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위만조선-평양재만주 衛満朝鮮 (平壤 在満洲〉1
衛満朝鮮 (平壤 在満洲〉
史記에 朝鮮王衛満은 燕人이니 燕王盧綰이 反 하여 匈奴에 入하거늘 满이 亡命하여 党을 聚함이 千余人이라.
随結와 蠻夷의 服으로 東走하아 浿水를 渡하여 空地에 居하니 上下障에 真蕃과 朝鮮과 蠻夷 차차 燕齊의 亡命者를 没属하여 王이 되고 平壊에 都하였다 하고 索隱(書名)에 일렀으니 満의 姓은 衛라하고 応邵가 말하되 遼東에 険陵県이 있으니 朝鮮王의 旧都라 하고 王瓚은 이르되 険城이 楽浪郡 浿水東에 있다하고 括地志에 말하되 平壤은 근본 漢의 楽浪郡 王険城이라 합니다.
魋結人來漢祖年
同時差擬趙龍川
箕王可恨無分別
塡補梟雄博士員
魋結人이 漢祖年에 왔으니
同時에 그릇 趙竜川을 擬하였도다.
可히 恨없다 箕王이 分别이 없어
梟雄 博士員에 填補하였더라.
魋(音퇴仝椎) 結(音게仝鬆)는 蠻夷의 首飾이니 椎形과 같은 結髮이라 漢祖는 漢太祖 劉邦이니 漢祖年은 漢太祖의 年代라 同時는 衛満이 朝鮮에 来附하던 때라. 差擬은 그릇 擬望함이라 趙竜川은 未詳하나 古代의 어떤 勇将인 듯하다.
箕王은 衛満이 来附할 時에 撫納하였다. 無分別은 分别치 못하였다 하니 満의 賢否를 分別치 못하였다.
梟雄은 勇力있는 英雄이라 博士員은 箕準이 衛満으로 하여금 博士를 拝하여 西辺을 守하니 満이 亡党을 誘引하여 衆이 甚히 많았다.
이에 詐히 人을 遣하여 準에게 告하되 漢岳이 十道로 至하니 들어가 宿衛(王宮을 護衛함이라)한다 称하고 드디어 箕王을 攻하니 箕王이 満으로 더불어 戦하여 대적하지 못하였다.
<한글>
위만 조선 (평양이 만주에 있었다)
사기에 의하면 조선왕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었는데, 연왕 위참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에 항복하자 위만이 망명하여 무리를 모으니 1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수결과 만이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가서 압록강을 건너 빈 땅에 자리 잡으니, 위아래로 진한과 조선과 만이가 차례로 와서 연, 제나라의 망명자들이 합류하여 왕이 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다.
서명 '소은'에 위만의 성은 위라고 하였고, 응소가 말하기를 요동에 험령현이 있어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 하였으며, 왕훼는 험성이 낙랑군 압록강 동쪽에 있다고 하였고, 멱지지에 평양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검성이라 하였습니다.
수결인들이 한나라 태조 때 왔는데
동시에 영웅 조룡천을 흉내 내었나 보구나.
한이 없다. 기자왕이 분별 없이
영웅 박사에 임명하였더라.
수결은 만이의 머리 장식으로 정모 모양의 묶음머리이다. 한조는 한나라 태조 유방이니 한조년은 한 태조 연간이다. 동시는 위만이 조선에 들어올 때다. 차외는 그르치게 추측함이고 조룡천은 알 수 없으나 고대 어떤 용장인 듯하다.
기자왕이 위만이 들어올 때에 받아들였다. 무분별은 분별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위만의 현명함 여부를 가려내지 못했다는 말이다.
횡웅은 용력 있는 영웅이고 박사원은 기준이 위만으로 하여금 박사가 되어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니 위만이 망명객을 끌어모아 인원이 아주 많았다.
이에 사람을 보내 기준에게 "한나라 왕들이 10갈래 길로 이르렀으니 들어와 왕궁을 지키자"라고 말하고 드디어 기자왕을 공격하니 기자왕이 위만과 싸워 대적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