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철학을 먹고 산다
-의미와 초월
안 수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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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철학이 서로 닮아있는 것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표상작용의 내면화라는 사실 때문이다. 표상은 그러나 본질에 닿아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둘은 여전히 배고플 따름이다. 그렇건만 시는 왜 철학적인 의미를 필요로 하는가. 시의 언어는 실체의 현전화에 따른 상상력의 ‘의미 체현’에 매달려 있는 반면, 철학의 언어는 삶의 저변으로까지 기우는 내부 심층에 관한 ‘의미지향’의 울림을 그만큼 폭넓게 펼쳐 보여준다는 점 때문이다. 철학이 없는 시는 다만 감성의 탕진에 휩쓸릴 뿐이다 (요즈음 한국시의 일반적인 병폐는 정신·영혼·초월에 대한 자각이 없고, 존재의 표면에만 이끌려 다니는 감성적인 위장에 덮여있다는 점이다. 시에 대한 감동이 사라졌다. 예술이 사라졌다. 철학이 사라졌다. 왜 그런가. 진실을 희롱하는 장식문화·기술문화 때문이리라). 양만 살아남아 있고, 질이 없어졌다. 시는, 공허한 빈말이 아니다. 빈말의 뿌리는 진실성이 아닌 유사성에 닿아있을 뿐이다. 물어보자. 그렇다면 시인의 지각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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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나는 질이 없어졌다는 말을 했다. 이는, 공경스러운 경건함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경건함이란, 몸과 마음을 통해 얻게 되는 덕성인바 문장의 장식만을 일삼는 자는 결코 그 경지에 오를 수 없을뿐더러 그의 문맥 또한 비루할 따름이다 (피이문사이이자 누의 彼以文辭而已者 陋矣 『근사록近思錄』). 주자 (朱子 1130년~1200년)는 또 이렇게 말했다; “맑은 것은 기 [혹은, 정신]이며, 탁한 것은 형상 [혹은, 체용]이다” (청자시기 탁자시형 淸者是氣 濁者是形 『주자어록朱子語錄』). 시인의 기백을 지켜가기란 그만큼 어려운 문제였다. 생명 원기元氣는, 물질 [즉, 냉기의 ‘귀鬼’]과 정신 [즉, 온기의 ‘신神’]의 (존재론적인) 연관으로 각각 갈라지게 되었던 것. 『주역』이 가리키는바 ‘물’ [즉, ‘감坎’]과 ‘불’ [즉, ‘리離’]의 상응이 또한 그렇게 움직였다. 유형론의 관점으로 달리 말하자면, 음양의 작용으로서는 귀와 신이 생겨났으며, 정기精氣의 원리로서는 혼魂과 백魄이 생겨났던 것. 이른바 사유와 기억의 차별 역시 그러한 운용으로 너울거렸던 것. 간단히 말해보자. 그동안은 줄곧 눈에 보이지 않던 신神이 인간의 의식과 더불어 상통하는 실재와 무無의 관련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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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청징淸澄함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면, 요컨대 철학은 잠시 뒷전으로 물러나 있어도 좋으리라. 왜냐하면, 시는 철학과는 달리 정령의 입김과 맞물려있는 체액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언어는 본질적으로는 위험한 미로이긴 해도 위험한 미로인 만큼 생각함의 영매靈媒를 여전히 필요로 하는 맨 나중의 계기판이다. 인간은 본래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 사실상 그의 본심-정체성을 붙들고 있는 자는 그 자신 본인이 아닌 무無의 진동이었으며, 그 순간 그의 정신을 붙들고 있는 존재의 가동성이었던 것. 하늘은, 인간이 길바닥에 깔린 풀 한 포기도 자기 힘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을 보고 그런즉 시인을 불러내 시를 쓰게 했던 것이다. 인생의 논리는 인생의 논리일 뿐 하늘과 자연의 법도와는 무관하다. 또다시 신령은 시인을 불러내 하늘의 법도와 자연의 법도와 민족의 법도를 애써 찾아보라고 당부했던 것. 그랬다. 그와 같은 문제라고 한다면, 이때쯤 시인은 비로소 무형상적인 우주와의 접촉을 감내하기 위해서라도 철학적인 조명이 내리쬐는 불 가까이 옮겨 앉을 수밖에 없었던 것. 시는, 어느덧 인간의 언어를 벗어던질 때가 되었던 것이다. 하늘은 인간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자연은 인간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인간의 말은 너무나도 지루하고, 또 너무나도 고루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간이 생각해낸 말을 접을 때가 아닌가. 인간의 말에 지나지 않는 그와 같은 말을 버리고 이제야말로 시인은 다시 말문을 열어놓을 차례가 된 것이었다. 그의 말은 아무 데로나 흘러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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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인의 말이라고 해서 모두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늘마저도 말을 아끼고 있지 않은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같은 말의 지극함을 깨닫게 될 때 그때부터 그는 시인이 된다. 세상은 말로 달라지지 않는다. 세상이 썩어빠진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다. 형상은 썩게 마련이다.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내 의식에 붙은 말의 내용을 바꾸지 않는 한 불가능할 수밖에. 내 말의 내용을 바꾸고 나면 [즉, 언어의 의미를 바꾸고 나면] 세상은 저절로 다른 세상으로 다시 열린다. 그렇게 본다면, 시인은 저쪽에 있는 대상들의 표상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내 말이 던져놓은 (내면의) 주관적인 의식작용 전모를 먼저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주관적인 말의 의식작용이란, 곧 시인의 철학적인 천품을 (암암리에) 드러내는 의미의 항원抗元들이었던 것.
꿈자리를 고쳤다
구질구질한 일평생이 아니라, 구질구질하지 않은 일평생으로
질척이지 않는 꿈으로
나는 죄가 없었다
꿈을 고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고치는 일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꿈을 고쳐 이득을 보려는 것이 아니다
구질구질하게 보이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내게
태양의 빛을 향해 쏴라
내가 구질구질한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니
-박찬일의 「꿈자리를 고쳤다」 전문 (시집 『인류』 문학의 전당, 2011년)
시는, 형상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구질구질한” 꿈에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우주 공간 속에 파묻힌 순수 관련 [즉, “태양의 빛”]에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시는, 자기기만을 못 참는다. 시인의 가슴속에는 어느새 “태양의 빛”이 이글거리고 있었으므로. 시인은 대상 앞에 서 있는 점유‧복속이 아닌 그의 마음을 넓혀가는 지각에 몸을 맡기고 있었으므로. 그럴 때는, 시간은 늘 춘3월이다. 시는, 인생에 관한 비유를 제한하지 않는다. 이때는 바야흐로 시적인 인식체계와 지각 활동이 우주 영토-인간의 운명을 포용하는 변형적 정화精華 transformative prime [혹은, 사유형식의 충일감]로 치닫고 있는 시각이다. 필시 인간은 시간의 풍화 현상을 본받아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주역』 ䷸ 중풍손重風巽 (쉰일곱 번째 괘)의 「단전彖傳」은 이렇게 말했다; “바람이 바람을 따라가듯이 운명을 받들어라” (중손 이신명 重巽 以申命). 그렇게도 아름다운 말을 시인은 지금 이곳에서 시화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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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자기 자신을 주체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람의 말이 서툴러서가 아니라 그 바람의 말이 일정한 의미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바람을 보게 되면, 말이 지켜지는 이면에는 언제든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언령言靈의 씨앗 [즉, 침묵]을 품은 (언어의) 자증분自證分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된다. 바람의 말이 의미대로 움직이지 않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다. 시인이 의미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 말보다는 항상 ‘존재’ (그리스철학)-이름 붙이기 이전의 ‘도’ (노장철학)가 먼저였으므로. 그것이, 말하자면 현실과 상징 사이에 소묘素描를 앉혀놓는 까닭이었던 것 (시의時義와 영대靈臺를 따라 움직이는 붓끝을 우리는 소묘라고 부른다).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산 능선도 그냥 둔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이성선의 「그냥 둔다」 전문 (시집 『이성선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년)
이성선의 시에는 행위가 없다. 그것이 도리어 수준 높은 행위가 아니랴 (도법자연 道法自然 『노자』 25장). 등비수열로 치자면, 1, 2, 4, 8, 16, 32...와 같은 유식론적唯識論的인 의표만 내보일 뿐이다 (유有는 무無와 동일한 액상液狀이다). 시인의 말을 따라가보자; “마당의 잡초”가 나오고, “잡초 위에 누운 벌레”가 나오고,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 산 능선”이 나온다. 그 같은 유식론적인 직관 [혹은 망원경]으로 바깥풍경을 내다보면, 이 세상은 그대로 극락이 된다. 그렇더라도 세상 물정 밖으로 다시 건너다보면, 이 세상은 단박에 5탁濁 [즉, 명탁命濁‧중생탁衆生濁‧번뇌탁煩惱濁‧견탁見濁‧겁탁劫濁 『법화경法華經』] 따위의 강제력이 휩쓸고 다니는 불구덩이가 된다 (사실상 인간은 온 세상을 망가뜨리는 주범이 아니었던가). 위 시가 감동을 주는 까닭은, 시인의 정신이 하늘의 정적을 본뜨고 있다는 점이다. 언어의 절약이 그의 시를 관통하는 지표였던 것 (시인의 “눈길” 앞에서는, 만물은 평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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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감상이 아닌 이상 존재의 후면으로는 멀찍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세상에는 없는 어떤 극지極地의 속사정을 거듭거듭 캐묻는다 (필자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인용). 이 세상에는 대상의 온전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대상의 현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그 대상 속에 들어있는 존재의 지극함이 반사 projection됨에 따라 드러난다. 이것을 하이데거 (M.Heidegger 1889년~1976년)는 존재의 시간화라고 명명했던 것 (『존재와 시간』). 그것을 불가에서는 또 순간의 ‘깨달음’으로 말했던 것이다 (돈오頓悟). 돈오는 ‘마음의 자성’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에 나타난다. 노자 (老子 BC 579년경~BC 499년경)는 이를 가리켜 이어지고 또 이어져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을 말할 수도 없는 ‘황홀’의 경지로 돌아가는 ‘복귀’라고 말했다 (승승불가명 복귀어무물···시위홀황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是謂惚恍 『노자』 14장). 다시 말하자면, 복귀란 ‘포일抱一’로 되돌아가는 존재의 귀환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늘 (정신)과 땅 (형상)의 기운을 한 몸에 싣고 하나를 끌어안는다” 재영백포일 載營魄抱一 『노자』 10장)). 하이데거의 생각이든 불가의 생각이든 노자의 생각이든 그들의 언표는 다 같이 언어를 제한하고자 하는 언어 이상의 언어 [즉, (언어)²]를 다시금 보여주는 초월의 불꽃들인 셈이다. (철학자의) 존재의 사유와 그곳에서 이름을 얻어내는 (시인의) 시어詩語 [혹은, 영혼에 대한 지각]와의 상관은 서로 반대쪽으로 갈라져 있는 대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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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으로서 갖춘바 위엄은, 곧 존재 사건 [즉, 대상의 빛]을 지각하고 그에 대한 사유를 통해 얻어낸 세계이해의 의미를 수습하는 데 있다. 이른바 시인의 말 (시어의 실행)에 대한 지각은 이때 나타난다. 언어 없이는 존재의 근거 자체도 사라진다. ‘장미’라는 말이 있으니 ‘장미’가 있고, ‘불안’이라는 말이 있으니 ‘불안한 마음’이 있고, ‘천국’이라는 말이 있으니 ‘천국’이 있다. 사물의 고유한 의미 실현 또한 말로 인한 존재 형식의 구현이었던 것. 이러한 존재 실현을 통해 인간은 누구든지 시인이 된다 (횔덜린 Friedrich Hölderlin 1770년~1843년 의 「회상回想」). 그러나 존재의 지극한 불빛은 도리어 시인의 표현력을 위협한다. 자칫 시인의 낱말을 불명료한 환상으로 물들여놓기 때문이다 (환상이란 정신 행위의 경박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인의 시어가 환상으로 물들게 되면, 그때는 그의 시가 하염없는 의미상실의 최면술에 파묻힐 수밖에 없다). 시는 왜 철학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시의 불꽃을 태우기 위함이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본연의 본연 때문이다 (한용운 1879년~1944년 의 「알 수 없어요」) )). 시인은 존재의 망각과 존재의 은폐에 대하여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적은 권태와 우울이 아닌 그 권태와 우울을 아예 외면해버리는 편견에 있었으므로. 시적인 의미는 권태와 우울의 반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권태와 우울을 씻어내는 현실성 realistic에 있기 때문이다. 현상이 품고 있는 일관성마저도 따지고 보면, 우리네 세계이해를 견인해가는 원천이라기보다는 저와 같은 인식체계의 명암을 새롭게 규정하는 계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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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무엇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 자랑할만한 덕목이라 할 수 없다. 그의 덕목을 역설적인 넓이로 보자면, 도리어 고통과 슬픔의 행보에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시는, 물론 로고스 Logos [혹은, 정신]와 파토스 Pathos [혹은, 느낌]의 조율로 이뤄내는 조합이다. 한밤중의 포용이 없다면 시의 광채는 무주공산으로 떠도는 망상의 허실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시는, 순결한 사람이 쓴다. 시인의 명예는 세속적인 성공이 아닌 순결한 정신의 이행으로부터 얻어낸 영예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지각은 대덕들의 깨달음과는 달리 그의 삶 쪽으로 다가온 슬픔과 고통의 자양분으로 가다듬는 각성이었던 것 (시인은 슬퍼하며 아파하면서 그 슬픔과 아픔을 또다시 봉합한다). 천상병 (千祥炳 1930년~1993년)과 박용래 (朴龍來 1925년~1980년)의 천진이 그랬던 것이다. 왜 천진인가. 천진한 마음을 지닌 시인만이 자연·사물의 (고유한) 의미 앞으로 다가가 그 의미가 건네주는 질문에 대하여 ‘고요한’ 말로 대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철학자라면, 그 같은 시인의 말에 어찌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이데거가 그랬던 것처럼.
<Poem People, 2022년 여름 창간호 >
[출처] 안수환시인- 시는 철학을 먹고 산다 -의미와 초월 |작성자 나무 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