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글쓰기
가을 수채화
2019.11. 향기 이영란
가을의 덜 익은 노랑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노란 물감에 연두 빛을 섞어야 할 것이고, 한껏 익은 노랑을 위해서는 황토물감을 더 넣어야 할 것이다. 좀 더 진한 나무색을 섞으려 치면 노란 빛은 그만 기분이 상해 땅으로 내려앉아 버릴 것이다. 점점 짙어지는 은행나무 잎을 보는 일, 그 아래를 걸으며 노란 조명을 받아 얼굴이 상기되는 일, 벚나무 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거나 가지에서 막 떨어진 기색이 역력한 잎자루를 주워 모으는 일. 그 색으로 둘러싼 공간에 들어서는 일이 몹시 부끄러운 일이라 여겨지는 시절이다. 사춘기 소녀처럼, 혹은 과년한 여인처럼 연모의 남자와 함께 있는 일에 시선을 어디에 둘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무슨 말을 해도 자연스럽지 않아 속마음을 들키고 말 것 같다는 두려움에 한껏 떨고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봄꽃이 10대의 싱그러운 그저 밝고 화사한, 앞날의 시련을 알지 못하는 철없는 아름다움이었다면, 저 가을 나무에서 뿜어내는 붉은 노을빛의, 짙고 순수한 노란 빛의 잎들은 긴 시간을 품은 아름다움이다. 그만 포기하라고 흔들어대던 거센 바람과 싸운 이야기를 모두가 숨죽인 밤에 별과 달에게 전하며 살아나왔다. 어린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영글도록 지키고, 씨앗을 땅에 떨어뜨리거나 그 바람에 힘껏 실어 보낼 때까지 온 힘을 바친 자들만 만들어 낼 수 있는 색이다.
3주 동안 주말을 통째로 반납하고 수업을 들었다. 연구년 수업시수를 채우기 위해 듣게 되었지만 아이들과 학부모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조정하고 그들의 입장과 감정을 충분히 듣고 공감해 줄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내용이어서, 먼 거리와 긴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조정에 관한 지식을 익히고, 역량을 지닌 조정자의 역할에 따라 많은 사회적, 정서적 비용을 경감할 수 있음을 배웠다. 교사들이 현장에서 실제 겪었던 수많은 사례를 가지고 조정자가 되기도 하였고, 또 갈등의 당사자 역할을 맡아 깊은 감정이입을 해서 조정의 현장에 참여하기도 했다.
급식소에서 줄을 서 있다가 뒤에 있던 4학년 여학생이 앞에 있던 같은 반 남학생을 밀치는 바람에 남자아이가 벽에 부딪쳐서 앞니 3개가 부러지는 사고가 났다. 나는 그 남학생의 아버지가 되어 가해자에게 진정어린 사과와 4천만원을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열렬한 연기를 펼쳤다. 남자아이의 이는 영구치여서 임플란트를 할 수 있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이를 적당히 붙인 채로 생활해야 했고, 향후 발생할 치료비와 정신적 위자료까지 포함한 금액이었다. 객관적으로는 과도한 금액이었지만, 피해자의 아버지가 되어 연기를 할 때에는 막무가내로 나오는 당사자를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가해여학생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밀치는 상황에서의 우발성, 남자아이가 장난을 치고 있었던 바람에 더 가속이 붙어 큰 충돌이 일어난 일, 상대방의 어려운 가정형편을 듣고 있노라면 또 나의 요구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연기는 나에게 도무지 어울리는 옷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연기라는 것이 어떤 척을 잘하는 가식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경험과 감정, 사랑과 분노 같은 것들을 꺼내는 자연스러운 표현활동이라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배움에 대한 상세한 부분이 이 글의 독자들에게는 크게 소용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 하다. 다만 그 시간들 중에 스쳤던 작은 출렁거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칫 세련되지 못할 경우, 나는 재미도 없는 그저 그런 이야기를 갖고 떠드는 우스운 사람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을 땐 글을 다 지워버리고 맨 손으로 모임에 참여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청둥오리 두 마리가 호수를 다니고 있었다. 발의 물갈퀴로 열심히 물을 헤쳐가야 했겠지만, 물 위로 보는 오리는 유유했다. 원앙처럼 색이 곱지는 않았지만 깃털은 윤택해 보였고 두 마리가 함께 다니는 다정함이 좋았다. 적당히 뿌연 색으로 섞어 처리하는 풍경화의 배경처럼 정병산이 있었고 그 앞에 자리잡은 창원대 기숙사 앞 호수 주변으로 긴 산책로가 나 있었다. 청춘의 봄날을 한껏 부풀게 했을 벚나무 잎은 환한 대낮에도 시선을 뺏을만큼 충분히 붉었다.
내가 받는 연수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담당자는 대학동기인 K였다. 오십을 바라보는 동기들은 교감 발령을 받은 사람, 승진 대상자에 오른 사람, 장학사로 근무하는 사람, 그리고 나처럼 평교사로 있는 사람, 혹은 그만 둔 사람 등으로 나뉘었다. 간혹 동기들 중에는 같은 학교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는데,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자기장은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혹은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더 가까워지거나 달라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데면데면했던 사이는 여전히 그랬고, 별로 감정을 실어 사람을 대하지 않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속으로 ‘뭐 저런 경우가 다 있어’ 했던 친구는 관계의 끝 역시 비슷한 모양새였다. 그것은 남녀의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동기나 동창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지 않는다. 내가 친했던 동창 1~2명을 만나기 위해 애매한 사이의 동창 7~8명을 만나야 하고, 만나서 기분 좋을 리 없는 1~2명이 포함되어 있다면, 보고 싶은 동기를 만나는 기쁨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내가 아이슬란드나 우루과이 같은 곳에 살아서 만날 수 있는 한국인이 그런 사이의 동기 밖에 없다면 달라질 수 있을까? 글쎄다. 장담은 못하겠다.
연수원에서 근무하는 K는 기억이 맞다면 교지편집국에 몸을 담았을 것이다. 아득하지만 확인하지 않아도 될 듯 했다. 내가 몸 담았던 신문사와 그 무용(無用)함을 겨룬다면 순위의 치열함을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훗날 사람에 대한 호감이 그 무용한 공간에 있었음이 될 수도 있다니 모를 일이다.
K가 기획한 연수에 1학기에도 참여한 적이 있었다. 대학 때 같은 과도 아니었고 말을 섞거나 같이 무엇을 한 일도 생각나지 않아서 어색한 인사정도만 나누었다. 말을 놓기도 힘들어 깍듯한 예로 연수를 참신하고 알차게 꾸린 데 대한 감사의 인사를 문자로 보냈다. K도 내게 인사를 전하며 통영 세병관에서 진행했던 연수장면을 답장으로 보내주었다.
연수에 참여한 교사들과 운영진인 K는 연수시간 참여문제로 약간의 신경전이 있었다. 주말을 거의 통째로 바쳐야 하는 시간이었고, 누구나 학생의 입장이 되면 지각이나 슬쩍슬쩍 빠지고 싶은 충동은 거의 필수다. 나는 서로에게 있었던 오해를 설명하며 연수 자체가 가진 높은 가치 때문에 그게 큰 문제가 아니라는 부분을 전했다. 대부분 연륜이 있는 교사들이었고 섣부른 감정표현은 좋을 일이 없었다. 나는 K가 오해로 인해 스스로 힘들지 않기를 바랐다.
다음날 내가 겨우겨우 9시에 맞추어 허덕거리며 강의실에 도착했을 때 K는 2층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K가 보여주는 환한 웃음과 친밀함에 다소 어리둥절해졌다. 이어 그가 속한 연구모임에서 발간한 책을 주었고, 그 안에는 긴 글로 적어내려간 인사가 들어있었다. K는 연수를 여는 인사말에서 한결 밝고 누그러진 얼굴로 선생님들에게 좋은 시간이 될 것을 격려했다. 연수 둘째 주에는 텀블러를 들고 가지 않아 K에게서 컵을 빌렸고, 빌린 컵을 갖다 주면서 이런저런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다음 주에 점심이나 한번 먹자고 말했다.
연수의 마지막 주말이 되었다. 나는 수더분한 선생님들과 한 조가 되어 모의조정을 진행하면서 낄낄거리거나 서로 놀려먹기도 했다. 내가 맡았던 학급의 일도 조정사례로 삼으며 그 당시의 일에 대해 다시 되새겨 보는 시간도 되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힘들어 했던 사례는 넘쳐났고, 학부모들의 지나친 개입과 오해를 바퀴로 달고 일방통행으로 질주하는 현장에서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했다.
연수 기간에 함께 점심을 먹었던 일행들에게 K와의 점심에 동행할 것을 제안했더니 “선생님, 저희는 잘 모르는 분이고 해서 좀 불편할 것 같아요. 그냥 두 분이서 함께 드세요. 회포도 푸시고요.”란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아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풀고 자시고 할 회포도 없는데, 둘에게 확 던져진 시간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정해진 약속을 파기하는 것은 더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K가 근무하는 사무실로 갔더니, K는 내게 자신이 기획했던 마술연수에서 썼던 도구를 잔뜩 들고 와서 내게 시연을 보였다. 분홍색 하트스펀지로 손을 이 쪽 저 쪽을 옮겨가며 보이는 시연은 어설펐고, 나는 속으로 ‘얘가 이런 걸 왜 하나?’ 싶기도 하고, 또 애를 쓰는 모습이 조금은 귀엽기도 했다. 나는 학교에서 마술부 동아리 아이들이 하는 걸 봐서 그 마술을 조금 알기도 했고, 상대방 가까이에서 하는 시연은 그 속임수가 들통나기 십상이며, 정작 마술에 필요한 건 엄청난 쇼맨쉽이어서 안 그런 척 하면서 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나는 K가 준비한 열 번 중에 다섯 번을 실패하는 링 마술까지 지켜보고 그것을 배워야 했다. 링이 아래로 떨어질 때 2~3바퀴를 구르면서 줄에 걸려야 하는데 링은 굴러야 할 의무에는 관심이 없고 잡아당기는 중력에만 성급히 굴복해서 바닥으로 추락하기 바빴다. 링을 굴릴수록 얘는 그럴 마음이 없으며, 앞으로도 떨어지기에 바쁠 것이라는 확신만 강해졌지만 나는 ‘연습해 볼게’하고 약속했다. 우리는 창원대 기숙사 앞 호수 길을 지나 점심을 먹은 후에 가을에 피울 수 있는 꽃들을 총 출동시킨, 사방에서 햇살이 들어오는 예쁜 까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 날 수다를 떠느라 우리는 오후 수업 시작 시간을 넘기고서야 강의실에 도착했고, 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정실습에 참여했다.
짧은 해는 금방 자취를 감추어버려 수업을 마쳤을 때는 이미 까무스럼한 밤이 되었다. 나는 차를 멀찍이 주차해 두고 성산아트홀과 창원시청이 있는 은행나무 거리를 오랫동안 걸었다. 아련한 노란색은 검은 밤을 뚫고나와 은은한 조명이 되어주었고, 용지호수 주변의 가로등은 호수와 주황빛 단풍을 반짝거리게 해 주었다. 나는 남편에게 풍경이 예쁘다고 전화를 걸었고, 남편은 ‘그게 뭐 어쨌다고? 아직도 관사에 안 들어가고 있냐고? 아이들과 국밥 사먹고 목욕하고 집에 들어간다’고 했다. 교보문고에서 K에게 줄 소설을 사서 다시 긴 가을 밤을 걸었다. 남편의 관사로 들어가서 냉장고에 묵혀 있는 반찬을 버리고 싱크대 가스레인지 주변을 청소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비닐봉투와 재활용품을 정리하고 난 후 K에게 전할 글을 몇 자 적었다.
“비슷한 데를 바라보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대학시절을 보내었네. 잠시 함께 한 시간은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20대의 시간을 다시 채색하고 온 느낌이었어. 잘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여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읽었던 두 권의 소설 추천해 본다. 네가 기획한 연수는 내게 손꼽히는 인생강의였다. 고마워.”
K는 오랫동안 그림책 연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책 읽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장자 이야기와 같은 여전히 무용해 보이는 것들에 대한 나의 관심사에 눈을 반짝이며 진심으로 공감해 주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다양한 경험치로 인해 생겨나는 방어기제로 위축되는 데 대한 씁쓸함을 말했다. 그의 아내는 오랜 교직생활에 심신이 지쳐 있었고, 그만 두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했다. 연구년 중인 나를 부러워했으며, 계속되는 주말 연수로 아내와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저 K의 내면을 조금 더 들여다 볼 수 있는 지혜와 안목을 지녔더라면 내 인생이 그만큼 위로가 되었을까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과거에 대한 가정만큼 부질 없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가능하지도 않은 일에 상상력을 낭비할 만큼 순진한 나이도 아니다. 다만 이 가을 노란 은행잎과 벚나무의 붉은 낙엽과 단풍의 풍경에 잠시 등장한 K로 인한 설레임은 스물 한 살에서 지나온 시간들을 세어보게 만들기도 하고, 다른 이를 보며 서성거리는 느낌, 자꾸만 명치 끝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 같은 것들로 밤은 오래오래 이어져갔다.
마지막 날 역시 지각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10분이나 지나서 강의실에 도착했다. 머리에 바를 오일을 챙겨오지 않아서 부석한 머리카락이 신경 쓰이는 아침이었다. 쉬는 시간 K에게 잠시 들러 책을 전했고, 다른 동료가 있어 별다른 말을 하지도, 할 말도 딱히 없었다. 붕 뜬 머리 때문에 말이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연수를 마친 후 우리는 잠시 스치듯 만났고 짧은 악수를 나누었다. “소설 고마워. 읽을거리 찾고 있었던 중인데, 잘 읽을게.”
K는 단체문자로 ‘긴 연수 참여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는 인사를 보내왔고 나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K의 문자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지난 여름에 보낸 사진은 먼 발치에서 찍은 환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만 골라 따로 보내준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