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건너가며
민금순
유난히도 무더운 여름날이다. 블루베리 나무가 50°에 육박하는 하우스 속에서 가끔 죽어간다. 첫 농사라면 나무 한 그루만 죽어도 마음이 아파서 몇 날 며칠 애를 태웠을 것이다. 작년 여름 무더위에 블루베리 나무를 한꺼번에 1,000주 이상 죽여 본, 부끄러운 경험은 단단한 예방주사가 되었다. 1,000번을 넘어져 본 사람은 저절로 알게 된다. 넘어져도 아프지 않는 법을.
삽목으로 나무를 키워서 빈 화분에 심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물 건너갔다. 폭염은 묘목이 살아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녹지삽목과 숙지삽목을 했던 묘목도 1,000주 넘게 살려내지 못했다. 지나간 여름들의 날씨는 모두 잊고, 올해의 여름이 더 심하게 덥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관리를 잘못해서 묘목을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을 날씨 탓으로 돌리며 나를 합리화해 보려는 어리석은 생각인지도 모른다. 생명을 살려내는 일이 이토록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알아가는 여름날이다.
한 그루 한 그루 똑같이 애정을 쏟았건만, 대부분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데도 몇 그루가 죽어서 마음을 쓰이게 한다. 삶도 그런 것은 아닐지. 세상만사가 어찌 내게 좋게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게 중에 쩌걱이는 자갈밭도 있겠고, 콕콕 박히는 가시밭도 있을 터다. 며칠 전 내게 닥친 가시밭은 이랬다.
농원 진입로가 자꾸만 좁아졌다. 여름은 그런 계절이다. 필요 없는 풀과 나무가 무성히 자라서 길을 좁히기도 한다. 집의 현관 격인 농원 진입로가 복잡해지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남편에게 손 좀 봐달라고 부탁했지만, 다른 급한 일들에 밀려나곤 했다. 누구에게 부탁하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성격이라 남편은 결혼생활 동안 집안의 형광등 한 번 갈아 본 적이 없다. 여러 차례 이사했어도 출근해서 이사한 집으로 퇴근하던 그였다. 이번에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해내리라 작정했다.
톱, 전정가위, 호미 정도면 거뜬할 것 같았다. 동백나무 아래가 가장 심각하게 우거져서 풀을 뽑고, 정체 모를 잡목의 엉킨 뿌리를 자르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풀들은 말없이 뽑혀 나왔지만, 뿌리들은 뽑히지 않으려고 땅속에서 줄다리기했다. 그들과 실랑이 중에 뿌리가 툭두둑! 신음과 함께 끊어지면서 내 손에 잡힌 뿌리가 내 눈을 찔렀다. 나무들의 거친 반항에 내가 쓰러진 꼴이었다. 자연을 억지로 이기려고 하면 다치는 법이라는 말은 왜 뒤늦게 생각나는 걸까.
머리가 까마득해지고 하늘에 별조차 없이 깜깜해졌다. 뜨거움이 얼얼한 눈알로 퍼졌다. 눈물인 줄 알고 닦았는데 시뻘건 피가 묻어 나왔다. 눈 주변을 다쳤는데 온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쪽 눈이 부어올랐고 피가 계속 났다. 행여나 동자가 다쳐서 그렇지 않아도 나쁜 시력에 영향을 주면 어쩌나 걱정하며 안과에 갔다. 다행히 동자는 이상이 없고, 눈꺼풀이 심하게 찢어져서 네 바늘을 꿰맸다. 자기 발등을 찍기도 하고, 자기 눈을 찌르기도 하는 것이 농부의 삶인지도 모르겠다.
햇살이 따가운 만큼, 매사는 무기력해진다. 갱년기라는 고개를 넘고 있는 이 시기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우울함이 몰려온다. 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던 사람들과 말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나를 속으로 깊이 침잠시킨다. 그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침전물들이 소용돌이치면서 가장 먼저 목덜미를 잡히는 사람은 남편이다. 아무 잘못도 안 한 것 같은데, 나의 까탈과 투덜거림을 받으며 그도 곤혹스러운 갱년기를 보내고 있을 터다.
따가운 햇살은 복숭아나무랑 매실과 대추나무도 태워서 죽게 만든다. 산불의 경우, 자신의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려고 옆 가지와 비벼대서 자연발화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더 뜨거운 불을 일으켜 스스로 자기를 태워버리는 무서운 결과다. 나의 밀린 화를 다독이지 못하고 이제 와서 남편한테 쏟아내는 내 꼴이 자연발화를 일으키며 사라져 가는 나무 꼴은 아닐는지 싶어 마음의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내 손으로 내 눈을 찔러 놓고도 애꿎은 남편한테 원망이 돌아갔다. ‘괜히 농사는 짓자고 해서 이 고생을 시킨다’라는 마음이 농부가 된 후부터 지금까지 시시때때로 고개를 들었다.
“왜 혼자서 일을 하다가 다치고 그래요?”
“누가 다치고 싶어서 다쳤어요?”
남편은 혼자서 일하다 다친 나를 타박하고, 나는 또 볼멘소리를 낸다. 인내와 참을성을 대명사로 평생을 살아온 나도 허물어뜨리는 것이 따가운 햇살 탓이라고,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것 같아 남편 쪽을 향한 화살의 방향을 돌려 항변조차 들을 수도 없는 저 먼 태양에게로 원망을 실어 보낸다. 그러나 나는 안다. 여름을 건너가기가 참 힘들지만, 가을은 꼭 온다는 것을.
첫댓글 안녕하세요? 어제 올린 글 살펴 보다가 약간 수정했습니다.
눈도 불편하고, 시간은 없고, 울고싶은 마음입니다.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자기가 쓴 글을 500번 째려 보며 퇴고하라"라는 말씀이 가슴에 남아서 저를 찌르고 있습니다. 주절주절 핑계삼아 안부를 여쭙습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시고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울지마세요! 1차 원고라는 걸 압니다. 월요일에 얘기나누고 또 다시 고치면 됩니다^^ 맘 편히 주말 보내세요~!!
@임희정
"남편은 결혼생활 동안 집안의 형광등 한 번 갈아 본 적이 없다. 여러 차례 이사했어도 출근해서 이사한 집으로 퇴근하던 그였다." 이 부분을 읽고 먼저, 딸의 입장으로 "아버님!!!!"이라는 마음이 먼저 드는 건 ㅎㅎ
자연발화를 한다는 얘기는 어디선가 들어서 알고 있는데 이걸 금순님과 배우자님과의 관계로 비유하는게 인상 깊었어요. 저도 힘든 직장생활 끝에 제 안에 있는 울분과 화를 가족들한테 쏟아내곤 했는데, 저도 자연발화를 일으키는 나무와도 같았구나 하는 깨달음이 이제서야 듭니다.
[시와 산책] 책 속에서 발견한 문장들을 빌려서 글쓰기하는 게 이번 주 과제라 책에서 인상깊은 이야기들 가져왔습니다. 저도 자연발화 부분 참 놀라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녁에 봬요.
나무가 1,000주 이상 죽은 것도, 진입로가 좁아진 것도, 나무의 거친 반항도 그리고 건너가야 하는 여름도 어찌보면 남편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목덜미를 내어 줍니다. - 남편 생각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걸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