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란(內亂)
목종(穆宗) 때에 강조(康兆)의 난이 있었다. 이것은 간신 김치양(金致陽)으로 인하여 왕의 신변이 매우 위험하게 되어 서북 군권을 자기고 있던 강조를 불러 들여 간신을 없애려 하였으나 결국 도로 강조의 손에 죽임을 당하여 국내가 크게 소요하고 현종(顯宗)이 위에 오르니 나라의 무슨 틈을 엿보던 결단이 강조의 죄를 묻는다 칭하고 왕 2년 1월에 대군을 거느리고 입구하거늘 현종은 부득 피난하여 양주, 광주, 나주까지 파천하고 적군은 개성까지 들어와 불을 놓아 궁궐을 말큼 태워 버리거늘 왕이 일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니 걸단이 이에 물러 가니라. 고려에서는 이로 인하여 국력이 쇠약하여지고 민심이 소요하였다.
왕이 적군이 물러감을 듣고 동 2월 23일에 귀경하여 4월에 걸단에 사신을 보내어 반사(班師)를 치하하였으나 걸단이 왕이 친히 오지 않음을 말하거늘 왕이 응치 않았다. 그 후에 걸단이 6성을 도로 달라하니 6성은 곡 흥화(興化) 통주(通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정주 구주(龜州) 등 고을이라. 왕이 이것도 응치 않으니 또 여러 번 동병하여 내침 하다가 마침 그 나라에 동경장군 대연림(大延琳)이 발해 회복운동을 일으켜 걸단을 반공함으로 6성 환부문제가 흐지부지 그쳐졌다.
또 인종(仁宗) 때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의 란으로 인하여 크게 소란하였다. 이자겸을 외척으로 그 딸 제2 제3 제4를 다 궁중에 들여 왕비를 삼고 내외 권세를 차지하여 자기를 반대하는 자는 중상하여 죽이고 귀양 보내니 왕의 아우 대방공보(帶方公俌)와 평장사 한안인(韓安仁) 등을 다 주육하고 그 족속 50여인이 다 정부 요직에 있으며 그의 자질의 집들이 온통 왕경을 차지하고 세력이 전국에 가득하였고 왕은 허위에 있을 뿐이다. 조신들이 다 그를 꺼리고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 없더라. 인종을 중심으로 꺼리고 미워하나 어이할 도리가 없었다. 그때 내시 김찬(金燦)과 추밀원사 지록연(智錄連)과 록사 안보린(安甫鱗) 등이 서로 의논하고 왕께 알리어 이자겸을 토벌하기를 꾀할 새 왕이 평장사 이수(李壽)와 김인존(金仁存)에게 보내어 의논케 하니 이 김이 절대 불가를 주장함으로 왕이 드디어 상장군 최탁(崔卓)과 오탁(吳卓) 등을 불러 이 일을 부탁하였다. 최오 양인은 항상 이자겸과 척준경이 전권함을 미워하더니 왕이 밀조(密詔)를 내려 이 일을 도모할 새 왕 4년 2월에 최오 양인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척준경의 아들 순을 죽여 시체를 궁성밖에 버리니 이자겸의 무리가 궁장을 뛰어 넘어가 자겸에게 고하니 자겸이 백관을 모아놓고 이 일을 의논할 새 척준경은 급히 군사 수십 인을 거느리고 궁성밖에 나아가 소리를 외치니 성내에 있는 무리는 대군이 온 줄 알고 두려워 나아가 싸우지 못하였다. 그 이튿날 준경의 무리가 성문을 깨치고 들어가 동화문(東華門)에 나무를 쌓고 불을 놓으니 그 불이 내전까지 미치게 되니 왕이 부득이 군신을 거느리고 산호정(山呼亭)으로 피하니 자겸이 왕을 자기 집으로 옮기고 자겸이 남궁에 거하니 왕이 또 연경궁에 옮기니 자겸이 군기고 병기를 자기 집으로 옮기고 불궤(不軌)를 꾀하거늘 왕은 신변이 매우 위험하여 거처습식을 자유로 하지 못하더니 이때 자겸이 또 척준경과 틈이 있어 준경은 은퇴를 선언하였다. 왕이 가만히 준경을 불러 왕실에 힘쓰라 부탁하니 준경이 응답하고 고요히 기회를 엿보았다. 준경이 이에 상서 김향(金珦)에게 밀서(密書)를 보내어 양인이 합심하여 우선 가병 20여인을 거느리고 궁을 향하여 갈 새 또 정유황(鄭惟晃)의 군사 백여 인과 합하여 바로 군기감에 가서 병기와 갑주를 끄집어내어 각각 가지고 같이 연경군에 들어가 왕을 모시고 군기감에 계시게 하고 준경은 승선을 시켜 이자겸을 부르니 자겸이 임의 형세 그릇된 줄 알고 도망하는 것을 붙잡아 가두고 자겸의 처 최씨는 영광군에 귀양 보내고 그 자손과 무리들은 다 원지로 귀양 보내다. 척준경이 또 공을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여 제신들의 준경을 공격하는 소장이 들어와 암타도(巖墮島)에 귀양 보내니 이자겸의 귀양간이 일년 후이라. 인종 4년 2월에 또 상안궁으로 옮겼으니 개경은 궁궐이 다 불타고 거할 곳이 없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