4. 書 ; 答琴惺惺齋, 答南義仲, 答權定甫(9), 與權定甫, 答權定甫問目, 與鄭子明, 答柳而得, 與西厓柳相國, 與昌陵齋所.
卷之 5. - 卷之 6. 溪山記善錄.
卷之 7. 雜著 ; 陳淸瀾學?通辨心圖說辨, 知行辨, 造化辨, 大學八條目辨, ?矩辨, 五倫辨, 與趙月川士敬辨未發己發, 六十甲子陰陽辨, 朱晦菴謂參同契非虛語辨, 西銘說, 東銘說, 年月日時元會運世說, 易初九上六梔義, 與李浚問答, 論三先生學, 退溪先生文, 退溪先生墓誌?, 退溪先生墓誌銘, 東京遊錄.
銘 ; 戶銘, 窓銘, 燈銘, 尺銘, 寓光紙銘, 奎銘, 冊銘.
圖 ; 心體用圖, 爲學之圖, 惺心元圖, 和氣湯圖, 益元散圖, 壽民丹圖, 爲政之圖, 夫婦有別圖, 總論圖, ?法圖.
年譜.
跋 ; 權相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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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집(艮齋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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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서지 |
권수제 |
간재선생문집(원집)(艮齋先生文集(原集)) |
판심제 |
간재선생문집(艮齋先生文集) |
간종 |
목판본 |
간행년 |
1766년 간행 |
권책 |
8권 4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20×15.9(㎝) |
어미 |
上下二葉花紋魚尾 |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
소장도서번호 |
古3428-542 |
총간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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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제 |
간재선생속집(속집)(艮齋先生續集(續集)) |
판심제 |
간재선생속집(艮齋先生續集) |
간종 |
목판본 |
간행년 |
1829년 간행 |
권책 |
5권 3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19.5×16.4(㎝) |
어미 |
上下二葉花紋魚尾 |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
소장도서번호 |
古819. 52-Y53gs |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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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성명 |
이덕홍(李德弘) |
생년 |
1541년(중종 36) |
몰년 |
1596년(선조 29) |
자 |
굉중(宏仲) |
호 |
간재(艮齋) |
본관 |
영천(永川) |
특기사항 |
퇴계(退溪)의 고제(高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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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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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전거 : 行狀(宋時烈 撰, 宋子大全 卷210), 韓國系行譜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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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력 |
왕력 |
서기 |
간지 |
연호 |
연령 |
기사 |
중종 |
36 |
1541 |
신축 |
嘉靖 |
20 |
1 |
10월 14일, 榮川 南村 九龍洞에서 태어나다. |
명종 |
10 |
1555 |
을묘 |
嘉靖 |
34 |
15 |
6월, 從伯祖 聾巖 李賢輔의 상을 당하다. |
명종 |
13 |
1558 |
무오 |
嘉靖 |
37 |
18 |
가을, 淸涼山에서 惺惺齋 琴蘭秀에게 古文을 受學하다. ○ 退溪 李滉에게 受學하다. |
명종 |
16 |
1561 |
신유 |
嘉靖 |
40 |
21 |
4월, 퇴계선생을 모시고 濯纓潭을 유람하다. |
명종 |
17 |
1562 |
임술 |
嘉靖 |
41 |
22 |
12월, 淸涼山에서 독서하다. |
명종 |
19 |
1564 |
갑자 |
嘉靖 |
43 |
24 |
4월, 同門과 함께 퇴계선생을 모시고 淸凉山을 유람하다. |
명종 |
20 |
1565 |
을축 |
嘉靖 |
44 |
25 |
2월, 淸凉山 普賢庵에서 기거하다. ○ 8월, 동문과 함께 퇴계선생을 모시고 「易學啓蒙」을 受學하다. |
명종 |
21 |
1566 |
병인 |
嘉靖 |
45 |
26 |
1월, 月瀾庵에서 기거하다. ○ 10월, 溪堂에서 퇴계선생에게 心經疑義를 質正하다. |
명종 |
22 |
1567 |
정묘 |
隆慶 |
1 |
27 |
3월, 龍壽寺에 머물다. ○ 5월, 淸凉山 普賢庵에 머물다. ○ 9월, 퇴계를 모시고 龍壽寺로 가다. ○ 10월, 天淵臺를 유람하다. 隴雲精舍에 머물다. ○ 12월, 편지로 퇴계선생에게 心經疑義를 질정하다. |
선조 |
1 |
1568 |
무진 |
隆慶 |
2 |
28 |
1월, 心經疑義를 질정하다. 南氏와 혼인하다. |
선조 |
2 |
1569 |
기사 |
隆慶 |
3 |
29 |
3월, 月瀾庵에서 머물다. ○ 겨울, 편지로 퇴계선생에게 家禮와 曆說을 질정하다. |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30 |
迂溪精舍를 짓다. ○ 퇴계선생의 명으로 璿璣玉衡을 제작하다. ○ 8월, 易東書院이 낙성되자 퇴계선생을 모시고 돌아보다. ○ 溪堂에서 퇴계선생에게 「啓蒙」을 수학하다. |
선조 |
4 |
1571 |
신미 |
隆慶 |
5 |
31 |
3월, 퇴계선생의 葬禮에 참석하다. ○ 6월, 記善錄을 완성하다. |
선조 |
5 |
1572 |
임신 |
隆慶 |
6 |
32 |
2월, 金溪精舍에서 柳雲龍과 함께 「啓蒙」을 강학하다. ○ 4월, 동문과 함께 陶山에서 모여 尙德祠의 건립을 의논하다. |
선조 |
6 |
1573 |
계유 |
萬曆 |
1 |
33 |
11월, 伊山書院으로 가서 退溪의 位牌를 봉안하다. |
선조 |
7 |
1574 |
갑술 |
萬曆 |
2 |
34 |
3월, 부친상을 당하다. |
선조 |
9 |
1576 |
병자 |
萬曆 |
4 |
36 |
11월, 〈陳淸瀾心圖說辨〉을 저술하다. |
선조 |
11 |
1578 |
무인 |
萬曆 |
6 |
38 |
7월, 集慶殿 參奉이 되다. ○ 8월, 歸鄕하는 柳成龍을 배웅하다. |
선조 |
12 |
1579 |
기묘 |
萬曆 |
7 |
39 |
7월, 柳成龍과 함께 漢江을 유람하다. |
선조 |
13 |
1580 |
경진 |
萬曆 |
8 |
40 |
4월, 烏川의 圃隱先生廟를 배알하다. ○ 南致利의 喪에 곡하다. |
선조 |
14 |
1581 |
신사 |
萬曆 |
9 |
41 |
5월, 昌陵 參奉이 되다. |
선조 |
15 |
1582 |
임오 |
萬曆 |
10 |
42 |
가을, 豐儲倉 奉事가 되다. ○ 金垓와 함께 「周易」을 강학하다. |
선조 |
16 |
1583 |
계미 |
萬曆 |
11 |
43 |
봄, 顯陵 參奉이 되다. ○ 윤2월, 金玏, 金蓋國 등과 함께 新川을 유람하다. ○ 가을, 甲山으로 유배되는 許篈을 배웅하다. |
선조 |
17 |
1584 |
갑신 |
萬曆 |
12 |
44 |
蒙齋 李安道의 상에 곡하다. |
선조 |
19 |
1586 |
병술 |
萬曆 |
14 |
46 |
月川 趙穆과 함께 道峯書院을 유람하다. |
선조 |
20 |
1587 |
정해 |
萬曆 |
15 |
47 |
가을, 權好文의 喪에 哭하다. |
선조 |
21 |
1588 |
무자 |
萬曆 |
16 |
48 |
여름, 〈夫婦有別圖〉를 저술하다. |
선조 |
22 |
1589 |
기축 |
萬曆 |
17 |
49 |
겨울, 宗廟 直長이 되다. |
선조 |
23 |
1590 |
경인 |
萬曆 |
18 |
50 |
봄, 宗廟의 寶器 절취사건으로 파직되고 平恩驛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귀향하다. ○ 松巢 權宇의 喪에 哭하다. |
선조 |
25 |
1592 |
임진 |
萬曆 |
20 |
52 |
2월, 司饔院 直長이 되다. ○ 4월, 翊衛司 右副率이 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1월에 龍岡山城에 도착하여 왕세자를 배알하다. |
선조 |
26 |
1593 |
계사 |
萬曆 |
21 |
53 |
1월, 行左所로 나아가 왜적을 막는 계책을 상소하다. ○ 3월, 永春 縣監이 되다. |
선조 |
27 |
1594 |
갑오 |
萬曆 |
22 |
54 |
12월, 모친상을 당하다. |
선조 |
29 |
1596 |
병신 |
萬曆 |
24 |
56 |
2월, 廬幕에서 졸하다. ○ 5월, 禮安縣 북쪽 愚溪에 장사 지내다. |
광해군 |
7 |
1615 |
을묘 |
萬曆 |
43 |
- |
衛聖功臣一等에 勳錄되다. |
현종 |
6 |
1665 |
을사 |
康熙 |
4 |
- |
10월, 榮川 士林이 迂溪精舍에 位板을 봉안하고 廟號를 ‘道存祠’라고 하다. |
영조 |
28 |
1752 |
임신 |
乾隆 |
17 |
- |
玄孫 李長鎭 등이 활자로 문집을 간행하다. (李光庭의 序) |
영조 |
42 |
1766 |
병술 |
乾隆 |
31 |
- |
後孫 李常泰가 목판으로 문집을 重刊하다. (鄭彥忠의 重刊序) |
순조 |
29 |
1829 |
기축 |
道光 |
9 |
- |
後孫들이 목판으로 續集을 간행하다. (柳尋春의 續集跋) | 기사전거 : 年譜, 朝鮮王朝實錄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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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 및 간행 |
저자의 시문이 처음 정리된 것은 외증손 金萬烋에 의해서이다. 저자의 아들 李蒧, 李慕 등이 光海君 때 北人으로 활동하였고 특히 李茳은 廢母論을 극력 주장하여 1623년 仁祖反正 이후 伏誅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金萬烋가 1666년 四書質疑를 정리하고 周易質疑를 비롯한 대부분의 저작을 정리하고 간행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 1682년경에 肅宗의 命으로 간행된 「心經附註釋疑」의 宋時烈 序文에 의하면, 傳本이 전혀 없어 金萬烋가 編纂, 手錄한 心經質疑를 정리하여 간행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1684년에 尤庵이 김만휴에게 보낸 答書를 보면, 尤庵은 「心經附註釋疑」뿐만 아니라 記善錄, 四書質疑 등 저자의 주요 編書 및 著作의 求得을 김만휴에게 요청하고 있으며, 김만휴는 우암을 통해 간행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西人의 領袖인 尤庵의 힘을 빌려 南人의 저술을 간행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어 「心經附註釋疑」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간행된 것이 없었다. 더욱이 간행된 「心經附註釋疑」에 대하여도 黨爭으로 인한 政局의 변화에 따라 毁板 火書되는 등의 일이 있었으며(肅宗實錄 20년 10월 18일條), 이 일을 추진한 金萬烋에 대해서도 鄕村에서의 비판이 또한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肅宗實錄 15년 3월 9일條). 따라서 寫本으로 전존된 본 편저류의 草本에는 대부분 金萬烋의 跋文이 있으나 본집에는 전혀 수록되지 못하였고, 본집의 서발문에 金萬烋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본집이 간행을 위하여 다시 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1743년경부터이다. 訥隱 李光庭은 1743년 저자의 玄孫 李長鎭, 五世孫 李慶泰 등의 청탁에 따라 본집을 校讎하였으며, 1751년에는 淸臺 權相一이 刪定과 編次를 담당하고 年譜를 增補하였다. 이를 후손인 李慶泰와 李長泰가 1752년 活字로 印行하였는데, 이것이 초간본이다. 《초간본》 현재 이 초간본은 傳存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초간본은 校正이나 印刷의 상태 등 여러 가지 점에서 미흡하여 1766년 후손 李常泰가 榮川 迂溪書院의 院儒 金㙔와 함께 大山 李象靖에게 刪定과 校正을 부탁하여 8권 4책으로 再編하고 迂溪書院에서 木版으로 간행하는데, 이것이 중간본이다. 《중간본》 그러나 초간본이 印行된 지 15년 만에 重刊을 하게 된 것은 초간본이 活字로 印行되어 새로운 필요에 부응할 수 없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새로이 刪定, 編次하였다는 점에서 수록 내용상의 문제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重刊本이 본 叢刊의 原集 底本으로, 규장각장본(古3428-542)이다. 그리고 후쇄본에는 부록인 권8의 말미에 金萬烋의 청탁으로 李堂揆가 찬한 墓碣銘과 宋時烈이 찬한 行狀이 追刻되어 있는데, 이 역시 김만휴 때문에 重刊 때 수록되지 못하고 후에 추각된 것으로 보인다. 이 본은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2066, D1-A2066A)에 소장되어 있다. 續集은 저자가 스승인 退溪에게 受業한 것을 바탕으로 한 性理學 관계 編著類를 合編한 것이다. 이 편저류의 草本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金萬烋에 의하여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이 草本들의 轉寫本이 현재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중 四書質疑와 周易質疑가 1982년 亞細亞文化社에서 刊行한 「陶山及門諸賢集」의 艮齋集에 수록되어 있다. 본 속집은 榮川 士林과 후손이 상당 부분을 改削하고 縮約하여 5권으로 묶어서 迂溪書院에서 1829년 木板으로 간행한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837),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15), 규장각(古819. 52-Y53gs)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원집 중간본과 속집 초간본으로 모두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李光庭 撰), 重刊序(鄭彥忠 撰), 跋(權相一 撰), 續集跋(柳尋春 撰)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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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과 내용 |
본 문집은 원집 8권, 속집 5권 합 7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原集은 모두 8권인데, 권8은 年譜 등 附錄이므로 저자의 시문은 모두 7권으로 편차되어 있다. 권수에 李光庭의 序와 鄭彥忠의 重刊序가 있고, 目錄이 실려 있다. 권1과 권2는 賦, 詩, 疏이다. 賦는 〈陰陽互根〉, 〈剝復〉 두 편이 실렸다. 詩는 100題가 著作 時期의 순으로 편차되어 있으며, 간간이 자세한 自註가 있어 詩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上疏는 모두 두 편인데, 〈上王世子書〉는 1592년 임란이 발발하자 올린 상소로 戰術上의 對策을 건의한 것이다. 〈上行在疏〉는 1593년 1월에 올린 것으로 이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저자의 계책을 상소한 것인데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陣械圖ㆍ沈水眞木箭圖ㆍ龜甲船圖 등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 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壬亂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問目으로, 退溪에게 보낸 書簡文 가운데 家藏된 草稿를 바탕으로 問目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퇴계의 答辯을 첨부한 것이다. 권4는 書簡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것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12편이 松巢 權宇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은 溪山記善錄이다. 저자가 평소 직접 접했던 스승 李滉의 언행을 종류별로 모아 엮은 것으로, 入學之序 등 모두 16部로 되어 있다. 끝에 저자의 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鶴沙 金應祖의 跋文이 붙어 있다. 권7은 雜著, 銘, 圖로 되어 있다. 잡저에는 〈學蔀通辨心圖說辨〉 등 대부분 性理學과 관련된 저작이며, 退溪先生墓誌의 敍와 銘은 磁器로 구어져 거의 埋地될 뻔하였던 것으로, 제자 내에서 저자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銘은 戶ㆍ窓ㆍ燈ㆍ尺 등의 銘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圖에는 〈心體用圖〉, 〈爲學之圖〉, 〈爲政之圖〉, 〈夫婦有別圖〉, 〈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권8은 附錄으로 年譜와 挽詞, 그리고 榮川의 迂溪書院의 常享祝文 등이 있다. 續集은 모두 5권이다. 저자가 修學하면서 의문 나는 부분에 대하여 스승에게 질문한 것과 그 답변을 原著의 차례대로 정리한 것으로, 註釋을 모아놓은 형태로서 質疑라고 命名한 것이다. 수록된 質疑의 순서는 권1은 四書, 권2는 「周易」, 권3은 「心經」, 권4는 「古文眞寶」이다. 그리고 권5는 家禮註解인데, 이것은 1568년 이황이 사촌손녀를 문상하자 저자가 夫族으로서 따라가서 朱子의 家禮에 대한 독자적인 해설을 듣고 기록한 것이다. 맨 뒤에 柳尋春이 1829년에 지은 跋文이 있다.
필자 : 서정문(徐廷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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