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문을 두드리라
요한계시록 3:20
홍제원교회, 아현교회, 상동교회, 용두리교회
主欲入人心門之內而叩之, 主人不開, 惜哉. 人有罪無望至落心放浪者, 主曰爾開門, 我入爾則爾可安心受福矣. 家內不和, 姑婦相鬪, 父子相鬪, 終至如破船, 主曰我入爾則爾可平安受福矣. 敎會內有紛爭, 敎友疾視職員, 職員疾視擔任者, 互相紛爭, 失墜敎會之神聖矣. 主曰我入殿則敎會可平安受福矣. 古有畵家, 畵此光景, 月落西山, 風雨凄凉, 有一乞人, 彷徨道路, 至一家叩門則門堅閉不開, 讀畵者一人買此畵來, 掛之壁上, 家有四子, 父呼而問此畵之光, 家主人何故不開也? 第一子曰 主人懼盜故不開, 誠哉是言也! 敎友亦然, 恐懼而不入敎者多, 牧師說敎恒言罪, 敎友置意者懼而不入, 飮酒者亦有, 吝錢者亦有恐懼, 守主日則恐妨營業, 不欺人則亦妨商業, 罪人有多懼, 第二子曰主人深睡矣, 敎人有深睡, 無事者睡矣. 敎人欲多事, 祈禱守主査經尋訪慰問, 互相顧護, 何暇有深睡之暇乎? 無知故深睡, 七處女迎主之說, 我之前程有如何危險, 有如何展開, 彼僧侶不睡佛供, 有一人枕鐵路而睡, 種種轢死, 當恐懼可矣. 第三子曰 無愛故不開, 此人可無愛之心故不開云, 敎會有無愛之敎友, 雖聞說敎, 心冷如氷, 偶有不合, 輒相怒目不容人不迎人, 又有驕心, 美洲白人黑人之互相不容者, 容人甚非易事也. 第四子曰門內無人故不開云, 無人者何也? 無生命者也. 人而無生不可謂之人矣. 故無人. 敎友亦然, 脫去舊人着其新人後可謂人矣. 常人着舊衣而禮拜, 無活動無熱誠, 只守主日已耳. 有生命而後可謂敎人, 主日貴於天下者生命也, 吾等如此爲信, 僉位主叩門卽開焉. 叩者開之主有訓, 吾等卽開迎主, 則主賜我平安幸福榮光.
주께서 사람의 마음의 문에 들어가려고 문을 두드리셨지만 주인이 열어주지 않아서 애석해 하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희망이 없어 낙심하고 방랑하는 자에게 주께서 ‘너는 문을 열어놓아라, 내가 너에게 들어가면 너는 안심하고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집안이 불화하여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싸우고, 부자간에 서로 싸워서 마침내 깨어진 배처럼 되었을 때, 주께서 ‘내가 너희에게 들어가면 너희는 화평의 복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분쟁이 있을 때 교우는 직원을 미워하고, 직원은 담임자를 미워하며 서로 분쟁하면 교회의 신성함이 실추됩니다. 주께서 ‘내가 전당에 들어가면 교회가 화평하고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옛날에 화가가 있어서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달이 서산에 지고 비바람이 쓸쓸히 부는데, 거지 한 사람이 길 거리에서 방황하다가 어느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니 그 집 문은 굳게 닫혀있고 열어주지 않는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보던 한 사람이 그 그림을 사가지고 집으로 와서 벽 위에 걸어 놓았습니다. 그 집에는 네 명의 아들이 있는데 그는 그 아들들을 불러다 놓고 이 그림의 광경을 설명하다가 ‘왜 이집 주인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첫째 아들이 ‘주인이 도둑인 줄 알고 열어주지 않았습니다’하였습니다.
진실로 이 말은 그럴 듯합니다. 우리 교우들도 그러하므로 두려워서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 데 늘 죄에 대하여 설교하니 교우로서 교회에 뜻을 둔 자가 두려워서 교회에 못 들어옵니다. 음주하는 자도 있고, 돈에 군색한 자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라고 하면 영업에 방해될까봐 두려워하고, 사람을 속이지 말라고 하면 또한 상업에 방해될까봐 두려워합니다. 죄인은 두려움이 많습니다.
이번에는 둘째 아들이 답하기를 ‘주인이 깊이 잠들어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교인 중에는 깊이 잠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 일이 없는 자가 잠을 잡니다. 교인이 일이 많으려고 하면 기도로써 교회를 지키고, <성경>을 조사하여 심방하고 위문하며 서로들 사이에 돌보고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어느 겨를에 깊이 잠들 시간이 있습니까? 무지하기 때문에 깊이 잠듭니다.
일곱 처녀가 주님을 맞이한 이야기에는 우리의 앞길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 있으며, 어떻게 전개되는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승려가 잠 자지 않고 불공을 드리는 것이나, 어떤 사람이 철길을 베고 잠들었다가 종종 치어 죽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이번에는 셋째 아들이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과연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사랑이 없는 교우가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도 그 마음은 얼음보다도 차갑습니다. 우연히 그 마음에 맞지 않으면 문득 성나는 눈으로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며 사람을 맞이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또 교만한 마음까지 가집니다. 미국에는 백인과 흑인이 있어서 서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용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넷째 아들은 ‘집안에 사람이 없었으므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명이 없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교우도 역시 이와 같으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바뀐 뒤라야 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옛날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지만 이런 사람은 활동도 없고 열성도 없습니다. 다만 주일만을 지킬 뿐입니다. 생명이 있은 뒤라야 가히 교인이라고 이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르기를 ‘천하보다 귀중한 것은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거든 곧장 열어주어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면 열어라’고 주께서 교훈하셨습니다. 우리가 곧장 문을 열어 주님을 맞이하게 되면 곧 주께서 우리에게 평안과 행복과 영광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