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의 한국 가요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여가수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기이며, 그 중에서도 이미자와 패티김이 당대 최고의 톱스타로서 양대산맥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특히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는 1960년대 가요계를 대표하는 톱스타로서 한시대를 주름잡았을 뿐만 아니라, 50년 이상의 세월을 노래에 바치며 한국 가요계를 상징하는 살아있는 전설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한편 패티김은 이미자와 데뷔 동기로서 절친한 언니, 동생 사이이면서도 희대의 라이벌로 한시대를 풍미했습니다. 패티김은 트로트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에 세련된 팝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2008년 MBC 무릎팍도사 방영내용 참고)
이미자와 패티김은 1960년대뿐만 아니라 1970년대 들어서도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면서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1960년대의 “이미자 vs 패티김”, 1970년대의 “남진 vs 나훈아”는 1980년대의 조용필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최고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면서 한국 가요계를 이끌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미자는 광복 이후부터 조용필의 등장 이전까지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전설로서 존경받고 있습니다. 특히 1964년에 이미자의 대표적인 히트곡 “동백아가씨”는 35주 연속 가요순위 1위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습니다.
(역대 2위 기록은 1981년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기록한 24주 연속 1위)
광복 이후로 한국 가수들은 초창기에 미8군 무대에서 활약을 펼쳤습니다. 이미자, 패티김, 신중현, 위키리, 최희준, 윤복희 등의 한시대를 풍미했던 인기가수들도 대부분 미8군 무대 출신이었습니다. 미8군 무대 출신의 가수들은 1960~70년대의 대중가요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 한명숙은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으며, 윤복희는 “코리안 키튼즈”라는 그룹의 일원으로 높은 인기를 얻은 뒤 솔로가수로도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일본과 동남아 등지의 아시아 각국에서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윤복희의 소속 그룹이었던 코리안 키튼즈는 유럽에서 높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비록 “한류”라는 단어 자체는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지만, 해외 무대에서 한국 대중가요의 위상을 떨치며 “원조 한류스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남자가수 중에서는 최희준이 “하숙생”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최희준은 1965년에 “TBC 방송가요 대상”에서 한국 대중가요 역사상 최초로 가요대상을 수상했으며, 1966년의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도 최초로 가수왕(최고 인기가수)의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최희준은 오늘날에도 가요계 원로로서 존경받는 동시에 정계에 입문해서 국회의원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 외에도 현미, 이금희, 차중락, 배호, 남일해, 황정자, 박일남, 유주용, 위키리, 김상희, 최양숙, 정원, 최희절, 이상열, 강소희, 한상일 등의 남녀 인기가수들이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키보이스, 블루벨스, 자니 브러더스, 김 씨스터즈, 코리안 키튼즈 등의 그룹사운드(당시에는 “중창단”이라는 표현이 더 자주 사용됨)의 활약도 두드러졌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는 한국 가요계의 불세출의 작곡가 3인방이 등장했는데 박춘석, 길옥윤, 이봉조는 수많은 불멸의 히트곡들을 작곡했습니다. 당시 한국 대중가요계의 양대 톱스타는 이미자와 패티김이었는데 이미자와 콤비를 이뤘던 박춘석, 패티김과 콤비를 이뤘던 길옥윤은 가장 존경받는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2010년에 타계한 고 박춘석 선생은 광복 이후 한국 대중가요 역사상 가장 많은 히트곡을 배출해낸 작곡가로서, 한국 대중가요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박춘석 선생의 영결식장에는 이미자, 패티김, 남진, 문주란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가요계 인사들이 참여해서 고인을 애도했습니다.
박춘석 선생은 1960~70년대에 걸쳐서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등으로 대표되는 당대의 톱스타들의 수많은 노래를 작곡하며 히트시켰고, “박춘석 사단”은 한국 대중가요 최고의 스타군단을 상징하는 표현이었습니다. 박춘석 선생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대중가요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박춘석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전설적인 작곡가로 꼽히는 길옥윤은 패티김과 황금콤비를 이루며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탄생시켰습니다. 특히 작곡가 길옥윤과 가수 패티김의 커플이 결혼한 이후에는 “박춘석 사단”의 역량은 주로 이미자, 남진, 나훈아에게 집중되었고, 길옥윤은 패티김의 노래를 작곡하는 데 거의 모든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길옥윤과 패티김의 커플은 “세기의 커플”로 불렸고, 두 사람은 이혼한 이후에도 여전히 서로를 음악적인 동반자로서 존중하는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길옥윤은 패티김과의 결별 이후인 70년대 후반에는 혜은이를 대스타로 키워냈습니다. 한편 이봉조는 박춘석, 길옥윤과 함께 한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작곡가로서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이봉조는 현미, 정훈희 등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배출했으며, 작곡가 이봉조와 가수 현미 부부는 대표적인 연예인 커플로서 세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서 전국민의 심금을 울리며, 대중들과 함께 울고, 웃고, 애환을 함께했던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진정한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랐던 역사적 인물로서는 윤심덕, 이애리수, 고복수, 이난영,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현인,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의 이름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부터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 톱스타이자 국민가수의 계보는 “남인수(1940년대) -> 현인(1950년대) -> 이미자(1960년대) -> 나훈아(1970년대) -> 조용필(1980년대)”로 이어져왔습니다.
특히 이미자는 조용필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한국 가요계를 상징하는 대표적 전설로서 군림해 왔으며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각종 기록들을 달성했습니다. 광복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서도 1940~50년대의 “가요황제 남인수”와 광복 직후의 “대한민국 1호 가수 현인”, 1960년대의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1980년대의 “가왕 조용필”은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사의 찬미”(윤심덕), “황성옛터”(이애리수), “타향살이”(고복수), “목포의 눈물”(이난영), “애수의 소야곡”(남인수), “나그네 설움”(백년설), “눈물젖은 두만강”(김정구), “신라의 달밤”(현인), “님과함께”(남진), “고향역”(나훈아),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 등의 노래와 함께 함께 한국 대중가요 역사상 불멸의 국민가요로 통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가요계의 양대산맥이었던 “이미자 vs 패티김”의 라이벌 관계는 “남인수 vs 백년설”(1940년대), “남인수 vs 현인”(1950년대), “남진 vs 나훈아”(1970년대)의 라이벌 구도와 함께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가장 높은 상징성을 얻고 있는 “세기의 라이벌” 관계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공중파 방송국인 MBC, KBS 등에서 시행한 연말 가요시상식에서는 주로 이미자가 매년 대상과 본상을 휩쓸다시피 하면서 국내 가요계의 절대강자로 군림했습니다. 패티김은 해외진출 실적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국내 대중가수 중 최초로 일본에 초청되고 미국에 진출해서 공연하는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수많은 기록을 작성했습니다.
패티김은 2008년에 현존하는 국내 대중가수 중에서 “최초”로 50주년 기념공연을 개최하는 기록도 작성했습니다. 1년 후인 2009년에는 이미자가 뒤를 이어서 50주년 기념공연을 개최했습니다. 패티김과 이미자의 뒤를 이어서 하춘화, 남진, 나훈아, 조용필 등의 거물급 중견가수들도 2000년대 중~후반에 걸쳐서 40주년 기념공연을 개최하며 가요계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이미자와 패티김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변함없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수많은 히트곡들을 남겼고, 인기에서뿐만 아니라 “보컬리스트” 자체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인 가창력에서도 원로가수들 중에서 톱클래스 수준으로 손꼽힐 정도로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패티김은 2012년에 기자회견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이미자는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국내 가요계의 각종 기네스 기록 중에서 주로 패티김은 “최초”, 이미자는 “최다”라는 수식어가 붙는 기록들을 작성해왔습니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미자와 패티김은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살아있는 전설”로서 결코 잊혀지지 않는 불멸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