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물갈퀴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히말라야를 꿈꾼다. '눈이 머무는 곳"이란 뜻을 가진 히말라야는 산악인에게는 목숨을 걸고라도 도전해 보고 싶은 ‘높은 곳’이다. 그래서 히말라야에는 수많은 산악인들의 목숨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누구나 섣불리 그곳을 오르지는 못한다.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곧 연습에 달려 있으므로. 최고의 산악인이라는 자신감이 섰을 때 비로소 조심스럽게 등정을 시도한다. 의미 있는 통계가 있다. 1950년부터 2006년 사이, 56년 동안 히말라야 등정에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2,854명이다. 하지만 등정에 성공한 후 추락사를 한 사람의 숫자가 무려 255명이나 된다. 죽을힘을 다해 히말라야를 정복한 이들이 죽을 고비를 모두 넘기고 정상에 오른 다음에 죽어버린 것이다. 주목할 것은 구간별 추락사 분포인데 추락사가 가장 많은 구간은 정상을 밟은 직후라고 한다. 사망한 255명 중 48%가 정상을 밟은 직후 추락사를 한 것이다. 험난한 등반 과정을 거쳐 정상에 오른 사람이 승리자에서 한순간 저 세상 사람이 된 것이다. 승리감이 절정을 이루는 순간에는 자만의 농도 또한 극에 달한다고 한다. 정상에 오른 순간에 극도의 긴장감이 풀리고 산을 오를 때의 야성과 예리함이 마비되어 자만에 도취하다가 결국 운명이 전복되어 영원히 히말라야에 묻힌다는 것이다. 눈이 크지 않아서 인지 겁이 없다. 무엇이든 도전하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하찮은 일도 의미를 부여하고 목표로 삼고 그리고 작은 성취를 이루어 왔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을 지키는 것, 습관적으로 운동하러 나가는 것, 몸무게를 유지하기위해 맛있는 음식도 먹다가 마는 것, 3년 째 하루 15분 씩 영어수업을 거르지 않고 하는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의 성취가 나의 신념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반면 한편으로는 나를 자만하게도 만든 것 같다. 작은 일을 이루었을 뿐인데 어려운 일조차도 ‘하면 된다’는 신념이 생긴 것이다. 주관적 유능 감으로 무슨 일이든 쉽게 생각 했다. 박사학위도 마찬가지이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학위를 갖고 있고 선배님들도 순탄하게 학위를 받는 것처럼 보여 4학기가 될 때까지는 논문 걱정을 하지 않았다. 때가되면 저절로 될 거라고 믿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유영하는 백조의 겉모습만 본 것이다. ‘히말라야는 자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 내 가슴을 누른다. 거의 다 끝나가고 있다고 생각 했는데 연구 설계가 잘못되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며칠사이 피폐해진 마음에 주눅 들어 있었다. 객관적인 지적에도 불구하고 어쩌자고 자꾸 우기는지 딱한 일이다. 오히려 지금 오류를 발견한 것이 다행이라 여길 수 있는 여유가 지금 내게 필요하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쓰지 못한다는 말을 떠 올린다. 완벽한 방향감이 필요하다. 이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연구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책상에 수북하게 쌓아 놓은 참고 문헌이 자꾸 눈에 밟힌다. 그동안 연습한 것은 분명히 내 몸 어디엔가 남아 있을 터, 투입 에너지를 죽음을 무릅쓰고 히말라야를 오르는 산악인처럼 예리하고 날카롭게 쏟아 부어야 할 것이다. 하여 잠깐의 좌절감이 오히려 나에게 더 멀리 갈 수 있는 혜안을 주길 바란다. 호수의 우아한 백조에게 물밑의 애환이 없다면 내 어찌 아름다운 백조의 유영을 감상 할 수 있으랴. 자만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수고를 선택 할 때에 비로소 내게도 정상에 선 산악인 같은 기쁨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그 후로도 자만하지 않을 마음을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