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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음녀 바벨론과 짐승의 내부분열>의 줄거리:
일곱 머리와 열뿔 달린 짐승을 타고 다니는 큰 음녀 바벨론! 그러니까 바벨론이 성립 가능한 것은 바로 이 짐승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열 뿔과 짐승은 자기가 업고 다니던 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살라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구체적 표현인 바벨론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사탄의 세력에 의해 붕괴되는 기이한 현상. 이것이 바로 어린양으로 인해 일어난 암흑가의 내부 분열입니다.
음녀 바벨론과 짐승의 내부분열
(계17:1~18)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음녀 바벨론과 짐승의 내부분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음녀 바벨론과 짐승의 내부분열’
내부분열이라고 말씀을 드린 이유는 우리가 읽지 않은 16절을 보면 이상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 “큰 음녀”는 바벨론을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바벨론이라는 큰 음녀가 붉은색의 짐승을 타고 있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달린 것을 보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음녀가 지금 앉아있는 곳도 많은 물 위에 앉아있다고 합니다. 많은 물 위에 있는데 짐승을 타고 있습니다. 바다짐승을 타고 있다는 것은 바다짐승을 이 큰 음녀가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 바다짐승이 큰 음녀 바벨론의 스폰서가 된다는 이야기죠. 큰 음녀가 바벨론이 될 수 있도록 밀어주고 가능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주는 자가 큰 짐승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그 짐승이 그 음녀를 벌거벗게 만들고 망하게 하고 살을 먹고 불로 살라버린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부분열이 일어납니다.
내부분열의 이유가 도대체 뭐냐? 궁금증이 생기잖아요.
결론적으로 먼저 말씀드리면, 바다짐승이 온 땅을 지배하는 방식이 바벨론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을 만든다는 것은, 666표를 갖고 있는 짐승이 바다짐승을 경배하기 위해서 우상을 만들잖아요? 우상을 만들어서 우상에게 경배함으로써 바다짐승을 경배하게 만들었어요.
같은 의미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바벨론을 바라보고 바벨론을 사랑하고 바벨론을 소원하고 바벨론을 이상향으로 생각하게 하면서 짐승을 숭배하게 한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곱 대접의 재앙을 내리시는데 일곱 대접 재앙의 공통된 주제가 뭐였죠?
하나님께서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겁니다.
일곱 대접 전까지는 아무리 극악한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하나님께서 어린양 십자가로 그 마음을 이끌기 위해서 이런 저런 방법을 다 동원하시면서 마음에 담고 계셨지만, 그 모든 방법이 다 끝난 다음에도 여전히 돌아서지 않고 있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 더 이상 마음에 담지 않고 내버리신 것을 일곱 대접을 쏟아버리는 재앙으로 표현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마음에서 내 놓으신 사람들이 시대마다 생겨났기 때문에, 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더 이상 바벨론이라는 것이 역할이 없는 거예요.
바벨론이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빼내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음에서 버렸습니다. 버린 그 사람을 사탄이나 사탄의 하수인인 짐승들이 사랑하고 좋아하고 끝까지 책임질 리가 없죠.
그 음녀인 바벨론을 이용했던 이유가 하나님 마음속에서 사람들을 빼내기 위함이었는데, 하나님 스스로가 더 이상은 돌이키지 않는 것을 보고 버리셨으니까, 이제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로 분명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버림받지 않은 자들은 이제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이들은 해볼 수가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바벨론이라는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다 먹어치우고 불살라버리고 없애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우리가 이러한 오늘의 주제를 알고 본문을 이해하는데 해석하기에 어려움이 끝이 없습니다.
특별히 7절 이하에 보면 “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이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또, 8절을 보시면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라고 나옵니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전에는 있었다가 지금은 없는데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서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이게 바다짐승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13장 3절에 바다짐승을 뭐라고 했느냐?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는데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서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고 표현을 해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참 어렵지요.
그리고 더 어려운 것은 9~10절에 보면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라고 나옵니다.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이 말은 지혜 있는 자는 다시 한 번 잘 살펴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다는 뜻인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모르겠어요.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나오는데 여러분이 저에게 좀 가르쳐 주세요.
이게 뭘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11절에 보면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이라고 나오는데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바다짐승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 바다짐승의 일곱 머리가 왕이라고 했어요. 일곱 왕이 다섯은 이전에 있었고 하나는 지금 있고, 하나는 장차 올 왕이에요. 그런데 또 그 일곱 머리를 달고 있는 짐승 자체가 여덟째 왕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또 일곱 중에 속한 자라는 거예요. 짐승에서 일곱 머리가 나왔는데 그게 일곱 왕이고, 그 짐승 자체는 여덟 번째 왕인데, 그 여덟 번째 왕이 일곱 왕에 속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하하)
분명히 영적으로 진리가 들어있고 의미가 있는 내용인데, (하하하) 웃음 밖에 안 나와요. 무슨 말인지를 진짜 모르겠어요.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17장 전체의 기본 주제는 아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 중에서 왔다는 것이 일곱 대접 마지막에 바벨론에 지진이 크게 일어나면서 망하고, 하늘에서 한 달란트 되는 우박이 내리면서 망하잖아요?
한 달란트라는 것은 우박 하나가 34kg라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니 뭐가 살아남겠습니까? 그래서 망했잖아요. 그런데 바벨론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그 일곱 대접째에 망한 바벨론의 이야기를 현미경으로 확대한 것처럼 다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되죠.
바벨론이 망하는 내막을 알고 봤더니 그 깊은 내막이 뭐였냐?
지진이라는 것은 상징적이었어요. 바벨론이라는 성이 존립할 수가 없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지진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땅만 갈라지느냐? 하늘에서 34kg의 우박이 떨어져서 솟아날 구멍도 없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무너져 완전히 망한 것이죠. 완전히 망한 것인데 그 내막을 가만히 살펴봤더니 바벨론을 도와주고 있었던 그 짐승이 바벨론을 먹어버렸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더 이상 바벨론이라는 것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큰 틀 안에서 주제를 잊지 않으면서 우리가 오늘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기본으로 돌아갑니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왜 중요하냐?
기본으로 돌아가서 연결되지 않는 성경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성경 전체의 핵심 기본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본을 언제나 잊지 않을 때에 우리가 멀리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해석함에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하지 않고 많이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혹시 세부적인 면에서 잘못 된 것이 있더라도 큰 줄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 기본이 뭡니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뭡니까?
어린 양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건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의 기본이에요.
그럼 이 기본이 어떻게 본문에 적용되고 있습니까?
바벨론이라는 이름과 연관이 되어있는 거예요.
‘큰 음녀’
큰 음녀는 하나님에게 대항해서 영적으로 음행을 저지른 자요, 다른 자들로 하여금 음행을 저지르도록 이끄는 자입니다.
그래서 음녀인데 그 음녀가 왜 하필 바벨론입니까?
말씀드린 대로 앗수르도 적국이었고, 애굽도 적국이었고, 가나안 7족속, 블레셋도 적국이었고 적국이 많습니다만 유독 바벨론만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멸망시킨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앗수르, 애굽 그 외의 많은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침공하고 짓밟았지만, 성전 자체를 깡그리 무너뜨린 나라는 바벨론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자꾸 바벨론이 등장하는 거예요.
바벨론이라는 것의 성격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반대로 성전 중심으로 살던 예루살렘 성의 삶은 어떤 삶인가를 알면 바벨론의 내막과 속성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성전 중심의 삶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에서 출발해요. 마음은 비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욕망합니다. 욕구가 생기는 거예요.
어떤 욕구가 생깁니까? 채우고 싶어 하는 욕구가 생깁니다. 이 욕구는 나쁜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어요.
그런데 아담 타락 이후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분명히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비어있는 마음을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 자신으로 채우려고 하셨어요.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판단을 해야만 사는데 판단을 하지 않으려니까 판단하는 자를 모셔 들여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모셔 들임으로써 기쁘고 만족하게 에덴을 살라고 만들어 놓으셨는데 사탄이 개입하면서 이 에덴을 상실합니다.
그럼 이제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될 마음에 사탄이 하나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뭡니까? 그게 바로 돈이에요. 이 세상의 인기예요. 이 세상의 명예예요.
가끔 인터넷 뉴스를 보면 연예인들이 구설수에 말려들거나 이상한 사건에 말려들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들이 뉴스에 나옵니다.
왜 그래요? 인기라는 것은 다른 사람 속에 들어있는 나입니다. 인기를 먹고 사는데 다른 사람 속에 들어있는 나의 모습이 멋질 때에 인기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다 깨져 나가버립니다. 망가져 버리고, 일그러져 버립니다. 배우 입장에서는 그걸 못 견디는 것이죠.
권력, 정치인들이 권력 잡으려고 얼마나 난리입니까? 여당과 야당이 싸우고 거기에 또 무슨 종북 세력 비슷한 느낌을 주는 무슨 당이 개입해서 난리를 칩니다. 권력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대안으로 사탄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제시한 내용들입니다.
대안이라는 것은 그것을 마음에 가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고 선민의 나라가 세워집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뭐하는 곳입니까?
내가 돈이 없어서 걱정하고 근심하고 살다가 성전에 가서 돈을 벌듯이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벌면서 기뻐하기 위해서 살았어야 되었는데, 하나님을 통해 만족하는 삶을 살았어야 되고, 그렇게 하나님 때문에 기쁘고 만족한 다음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도와 하나님의 뜻이 동행하는 한도 안에서 사업을 하고 그랬어야 되고, 그래서 사업해서 번 돈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 쓸 수 있어야 되고, 내가 사업해서 돈 많이 벌어서 내가 사고 싶은 것들, 쓰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쓰면서 사탄이 제시한 다른 대안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며 행복을 얻으려고 살았던 나 자신은 어떤 놈이냐? 저 번제단에서 각이 떠져서 하나도 남김없이 다 타버려서 재가 될 그런 죄인이다. 그래서 성전에서 양을 죽여 태우면서 내가 저렇게 타 죽어야 될 놈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내가 기뻐하려고 했다니요? 이게 음행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다니 이런 용서 받지 못할 간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그 죄를 고백하면서 타 죽고 새로운 마음으로 이제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가서 장사도 하고, 가정생활도 하고, 사업도 하고, 직장 생활도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이라는 것은 도대체 뭐냐?
하나님의 대안으로 제시한 이 세상의 가치들을 총집결시켜 놓은 곳이 바벨론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공한 상황, 성공한 곳, 성공한 나라, 이게 바로 바벨론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의 가치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갖고,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고, 욕망과 욕구가 마음대로 발산되는 곳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관계를 끊고 사는 모든 세상 사람들의 이상향이 바벨론이라는 거예요.
쉽게 말하자면 지금의 미국이 바벨론입니다.
아니, 미국이 기독교 국가인데?
베드로전서 5장 13절에 보면 베드로가 편지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그 바벨론이 로마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보면 그 당시의 로마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국제적인 위치에서 모든 사람이 로마의 시민권 하나 얻으려고 바라던 그런 나라였고 그런 도시였습니다. 그걸 바로 바벨론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은 미국이 바벨론이고 잘 사는 선진국들이 바벨론이죠. 그러나 그곳에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그곳에 교회가 있다고 해서 미국이 바벨론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 바벨론인 이유가 이 세상의 모든 가치가 가장 많이 집결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미국에 가고 싶어 하고, 미국 같은 나라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강대국이고 권력이 제일 많고 힘이 세고 돈이 제일 많죠.
중국이 세다고 하지만 국민 총 생산 GDP가 미국의 절반 밖에 안 됩니다. 일본이 세다고 하지만 미국의 1/4인가 1/3 정도 밖에 안돼요. 그러니까 미국이 모든 세상 사람들의 이상향이고 그게 거꾸로 나타난 것이 시기와 질투와 미움입니다. 그렇게 바라는데 나는 안 되고 있으니까 미워하는 것이죠. 모든 사람들이 미국을 바라보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갖지 않습니까? 아메리칸 드림이 뭐예요? 이 세상에서 미국처럼 잘 먹고 잘 살아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삶은 이 땅에 사는 동안의 이상향은 하늘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하늘나라에 계신 하나님아버지가 기쁨의 원천이고 만족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조차 하나님의 이름을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하고 배부르기 위해서 동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죠. 조직이 교회가 아니에요. 교회라는 조직 안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 있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교회를 다 말아먹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인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아까 봤던 8절의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13장 3절에 보면 ‘일곱 머리 중에 머리가 하나 상했다가 상처가 얼마나 심한지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가 다시 회복 되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상처가 어디서 난 겁니까?
어린양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영계에서 미가엘과 사탄인 붉은 용과의 전쟁이 일어났던 겁니다. 그 전쟁에서 앞장서서 나섰던 것이 바다짐승이었어요. 다쳤다는 겁니다.
‘지금은 없다’라는 이야기는 그 머리 하나가 죽도록 상한 상태와 연결이 되는 것이고, 같은 상태를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성도들이 성도들의 지금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가고 있습니까?
지금의 삶의 내용이 뭡니까? 성전의 삶을 사는 거예요. 매일 매일 성전에서 상번제가 드려졌습니다. 이걸 우리식으로 가져오면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자들의 지금에 대해서는 바다짐승의 존재와 의미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 이전에는 있었죠.
십자가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신앙 안에서 지금의 사건으로, 내 앞에 있는 사건으로 붙잡고 있는 지금에는 그 바다짐승은 무력해지는 겁니다.
나중에 14절에 보면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바다짐승을 이긴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긴다는 것이 지금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양이 이기고 성도들이 이긴다고 해요.
이제 십자가가 지금의 사건으로 반복되어서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늘 죽는 일이 반복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바다짐승은 무저갱에 갇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써 마지막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무저갱에 갇혀 있다가 올라와서 불 못에 던져지는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겁니다, 실제로 십사만 사천 명에 대해서는.
그러면 도대체 9절에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다.’라는 말은?
적그리스도를 이 땅에 나타나게 하는 이 짐승들이 바벨론을 만들어 낸 겁니다.
‘일곱 머리, 일곱 왕, 일곱 산위에 음녀가 앉아 있다’
이 말은 이 세상적인 가치가 모아지는 곳, 모아지는 나라, 모아지는 사람들은 다 짐승이 도와줘서 될 수 있는 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그런 일이 일어나는 모든 곳이 그렇다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펼치시기 위해서 재물을 모아주실 수도 있고, 권력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걸 부인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 세상의 가치들이 집결되는 곳이 바벨론인데 그게 다 짐승이 하는 일이라는 거예요. 원불교 믿고, 불교 믿고, 이슬람 믿고, 힌두교 믿고, 중국에서 무슨 다른 종교를 믿는 게 없는데 갑부가 생겼다면 그건 그냥 짐승이 그에게 재산을 몰아주고 있는 것이고, 권력을 허락하는 것이고, 이 세상 가치들을 몰아주고 있는 겁니다.(이게 비밀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그를 보고 부러워하고 나도 저렇게 돼야한다고 하면서 이 세상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든 것이죠.
그런 짐승의 역할 중에서 다섯 개의 머리로 이야기되는 왕들은 있었고, 지금 한 왕은 있고, 앞으로 한 왕은 장차 나타날 것이 무슨 이야기일까요?
그리고 짐승 자체는 여덟 번째 왕이다.
이것은 그 옛날의 앗수르, 바벨론의 그 이전의 역사로부터 중세를 거쳐서 현대의 지금까지 모든 역사의 왕과 나라와 이 세상의 가치들을 많이 모으게 된 성공한 권세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다 짐승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역사 전체를 거쳐서 이 세상의 가치가 집결됨으로써 나타나는 권세가 다 짐승이 받쳐주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곱 머리’라는 것은 이 역사의 단위를 일곱 개로 끊어내는 겁니다, 일곱이 완전 숫자니까. 그러니까 역사의 단면이에요. 역사는 이렇게 흘러간다는 거예요.
다섯 왕이 있었고 지금도 짐승이 받쳐줘서 세상의 가치가 집결되고 있는 왕과 나라가 있고, 앞으로도 그런 나라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다 시간이 지나면서 멸망합니다.
‘여덟 번째 왕’이라는 것은 짐승 자체는 역사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역사의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일곱 왕입니다. 그 일곱 왕이 역사 진행의 단면이라는 거예요. 어느 역사를 끊어보든지 간에 그 역사를 끊어보면 지금 왕이 있어요. 그리고 앞에 다섯 왕이 있었고 앞으로 왕이 있을 거예요. 다시 말하면 지금 왕이자 지금 바벨론인 자가 없어지면 다른 바벨론이 생길 겁니다. 역사가 진행하는 동안에 계속해서 이 세상의 가치가 집결되는 곳이 여기 생겼다가 저기 생겼다가 저쪽에 생겼다가 요기 생겼다가 내 뒤에 생겼다가 앞에 생겼다가 그러지 않습니까?
그게 다 짐승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고, 여덟 번째 왕이라는 것은 짐승 자체는 역사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 이 세상을 그렇게 바벨론이라는 음녀를 내세워서 그걸 바라게 하고 이상향으로 꿈꾸게 하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에 대해서 간음하도록 하나님께 등 돌리고 음행하도록 만들어가게 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자가 어린양 십자가를 통해서 패배를 당하고 어린양 십자가를 날마다 지금 붙드는 자들에 대해서 무의미해지고, 그리고 이제 십사만 사천 명의 숫자가 확정됨에 따라서 바벨론의 의미가 점점 없어지니까, 이 바벨론이라는 음녀 자체를 짐승이 버리는 순간이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데 좀 이해가 됐을까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일한 해석이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가능한 한 올바른 해석이 되기 위해서 언제나 근본으로 돌아가서 출발하는 겁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있었다.
바벨론이라는 것은 하나님 대신에 이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삶이고, 그런 삶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케이스가 바로 바벨론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성공적인 나라와 왕과 사람이 계속 있지 않았습니까? 이게 다 짐승이 도와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이제 하나님의 일곱 대접이 쏟아지면서 진영이 확실해지고 굳어지면서 바벨론의 효용가치가 없어지자 사탄이 바벨론 자체를 멸망시키게 될 것이라는 재림에 직면해서 나타날 일들에 대해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바벨론 음녀를 어린양 십자가로 이기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삶에 대해서는 이 음녀 되게 돕는 짐승이 무저갱에 갇힌 것과 같은 삶이 될 수 있도록 날마다 십자가를 생활화 할 수 있게 우리 마음을 권면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그리스도의 양이 차지않아 갈등과 내부분열로 하루에도 천국과 지옥을 들락날락하는 날들이 부지기수였는데, 그래도 죽으면 죽으리라 십자가를 붙잡게 하셔서 바벨론의 멸망을 보게 하심을 믿습니다. 그런 마음을 주신 것도 다 하나님아버지의 큰 사랑이었음에 그저 감사드립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되게 하시고 사울을 바울되게 하신 하나님의 열심이 끝내 우리로 승리케 하심을...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그저 그 말 밖에 하늘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계시록을 통해 그 크신 하늘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내 백성아 내 백성아
십 사만 사천에 들어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세마포를 입은 신부로 순전한 신부로 살기를 소원합니다.
모든 것이 성경 전체의 핵심 기본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본을 언제나 잊지 않을 때에 우리가 멀리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해석함에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하지 않고 많이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혹시 세부적인 면에서 잘못 된 것이 있더라도 큰 줄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 기본이 뭡니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뭡니까?
어린 양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건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의 기본이에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