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탄생 눅2:1-7
본문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 나타납니다. 이 아기는 인류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해 탄생하셨습니다.따라서 아기의 탄생은 단순한 탄생이 아니라 전인류의 탄생(거듭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아기의 탄생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역사를 타고 오신 주님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사실은 주님께서는 이 땅에 초역사적으로 오시지 아니하시고 역사를 타고 오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1)기독교가 신화에 근거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기독교에 관한 모든 것을 신화로 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비롯하여 부활과 승천,재림,천지 창조 등을 모두 신화로 여길 뿐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탄생이 가이사 아구스도에 의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옮겨진 사실은 우리에게 예수의 탄생이 결코 신화가 아님을 밝히 보여 줍니다. 비단 주님의 탄생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승천등이 사실에 근거함을 가르쳐 줍니다. 2)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근거로 하여 생각해 보면(미5:2) 가이사 아구스도가 때마침 명령을 내려 예수께서 나사렛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은 결코 그의 명령이 자의나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특히 세상의 권세는 하나님 통치 아래 있습니다(롬13:1).
2.말씀을 응하신 주님 주님께서는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나사렛에서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께서 선지자의 증거를 받고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심과 동시에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단 한번도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의 영광을 드러낸 적도 없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7:4). 또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7:6). 그리고 최종적으로 죽음 앞에서 자기의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기를 구하셨습니다(눅22:42).
3.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주님 주님의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단순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이미 야곱에 의해서 예언되고(창49:10) 발람에 의해 예언되며(민24:17),하나님에 의해 직접 약속된(삼하7:12-16)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약속된 메시야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살펴보면 다윗 왕국은,①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그의 나라는 어떠한 전쟁에서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음에도 항상 이겼습니다. 이는 만군의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삼하5:10).② 의로운 나라였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다윗은 의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실 정도로 의롭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행13:22).
4.동정녀에게 탄생하신 주님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태복음에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한 후에 탄생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마1:24,25) 누가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까지 요셉과 마리아가 혼인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누가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가 이렇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강조한 이유는 ① 예수님의 무죄성(히4:15),원죄의 무유전성(창3:15)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고,② 주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임과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심을(요1:1)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5.구유에서 탄생하신 주님 1)그의 겸손입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고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도 부리실 수 있는 엄청난 권세를 안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 지위와 권세로써 이 세상 위에 군림하시고 억압하기 위해 오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겸손한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마21:5). 2)백성들의 배척입니다. 베들레헴은 아버지 요셉의 고향으로서 주님은 사관은 물론이요 가정집에서 태어나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은 그가 장차 자기 고향(눅4:24),자기 백성(요1:11)에게 배척받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배척받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야로서의 삶입니다.
목자들에게 임한 기쁨 소식 눅2:8-10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비천한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타고난 재능도 없고,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지혜도 건강도 없는 자들을 소흘히 대하지 않으십니다. 버리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에게 무관심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오히려 정상적인 사람에게 갖는 곱절의 관심을 가지십니다.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해 줍니다. 본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왕궁이나 성전에 있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성탄의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들에게 가장 먼저 성탄의 소식을 알리셨는지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기쁨의 소식을 받은 목자들 1)성실하였습니다. 먼저 본문에 나타난 목자들은 충실한 천국 일꾼의 모형입니다. 그들은 아기가 탄생하신 그 캄캄한 밤에 '들에'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낮의 피로를 씻고 잠자리에 든 그 시간에 그들은 여전히 들판에 있었습니다. 양떼를 믿고 맡겨 준 주인의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주인에게 있어 참으로 진실된 종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성탄의 그 큰 기쁨이 가장 먼저 전해진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습니다. 마땅히 그 영광은 기름진 배를 따뜻한 온돌방에 대고 안락하게 잠자는 게으른 지위높은 자에게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들처럼 애를 태우며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된 종에게 돌아가야 합니다(시126:5,6 ;마25:21,23). 2)깨어 있었습니다. 또한 본문에 나타난 목자들은 천국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신실한 성도의 모형입니다. 그들은 마치 그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기쁜 소식이 전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나 한 듯이 한밤중이 되었는데도 자지 않고 깨어 있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그들이 깨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만 전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천국을 사모하는 자들,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마25:1-13). 3)비천하였습니다. 본문의 목자들은 또한 천국의 영광을 소유할 준비가 이미 끝난 자들의 모형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곳간과 함께 이미 마음까지도 비워져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임재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들어가실 수 있었고 그들의 마음과 삶의 주인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천국 복음이 가장 먼저 전파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과 같이 주님의 기쁜 소식을 듣고 영광을 보기를 원한다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또한 마음 비우기를 원한다면 물질,세상 지위 등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마6:21 ;19:22).
2.목자들이 받은 것 1)하늘 영광을 입었습니다.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목자들에게 임한 것은 세속의 재물이나,명예,권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야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세상 임금의 영광만 보아도 그것이 큰 기쁨이요 영광인데,그들은 하늘 아버지,하늘 임금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세속의 젖을 주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잠간 있다 없어질 영광을 주시기 않으십니다. 하늘의 영광,경건한 성도의 영혼이 기뻐할 신령한 복을 내리십니다. 2)두려움을 그치게 하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목자들은 거룩함을 대할 때마다 생기는 죄로 인한 두려움을 그치게 하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시리라는 암시에 가까운 소식을 전달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모든 세상 짐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죽음,고통은 모두 죄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은 죄인을 의인으로 선고하시는 하나님의 법정 결정문을 가장 먼저 통고받은 것입니다. 3)온 세상에 미칠 기쁨의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기쁨은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비이기적인 그들의 성품에 합당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기들만 소유하고 남에게 거만하게 자랑 할 성질의 선물은 그들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한 선믈은 오히려 그들의 본성에 부담을 주고 양심을 괴롭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웃과 나눌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는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 눅2:11,12 본문은 베들레헴 말 구유에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이야기에 대한 기록입니다.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은 미가 선지자에 의하여 메시야가 탄생될 곳으로 예언되었으며(미5:2),본문에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구속사적 직분에 대하여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예수께서 탄생하신 곳 1)베들레헴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11절). 위에서 살펴본대로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로서 메시야가 탄생할 고장으로 예언된 곳입니다(미5:2). 당시에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한 사이였고 나사렛에서 목수직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ㅅ게금 징수를 위한 목적으로 호적령을 내려 이들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혼한 마리아는 그때 성령으로 잉태한 아이가 해산할 기한이 차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호적령,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여행,해산 기일이 임박한 마리아의 동행 등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 예언한 메시야의 탄생이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움직임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정치,인간들의 활동,생물학적인 인간의 기능 등,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동원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구속사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2)떡집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은 '떡집'예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생명의 떡'(요6:35)이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광야에서 내린 '만나'(요6:49)와 비교하셨습니다. 이 '떡'은 애굽에서 자유를 찾아 탈출하던 유월절로부터 상징화되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양의 피로 문설주에 바르고 누룩을 넣지 아니한 떡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출12:1-11).이 떡과 피는 광야 40년 동안에는 만나와 생수로 나타나고(고전10:3,4),예수 때에 이르러 그것은 살과 피로 표현되었으며(요6:54-58),마침내 이 살과 피는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로 상징화되고 결국 그것은 모든 사람을 죄에서 해방하여 영원한 자유를 보장하는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생명의 떡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와 떡집 베들레헴에 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여 '참된 양식'(요6:55)으로서의 그의 생애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2.예수께서 탄생하신 환경 1)여행중 '베들레헴'은 요셉의 '고향'이었으며,그는 지금 여행 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이 '여행'중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은 다 '고향'을 떠난 '나그네'들입니다. 그리고 이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며,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여행 중에 탄생하셨다는 것은 나그네 인생에게 내리시는 축복이며 삶의 목적을 제시하는 귀중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말구유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12절). 예수께서 말구유에 탄생하신 것은 그의 '자기 비하'의 시작이었으며,'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낮은 자로부터 가장 좊은 자까지 죄악의 고난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장 낮은 삶으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가장 높은 곳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빌2:6-11).그의 비천한 삶의 시작은 어부와 세리와 창기와 병자들과 실직자들의 친구로서의 삶의 출발이며,머리 둘 곳이 없는 가난한 삶의 첫걸음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가난과 비천함을 '거룩함'으로 승화시킨 삶이었습니다. 3)표적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2절). 그리스도의 화육은 신비 중의 신비이며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말구유에 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시며 인간은 모두가 한형제임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예수의 탄생과 메시야로서의 직분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절). '구주','그리스도','주'는 모두 메시야의 구속사역적 직분을 나타낸 것입니다. 구세주,그분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우리의 영원한 왕이요,제사장이요,선지자이시고,모든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이 모든 구속사역적 직분 안에 모든 진리와 은총과 축복이 들어 있습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눅2:13,14 천사가 목자들에게 성탄을 고지하고 나자 하늘에는 아름다운 천군 천사의 찬양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천사들은 찬양을 통하여 가장 먼저 그리스도의 탄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알립니다. 그리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가 됨을 알립니다. 짧은 찬양이지만 이 찬양은 기독교의 교리를 내포하고 있으며,기독교가 신본주의,하나님 우선의 종교임을 밝혀 줍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찬양이 나오게 되었는지,이 찬양의 의미는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하나님께 영광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리스도의 화육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는 근원적인 문제로 그리스도의 화육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하나님은 손상된 의가 보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과 관련됩니다. 이 관련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인간의 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근원적인 문제는 죄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범죄와 그 이후에 계속된 범죄로 인해서 인간은 타락의 길로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상처를 입혔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손상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손상당하신 만큼 진노를 내리셔야 했습니다. 진노를 내리셔야 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진노가 인간에게 임했습니다. 인간이 아담의 범죄 이후로 삶에 심한 고통을 느껴야 했고,최종적으로 죽어야 했던 것은 바로 이 진노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이 범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진노로 죽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또 하나의 성품인 자비의 속성과 모순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속성에 의해 인간의 죄를 방치한다면 그것은 의의 속성에 모순되므로 그럴 수는 없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속성이 모순됨 없이 다 만족될 수 있는 방법을 계획하셨는데,그것이 바로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자리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게 인류를 향한 모든 진노를 다 쏟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죽어가는 것을 두고 보실 수 없는 사랑의 속성과 죄를 간과할 수 없는 의의 속성을 다 만족시키신 것입니다(롬3:26,30 ;5:8).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를 이루실 초석을 마련하신 것이므로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거스렸습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엡2:2 ;5:6). 그러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함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1:19)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 2 아담으로 오신 주님은 자신만 '예'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모든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하나님 앞에서 '예'하셨습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을 순종하는 아들들로 바꿔 놓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해야 하나 할 수 없는 일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으므로 그것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2.땅의 평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암시합니다. 1)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은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손상시켜 진노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잠시의 고통이지만 영적인 죽음은 영원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십자가로써 이 담을 허셨습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4-16). 2)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또한 천사들이 '땅에는 평화'라고 노래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만을 원수로 만들지 아니하였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원수 관계를 수없이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끝없는 전쟁과 다툼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위해 직접 죽으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6:35,36).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7,18).
비천한 무리를 위해 오신 예수 눅2:15-17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 기사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는 복음서 가운데 유일하게 그가 가축 우리에서 태어났으며,천사들의 찬송을 받았고,이어서 목자들의 경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말하자면,예수님께서는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나 근본적으로는 온 세상 인간들로부터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메시야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한밤중에 하늘에는 천사들이,땅에는 몇 사람의 목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 탄생의 비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1.목자들은 비천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은 저들에게 큰 계시를 주셨습니다. '천사가 가로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10절). 목자들은 지위와 권력과 명예와 부가 없는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입니다. 당시 그들은 법정에서 증인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신용을 받지 못하고 멸시받는 계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자들이 먼저 주의 영광에 접하고 천사로부터 구주 탄생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가난하고 천한 직업을 가진 목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과 계시를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하거나 비천한 직업이 천국에 관한 소식을 접하는 데 지장이 되지는 않습니다. 천국의 축복은 때때로 위대하고 부하며 권력 있는 사람에게는 숨겨지고 가난하고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개 교만하거나 현실에 안주할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하고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가진 것을 잃을 것이 염려되어 새로운 사상이나 현상에 마음문을 열고 동참하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2.목자들은 맡은 일에 충실하였기에 하나님의 계시와 주를 만나는 기쁨을 우선적으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2절). 목자들은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책임을 등한히 하여 잠자거나 자리를 떠나지 않고,깨어서 양무리를 배회하며 이리와 승냥이들과 도적들로부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였으므로 그곳에 임한 천사들의 계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가서 보라'는 소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자기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다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인물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밀 타작을 하다가,모세는 양을 치다가,엘리사는 밭을 갈다가,베드로는 고기를 잡다가 각각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의 맡은 일에 충성하는 신자에게 사명을 주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큰 것으로 네게 맡기노라'는 말씀대로,하나님은 맡은 사명에 충성하는 자에게 보다 좋은 것을 보이고,보다 좋은 길로 인도하고,보다 큰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3.목자들은 천사의 계시를 믿었습니다. 천사는 '너흐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표적이니라'고 했는데, 그 표적은 목자들로 하여금 믿기 어려운 것일 수 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이스라엘을 위한 구주가 나신다면 그는 분명히 비천한 구유에 누워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천사의 계시를 믿었고,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였습니다. 이것은 목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이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유에 누인 아기'는 신이 인간의 배척과 고난의 한 중간에 그 자리를 펴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날 베들레헴에는 분명코 아기 예수 외에 어떤 갓난아기도 구유에 누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시니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나시고 고운 옷을 입으시고 아름답고 화려한 방에 누워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구주 되심의 표적은 그가 헤어지고 찢어진 강보에 싸여 낮고 천한 구유에 누워 있었던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탄생의 비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받으신 그 첫선물은 구유요,마지막 선물은 십자가였습니다. 그가 인류의 구세주로서 받으신 것은 고난과 비천이고 세상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낮고 천하고 모욕을 당하는 이들의 친구가 되고,친히 동정하고 구원할 수 있는 구주시라는 것이 천사의 메시지가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낮고 천한 이들의 벗이 되고 있습니까? 도시의 빈민들과 노동자 농민들의 삶에 지치고 허덕이는 생활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자세가 갖추어져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와 목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는 역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탄의 메시지를 대하는 자세들 눅2:18-20 목자들은 천사의 기쁜 성탄 메시지를 들은 후 지체하지 않고 베들레헴에 달려와 아기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들려준 성탄 메시지를 아기 부모와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제 성탄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태도들을 살펴봄으로써 성탄에 합당한 신앙적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불신하는 사람들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18절). 목자들은 천사의 성탄 메시지와 마굿간에 가서 확인한 사실들을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온 허다한 사람들에게 기쁘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매우 놀라긴 했으나 구주를 경배하러 마굿간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① 메시야가 왕궁에서 출생치않고,마굿간의 말구유에서 천하게 태어난다는 것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한 것처럼 세속적 사고 방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세주께서 그렇게 비천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인생들로 하여금 '종신토록 두려움 없이'(눅1:75) 자기를 섬기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긍휼하신 처사에서인데,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시9:6 ;53:1-3 ;슥9:9).② 저들은 또한 하나님의 천사들이 성탄 소식을 거룩한 제사장들에게 알리지 않고,들사람들에게만 특별히 전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천하고 약한 사람들을 택하사 스스로 지혜롭고,부족함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고전1:26-29).오늘날도 성탄의 기쁜 메시지는 겸허하게 마음의 눈이 하늘로 열린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2.영광 돌리는 목자들 1)믿고 순종함 그들은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즉각 베들레헴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처럼 그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 달려갔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상식적으로 예루살렘 왕궁에서 태어났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상식을 뛰어넘는 천사의 메시지를 단순히 믿는 순수함 믿음과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말구유 안의 구세주를 환영할 수 없다면 십자가 위의 대속함도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고전1:18-25). 2)확신을 가짐 목자들은 천사들이 고지해 준 구유의 표적을 가서 확인함으로써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 우리 중에도 성탄의 메시지를 듣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의심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확인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연구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의심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나면 우리에게는 의심 대신 확신이 찾아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3)담대하게 전파함 목자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16,17절)을 뜨거운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그들의 열정은 우리의 나태함과 배은망덕에 대한 무언의 꾸중이다.그들이 외양간의 말구유에서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우리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까지 보고서 왜?...힘차게 헌신할 수 없을까?'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찬탄하십니다(롬10:14,15). 3.생각하는 마리아 1)겸손한 순종 마리아는 자기가 구주의 모친이라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전에 자기의 정절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의심을 당할 때에도,침묵했듯이 이제 자기의 결백함이 드러났지만 역시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잠잠히 성탄의 섭리를 순종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이처럼 겉을 단장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 세계를 단장함에 있습니다(벧전3:3-6). 2)신중함과 진실함 본문의 '지켰다'라는 말은 '기억한다'라는 뜻이며,'생각한다'라는 말은 '여러 부분을 합친다'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성탄의 현상만을 보지 않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신중하게 살피고 그 깨달은 것을 마음속에 진실하게 간직했습니다(롬12:1-3). 이것이 성탄 메시지를 접하는 우리 인생이 취해야 할 합당한 신앙적 자세입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12:24).
할례와 세례 눅2:21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유대인의 할례 의식이 주는 교훈은 그리스도인의 세례 의식이 주는 교훈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둘 다 모두 육신의 부정을 씻어버리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남성의 양피끝부분을 날카로운 차돌로 잘라냄으로써 훗날 구원의 피흘림을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그리고 세례는 육체를 물로 씻어내는 의식을 통하여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할례는 육체적인 고통을 통하여 마음을 주께 바치는 행위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17:10). 모든 남성을 난 지 팔 일 만에 그 피를 베는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언약의 표징을 삼았습니다. 이 할례 의식은 이스라엘인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디오피아나 남아프리카 애굽 등지에서도 행해지던 풍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교적 동기가 아니라,몸의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해졌던 것인데,차츰 그 의미가 정결 의식으로 바뀌어 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근동에 있어서 남성들에게 할례 의식을 행하는 것은 도덕적 행실에 분명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양인들의 급한 성격을 규제하고,악한 생각을 억제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즉 나쁜 생각이 그 마음에 떠올랐다 하더라도 그가 할례의 언약을 통해 자기가 거룩하게 생활하고 죄를 짓지 않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되새기므로 그 악한 생각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할례 때에 흘리는 피는 개인적인 계약을 확고히 하게 했습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자신의 아들의 양피를 베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출4:25)고 했습니다. 그러나 할례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순종하게 만드는 데 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고 했습니다. 이것은 할례의 본뜻이 마음의 할례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을 향하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못한 사람들'(행7:51)이라고 한 말은 할례의 의미가 유대 민족의 전역사를 통해 그러한 영적 의미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2.할례는 믿음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도 율법을 좇아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백성과 언약을 맺기 위해 구태여 할례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예수님께서 율법을 준수하신 것은,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신 분으로 그 일을 행함에 있어 조금도 결격 사유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징표입니다(창17:2,4,9).이 언약은 믿음의 언약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믿음의 언약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며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3:17)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의 언약은 모세를 통해 맺어진 사역의 언약(출24:8)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율법적이기보다 복음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과 한 하나님의 약속은 영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할 것이라'는 언약은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갈3:7)이라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무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8:39)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꺼이 할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속한 교회의 규례를 준수하고 순종하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3.그러나 할례와 세례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이 할례에서 세례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사실 그 의식의 과정이 유사한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할례와 세례는 명백히 그 성질을 달리합니다.첫째, 예수님께서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나 후에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만약 할례가 세례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면 또다시 세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할례는 율법의 의무이지만,세례는 복음의 의무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영적 순종과의 관계이지 외적 상징에 있지 아니한 것입지다. 세째,할례는 남자에게만 한정되었지만,세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세례는 심령 속에 이루어진 외부적인 표현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마음이 세례되어 영혼이 구원되었다는 표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남자와 여자가 차별이 없고,가문이나 가족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든 민족,모든 백성에게 있어야 할 보편적인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
아기 예수님의 결례 눅2:22-24 우리는 예수님께서 정결 예법을 받으실 필요가 없는 거룩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이 율법들에 참예하신 주님의 깊으신 뜻과 그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율법을 지키신 예수님 1)결례의 날 '결례의 날'(22절)이라고 한 것은 정결함을 위한 날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남자아기를 낳은 부인은 40일간 부정하다고 여겼는데(레12:1-4) 따라서 그 날짜가 찼을 때 산모들은 순결을 위해서 번제 및 산 제물로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누가복음 원본에는 '그들의 결례의 날'이라고 기록되어 주님과 마리아가 똑같이 정결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2)그날을 지키신 의미 예수님은 원죄이든 자범죄이든 전혀 무관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정결 의식을 행한 것을 기록한 데에는 우리에게 깊은 의미와 교훈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습니다.① 복음 사역에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지키지 않으셨다면 당시의 유대 율법주의 사회 같은 곳에서는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방인이나,배교자로 낙인 찍힐 뿐입니다. 바울 사도가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22)라고 한 것처럼 성도는 세속적인 규례들을 백안시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주님처럼 참예하고 또 이용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② 우리 인생을 구원코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갈4:4,5)라고 했듯이 인생에게 율법을 주신 분이 율법 아래의 세계로 오신 것은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되어서 율법을 저주와 심판으로부터 우리 인생들을 해방시켜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갈3:10-13). 이 세상의 인위적인 종교들은 대개가 노력을 통해서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라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헌신되신 예수님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아기를 주께 드리고'(23절).율법에 의하면 모든 이스라엘인 중에 태어난 맏아들은 하나님게 바쳐야 하며(출13:2,12,15) 이 예식을 5세겔의 은으로써 대속하도록 되어 있습니다(레27:6). 이는 그들이 출애굽시 유월절의 장자 재앙에서 구원받은 이래로 지켜진 규례입니다(출13:12). 아기 예수님도 마리아와 요셉에 의해서 역시 성전에 헌신되셨습니다.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① 첫열매로 드려졌습니다. '첫해에 처음 난 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23절)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장차 인류를 대신하여 부활과 구원의 첫열매로 천국에 들어가실 것을 보여 주는 예식입니다(롬11:16 ;고전15:20).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은 복음의 첫열매이며,하늘나라의 분깃을 얻을 백성이 되었습니다(롬16:5 ;약1:18).②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주님은 5세겔의 속죄 대신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며,죄인 된 우리를 거룩하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한 영원하신 대제사장이 되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히9:12 ;24-26,28). 이러한 사역은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성도들에게 계승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2:9)이라고 했습니다.성도들은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과 화평의 다리를 놓는 중보자적 삶을 살아야겠습니다(마5:9 ;요20:23 ;고후5:20,21). 3.가난한 자가 되신 예수님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혹 어린 반구들로 제사하려 함이더라'(24절).마리아가 정결 예식의 제물로 드린 비둘기들은 당시 빈민들의 제물이라고 불리워졌던 것입니다(레12:6-8).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주님의 가정이 매우 가난하고 궁핍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마리아는 가난 했지만 최고의 예물을 드린 여자가 됐습니다. 그녀는 전에 천사에게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라고 했듯이 여성으로서 생명 같은 처녀의 정절을 드렸으며 태의 열매인 예수님마저도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바쳤습니다. 즉 그녀는 자기 삶의 의미와 행복을 모두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한 성도라고 해도 비관할 필요가 없습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과 꿈과 삶을 산제사로 드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롬12:1-3). ②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영원하신 친구이십니다. 가난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누리신 분복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오셨으며,또한 그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며 가난하셨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세계들을 부요하게 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고후8:9).그러므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주님과 동행하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고후8:10) 사람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시므온 눅2:25-27 여러 주석가들이 본문에 나타나는 예루살렘의 시므온을 유명한 힐렐의 아들이자 가말리엘의 아버지인 시므온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추론을 뒷받침해 줄 만한 아무런 자료도 없으며,오히려 당시의 종교 지도자층이 대개 타락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본문의 시므온은 한 평민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타당하게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껍데기뿐인 종교 지도자보다는 평민이지만 의롭고 경건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에게 메시야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1.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1)윤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말은 곧 그가 바르고 정직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유대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율법의 명한 바 사랑의 원리에 서 있는 사람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메시야를 대망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바르게 가지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질 때 그는 자신은 종교인이지만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웃과의 관계도 정확하고 바르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혼탁한 사회를 바라보면서 자신도 타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가 그러하므로 더욱 자신을 바르게 할 이유로 삼은 것입니다. 2)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의로왔다는 말씀은 그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는 불의에 침묵하거나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불의에 침묵하고 방관하는 사람을 결코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불의를 참지 못함을 나타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뜨거운 기도를 드렸든지,분노를 터뜨렸든지,불의를 책망했든지 그는 그의 방법으로 불의를 대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신앙인은 불의에 의해 자신의 의를 꺾지 아니합니다. 2.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하여'.시므온은 사회적인 사람,사회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인간만을 사랑하는 인본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최대의 관심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며 거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이성에 옳은 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시는 대로 살았습니다. 자기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았습니다. 3.이스라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1)자기 민족을 사랑하였습니다.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은 매우 초라하였습니다. 애굽의 종으로 있었으며,나라도 없이 광야에서 40 년간을 유리하기도 하였습니다. 가나안을 차지하고 나서도 주변의 강대국 블레셋,암몬,모압,에돔 등을 비롯하여 페르시아,앗수르,헬라,로마 등에 의해 수없이 많은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였습니다. 자기 민족의 비극적인 상황을 사랑했으며,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다시 세워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2)선민을 사랑하였습니다. 그의 조국 이스라엘은 선민이었습니다. 선민이되 끝없이 하나님께 범죄한 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범죄한 민족일지라도 그는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그에게는 의로운 마음과 함께 자비한 마음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범죄자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려 주시기를 기대하였습니다. 4.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1)그리스도의 강림을 보게 될 것을 지시받았습니다. '주의 그리스도를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성령을 받은 그는 큰 능력이나 예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가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의 눈,혹은 세속적인 시각을 버리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것은 지극히 작은 일일지 몰라도 그에게는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가장 기뻐할 일이었습니다. 2)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규례를 행하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그가 그리스도인신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이를 가능케 하였던 것입니다. 후에 가버나움,벳새다,고라신의 사람들이 그 많은 이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사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깨닫는 것은 성도를 비롯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장 큰 축복은 예수님을 구주로 바로 알아본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구주를 구주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만큼아니 큰 불행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의인 시므온의 찬송 눅2:28-33 본문은 의인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서 하나님께 찬송으로 영광을 들린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① 메시야를 뵙게 된 것을 감사하고,② 그로 인해 자신이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된 것을 고백하며,③ 장차 주님의 영광스러운 사역과 직책의 성격을 예언한 것입니다. 의인 시므온에게 임했던 구원의 은총과 감격은 오늘날 모든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풍성하게 주신 바 된 것입니다(엡1:3).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의인의 찬송을 상고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에도 속함받은 백성의 감사와 찬송이 풍성하게 흘러 넘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영원한 안식을 얻게 됨을 찬송함 시므온은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29절)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뵙기 전까지는 이 땅에 거해야만 한다고 성령님께 명령을 받았지만(26절) 이제 그 언약이 이루어졌으니 괴롭고 고독한 순례자의 삶을 청산하고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성도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입니까? 참된 성도라면 죽음을 결코 두려운 것으로는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성도는 자신 안에 영생이 있음과(요일5:11-13) 또 죽음 저 너머 편에 어떤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주 안에서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고후5:1) 내가 안다고 했으며,따라서 선교의 사명만 아니라면 어서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이것이 더욱 좋다'(빌1:23)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성도가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다가 시므온처럼 주님이 부르실 때 즐겁고 미련없이 삶을 마무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2)성도의 생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시므온도 안나처럼 매우 고령이었을 것이며 36-38절,따라서 고대 식민지 세계에서 가난한 고령의 노인의 삶이란 비참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요5:1-7). 쇠잔해 가는 육체의 고통,벗들과의 슬픔의 사별,소외감과 궁핍,또한 언약을 기다리는 단조롭고도 권태로운 무미 건조한 생활과 퇴락해 가는 망국의 역사에 대한 회한 등,참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딤후4:18)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영적,도덕적,사회적으로 더욱 혼탁하여 가는 세대에 거하는 우리들도,신앙적 삶에 사망의 캄캄한 구름이 덮일지라도 불신자들처럼 두려워하므로 악과 타협하거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우리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보장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고(마10:27-33),인내로써 성도의 직분에 충실할 때 시므온처럼 주님께 영광과 존귀로움으로 보상받고 감사와 희열에 넘치는 찬송을 부르는 승리의 날이 기필코 우리 앞에 도래할 것입니다. 2.메시야의 사역과 직책을 찬송함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30-32절).우리들은 시므온의 찬송에서 율법 시대의 신앙인일지라도 진실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직무에 대해 복음적인 견해와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들은 시므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복음의 빛을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온전한 감사와 찬미로써 주님의 은혜로우신 행사를 이웃들에게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1)거룩하신 빛의 사명을 찬송했습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이 '이방을 비추는 빛'(32절)이 될 것이라고 찬양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제외한 우리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엡2:12) 고독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빛을 우리에게 비취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암흑 세계와 인본주의의 미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살전1:9,10).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침 빛처럼 모든 어두운 이방 세계에 비춰야만 타락하고 무지한 심성들을 참되게 변화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앙의 세계 속에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벧전2:9) 해야만 할 것입니다. 2)영광의 직책을 찬송했습니다. 시므온을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찬송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조를 제외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선민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치욕의 골짜기를 거니는 역사였으며 시므온 당시도 로마의 식민지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리적이고도 현세적인 영광을 아직도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영적 이스라엘인들에게 우선 영원한 하늘의 영광을 주시려는 경륜이 시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롬11:25,26 ;갈6:16).
인생의 표적 눅2:34,35 기도의 사람 시므온은 아기 예수가 기다리던 메시야임을 증언한 후에 장차 주님의 활동과 운명에 대해서도 마리아에게 엄숙한 예언을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인류의 구원과 심판의 표적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심판의 원인이 되시는 예수님 시므온은 먼저 아기 예수에게 많은 사람의 심판의 근거로 세움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물론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요12:47) 이 땅에 오셨습니다. 1)예수님은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절실한 사랑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불의하며 원수 된 죄악 세상에 그 아들을 보내신 의미를 용서의 손으로(롬10:21), 화해의 요청으로(고후5:20,21),구원의 은혜와 인생 최고의 복락인 영생의 선물로(롬6:23) 묘사했는데,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롬5:8) 하신 하나님의 절실한 사랑의 의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크신 사랑에 응답치 못하고 주님을 배척하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심판의 표적이 되심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2)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구원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수많은 종교관과 세계관 및 가치관들을 가지고 영원함을 추구하지만,복음을 외면한 모든 사상들은 그 발로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3:5) 보려는 첫사람의 인본주의적 욕망을 근저로 하기 때문에 늘 자기 모순의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고전1:18-21).그러므로 주님 양편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들의 태도처럼 인생들은 진리의 푯대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떤 마음과 태도로 대하느냐에 따라 영원한 소속과 운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2.승리의 원인이 되시는 예수님 1)우리는 주님의 성육신을 인접함으로써 삶의 참된 의미를 얻습니다. 우리가 시므온처럼 마리아의 품에 있는 아기가 하늘에서 뛰어들어 오신 구세주임을 확신할 때 인생이란 영광의 보좌에서 뿐만 아니라 불행의 골짜기에서도 열심히 도전하고 살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2)주님의 대속의 은총을 믿음으로 삶의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라고 바울이 고백했듯이, 성도들의 모든 삶의 원동력은 주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용서와 용납을 늘 재확인함으로써만이 얻을 수가 있습니다(롬8:31-37). 3)또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삶의 참된 지혜를 얻게 됩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벧전2:7)이 되듯 인생의 행복과 승리는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원리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마5:5). 4)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삶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예배를 통한 주와의 영적 교통,교우들과의 교제,교회와 이웃을 향한 봉사 및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노력 등은 성도로 하여금 이 땅 위에서도 신앙인만이 누릴 수 있는 삶의 만족감과 성취감을 얻게 합니다. 5)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림으로 확신 있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성도의 특권적 소망은 온갖 모순과 부패와 갈등으로 모든 세상의 허무주의 풍조를 이기게 되는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3.마음의 거울이 되신 예수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35절)고 하듯 고난받는 예수께서 마음의 거울이 된다는 말씀은 마리아 뿐만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귀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1)겸허한 마음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모친이라는 영웅심과 세상 영광의 기대감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기 예수의 고난의 삶을 미리 말해 줌으로 바울처럼 은혜의 가시를 준 것입니다(고후12:7-10).우리가 우쭐해지고 자만해졌을 때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 밑에 선다면 곧 자기의 부족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주님과 늘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혈육이 앞으로 고난의 삶을 산다는 것을 알게 된 마리아의 마음은 칼로 도려내듯 아팠을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된 진실한 성도는 늘 주님과 한마음으로 기뻐하고 슬퍼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어느 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도 아무런 감동이 없는 자신은 슬퍼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사랑과 진리를 질식시키며,그리스도를 자주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일들을 바라보고 성도가 아무런 찔림이 없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과부 안나의 축복 눅2:36-38 본문은 경건한 여인 안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안나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이고,결혼하여 남편과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 되었으며,그녀는 언제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아 안나의 나이가 1백 세가 넘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나는 1백세가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주야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다가 할례를 받기 위하여 성전에 찾아온 아기 예수를 만나 그의 일생의 한을 풀고 인생을 마감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1.안나는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려서 결혼하였는데 남편과의 즐거운 삶이 7년 만에 끝났습니다. 남편의 죽음으로 한 여성의 불운한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과부로 늙는 외로운 한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젊은 과부에게는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젊은 과부의 주변에는 남성들도 기웃거리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으므로 어느 정도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력이란 오래 전에 사라져버리고 사랑받을 만한 것이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늙은 과부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없고,주위를 맴도는 사람도 없습니다. 눈은 이미 오래 전에 희미해졌고,머리털은 백발이 되었으며,얼굴은 몹시 쪼그라져 깊은 골이 패여 있으며,손도 투박하여서 볼품 없는 늙은 과부에게 흥미를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나는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가 역시 노인 문제입니다. 나이 들어 늙어감으로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소외되어 소망을 잃고 있는 노인들의 갈등이 빚어내는 사회 문제는 갈수록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만년에 배우자가 없는 노인에게 더욱 쓸쓸함이 더할 것입니다. 안나는 과부된 지 84년의 긴 세월을 배우자 없이 견뎌왔습니다.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었고,그녀의 소망은 예루살렘의 구속함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안나는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어 기나긴 세월 동안 그 외롭고 쓸쓸했던 마음에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 차는 순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구속하고,온 세상을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안나는 많은 노인들의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청년은 미래에 살고,장년은 현실에 살며,노인은 과거에 산다'는 말을 자주 인용합니다. 노인은 과거의 경험만을 먹고 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현실과 미래에는 필요치 않는 존재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을 쓸모없는 인물로 취급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뿐만 아니라,옛날에도 비슷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던 것 같습니다. 고구려 시대의 '고려장'풍습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대의 핵가족 사회가 확산되자 노인들은 이제'현대판 고려장'모습이 재현되고 있다는 말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서운 반사회적,반윤리적 작태는 한마디로 '노인은 쓸모가 없다'는 잘못된 풍조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노인들 스스로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자포 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노인들이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자포 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노인들이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안나를 보십시오.안나는 이미 나이가 1백 세가 넘었으나 성전에서 하나님께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지난 1세기 동안 팔레스틴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과 정복과 압제 등의 슬픈 역사를 몸으로 체험해 왔습니다. 이같은 고통은 모든 유대 민족의 가슴에 오래 전에 약속된 메시야에 의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의 소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안나도 그같은 소망을 더욱 강렬하게 갈망하며 성전에서 나라와 민족의 구원을 위해,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나이가 많은 노인이기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조카나 손자들의 눈치만 보며 살 것이 아닙니다. 또한 지난 과거만을 되뇌이며 인생을 마감할 때를 기다리고만 있어서도 안 됩니다.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가장 자유로운 정신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은 그러한 삶을 제공해 줍니다. 3.안나의 경건한 삶은 모든 그리스도의 모범이 됩니다. 안나가 선택한 길은 믿는 노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나이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권사나 집사의 직분을 맡은 자들도 있고,전혀 아무런 직분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중에 권사 직분은 나이 든 여성도가 받는 직분으로서 우리는 그들을 '기도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시대에 안나가 주야로 성전에 있어 금식하며 기도로 하나님을 섬겼던 것처럼,오늘날의 나이 늙은 여성도들도 교회 안에서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며 온 교우와 나라와 민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일찍이 안나가 과부로 일생을 주님 앞에 헌신하며 경건하게 살았던 것처럼,오늘날 나이 든 과부나 성도들도 주님께 소망을 두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구원의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맛보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성장과 가정 교육 눅2:39,40 본문에서는 누가가 예수님의 생애 중 그 성장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누가가 이 기사를 예수님의 부모가 유대의 율법을 충실히 지킨(39절) 기사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적으로 여기서 누가는 예수님의 성장과 그 부모들의 충실한 율법에의 준수를 연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께서 어떻게 성장했으며,예수님의 성장에 그 부모들은 어떤 역할을 담당하였는가를 생각해 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예수님의 부모들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39절). 성경적인 문헌 속에 예수님의 부모들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수태 고지를 받은 마리아에 대해서 조금 언급하기는 하지만 마리아와 요셉 개인들에 대하여 그리 많은 지면을 허락하지는 않습니다.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기록들을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상당히 진실한 유대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처지에서 율법을 충실히 지키려고 애쓰는 자들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메시야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의식과 깨달음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은 충실한 유대 주의자들로서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였고 구약의 율례를 진실한 마음으로 지켜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모의 이러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좋은 산교육이었을 것입니다. 그 가정의 문화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을 양육하는 풍토가 조성된 문화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가정의 교육 문제에 있어서 부모로서 이러한 문화적 공간을 만들어 줄 줄 아는,자녀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가정의 분위기를 조성시켜 가야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2.강하여짐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40절). 예수는 세월이 갈수록 자라며 강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강하여졌다는 말이 단순히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체적인 인격적 측면에서인지 본문을 통해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후자의 경우일 겁니다. 예수는 자라면 자랄수록 단순한 소년이 아니라 견고한 성품과 훌륭한 인격으로 성장해 나가고 아울러 육체까지도 강건하게 성장해 갔습니다.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독생하신 아들로서,요셉의 아들로서 건실하게 커나갔습니다. 일방적인 의미로 부모가 예수님을 가정에서 가정교육으로 양육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상당한 영향을 그 가정으로부터 받았다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오늘날 믿는 우리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시키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 3.지혜가 충족하여짐 예수님께서는 자랄수록 지혜가 충족해졌다고 하였습니다.지혜가 날로 충족되어가는 주님은 아마 회당에서 율법도 배우시고 토론도 하시고 하는 과정 속에서 점점 더 확고한 메시야 의식,즉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깊이 자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열두 살 되던 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의 지혜를 비롯한 모든 방면에 있어서의 지혜를 날이 가면 갈수록 체득해 갔습니다. 메시야로서 지녀야 될 기본요건들을 이때부터 하나씩 둘씩 경험하면서 깨달아 가셨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자기의 자녀를 공부 잘하는 사람으로,돈을 잘 버는 사람으로 키우기보다는 참된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 의미를 실질적인 삶 속에 투영해 가면서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4.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강건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한 소년으로 커갈 수 있었던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그 위에서 항상 보살피고 있었기에 이 모든 것들이 다 가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장케 한 요인 중 그 부모들의 역할도 중요하였지만,그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이 자기들의 자녀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가꾸어 나가면서 꼭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의 자녀들이 성장함에 있어서 가장 큰 요인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내 자녀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에 키울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내가 낳은 자식이기에 내 자식이라는 소유 의식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빨리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러할 때 본능을 넘어선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로 발휘되는 가정과 자녀로 존재해 갈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 눅2:41-43 유대인 남자들은 열두 살이 되면 율법이 정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또한 의무를 갖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율법의 규례대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열두 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신의 소명에 눈을 떴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본문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 1)율법을 지키신 예수님 우리는 유월절을 지키심으로써 율법을 복종하시며 율법 아래 들어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율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결코 율법을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 율법은 선한 것이었으며,거룩한 것이었습니다(롬7:12,16).그래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셨으며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마5:17,18 ;눅24:44 ;롬3:31). 본문에서 주님께서 십이 세 되던 해 율법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사실은 주님의 사역이 곧 이와 같이 율법을 완성시키는 사역임을 밝혀 줍니다. 2)유월절을 지키신 예수님 주님께서 본문에서 지키신 율법은 구체적으로 유월절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 절기는 유대인들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첫째,그것은 죽음에서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장자들을 치실 때 유월절 양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구원하셨습니다(출12:27). 둘째,억압과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억압과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하셨습니다(출12:11 ;신16:1). 따라서 주님께서 십이 세 때 유월절을 지키신 것은 곧 주님께서 유월절 양이 되셔서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고 죄에서 완전히 해방시키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고전5:7). 2.예루살렘에 머무신 예수님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아이 예수님은 유월절 제사를 마치고 부모님과 함께 집에 돌아가지 않으셨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예수님의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국한해서 거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그곳에 계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자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눅1:3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는 부모님께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인류를 대속하실 제물이실 뿐만 아니라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따라서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하셨던 것입니다. 3)예수님은 다윗 왕통을 잇는 유대인의 왕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약속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던 것입니다(삼하7:12 ;마1:1 ;롬1:3).따라서 그는 다윗성,혹은 시온성이라 불리우던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하셨습니다.그가 계셔야 할 곳은 나사렛 빈촌이 아니라 영광과 존귀를 받아야 했던 다윗 왕국이었습니다. 3.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신 사실을 몰랐던 요셉과 마리아 1)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신 사실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머물러 계셔야 할 이유조차도 몰랐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단순히 자신들의 아들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이전에 천사 가브리엘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은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의 본 모습입니다. 그처럼 많은 체험을 하고 예수님을 늘 옆에 모셔 두고도 그를 잊습니다. 그가 찬양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처럼 착각합니다. 2)세상 일에 바빴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신 사실을 몰랐던 것은 그들이 자기 일에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쓸데없는 세상의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였습니다. 그러한 나머지 그들은 예수님께 관심을 가질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너무 바쁩니다. 너무 급박하게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잊고 살아갑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을 모시고,예수님을 앞세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 뒤를 따라와 주기를 바랍니다.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반대가 됩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 눅 2:44-47 본문은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렸던 마리아와 요셉이 삼일 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해후한 사건과 유월절 행사 중의 하나인 산헤드린 공개 신학 토론회에 참여하신 소년 예수의 지혜로움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년기의 예수님을 근간으로 한 이 단편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여러 모습들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봄으로 성도의 구도적 삶의 방향과 자세를 얻고자 합니다. 1.찾아 헤매는 부모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찾되'(44절). 요셉과 마리아는 절기를 지킨 후 고향으로 되돌아가던 중 예수님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찾기 시작했습니다. 화려한 유월절 명절로 인한 삶의 희열과 만족감은 갑자기 혼란과 근심과 불안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진리 되신 예수를 찾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디에 있는지 그것은 찾는 구도적 삶의 방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진리를 잃어버린 줄을 몰랐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이 '동행중에'(44절) 있는 줄로 생각했었습니다. 팔레스틴의 여행길에서는 남정네들보다 여성들을 앞서보냈는데,그것은 여행 속도의 차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행객의 행렬을 다 보려면 하룻길이 소요되었다고 어느 역사가는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예수님이 마리아와 함께 먼저 출발한 것으로 생각했고,마리아 또한 예수께서 요셉과 함께 뒤따라올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이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을 평범한 삶의 행렬 속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맡겨진 삶을 성실하게 영위하고,이웃과 공유하며,즐기는 것이 곧 인생의 참된 도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시민적인 철학은 불치의 병이나,사회적 재난이나,죽음과 그 후의 문제 등 자기와 삶의 한계 상황들을 애써 외면하려는 허무주의적 사고에 불과합니다. 진리를 애써 외면하려는 자들입니다. 2)진리를 '인간'에게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친족과 아는 자 중'(44절)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이처럼 의식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친족 사랑,즉 인도주의를 삶의 이상과 최선의 가치고 여기고 있지만,인류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한 이기심 때문에 사상과 계급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어만 가는 고로 무신론적 인본주의의 치부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3)삶의 경험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45절) 갔다고 했는바 원문의 '찾는다'는 뜻은 오르락내리락 앞뒤를 찾으며,또한 전체를 뒤지면서 예수님을 찾아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사 이래로 오늘까지 인류는 모든 방법과 수단을 다하여 물질적,정신적,철학적 문제들의 해답을 찾고자 했으나,자기 모순과 시행 착오와 불가지론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4)결국 진리는 '성전'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사흘 후 성전에서'(46절) 공개 신학 토론회장에 있는 소년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인생이 진리를 만날 곳은 오직 하나님의 '성전 안'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며,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며,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이 시행되며,인생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며 우리의 마음과 삶은 성전화가되고(고전3:16),진리의 영이 우리를 삶의 온갖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실 것입니다(요8:31,32). 2.학자들과 토론하는 소년 예수님 유월절 기간 중에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일반인들을 위한 신학 공개 강좌를 개설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위대한 랍비들과 소년 예수님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며,그 공개 강좌의 열띤 분위기가 예수님을 사로잡은 것이었습니다(요2:17).우리는 여기서 자리를 구하는 자세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① 랍비들이 원하는 것은 부와 명예입니다. 공개 강좌 때 랍비들은 긴 의자에 앉아서 교육을 했으며,청중들은 땅에 앉아 가르침을 받았는데,어린 예수님도 청중으로 땅에 앉으셨을 것입니다. 랍비들은 소년 예수님의 신적인 통찰력에 대해 '기이히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진리에 대해 여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셨을 것입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성육신으로 인한 메시야 예언의 성취 등을 설명했습니다(49절). 그러나 세속의 부와 명예와 권위주의로 눈이 가리워진 랍비들은 감탄만 했을 뿐 앞에 계신 진리의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은 없었습니다(마23:2-26).그러므로 구도자인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청결한 마음입니다(마5:5).② 예수님은 믿는 자를 찾으십니다.'저희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46절) 하신 것은 이해를 위한 토론을 초월하사 구약 신학의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을 근간으로 이루어졌음을 저들에게 인식시켜,저들로 하여금 주님을 믿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요5:39).
소년 예수의 의식 눅2:48-50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소년 예수와 그 모친 마리아와의 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1.부드러운 책망 1)요셉과 마리아를 책망하심 요셉과 마리아는 드디어 성전 안에 있는 예수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절)고 하자 주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부드럽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찾는 의도와 목적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즉 평범한 부모가 미아를 찾듯,인간의 소유욕과 연민으로 예수님을 찾았느냐는 물음입니다. 저들은 이 아이가 메시야임을 한동안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서는 소유할 수 없는 분입니다. 오직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돼야 합니다. 2)우리들을 책망하심 본문의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이란 말씀은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만 함을'뜻합니다. 주님의 의식 속에는 늘 아버지 하나님의 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처럼 간혹 '땅의 일을 생각하는'(빌4:20) 적은 없었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 즉'(잠23:7)이라고 했듯,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일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2.자기 의식의 표현 1)소년 예수의 종교관 소년 예수는 하나님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분은 며칠 전에 시행된 '율법의 아들의 축하식'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눅2:42).그의 의식 안에 성령으로 인각된 신성은 기어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눅1:35). 이 의식은 창조 섭리론적인 관점에서의'인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도 아니요,성도에게 구속 섭리로 부여하신 '양자의 자격'도 아닌,본질적인 관계에서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2)소년 예수의 윤리관 예수님은 늘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와 사랑 안에서 행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있어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안에서 움직이시고 그 뜻 안에서만 멈추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과 명예를 침해하는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2:16)고 하시며 공의의 채찍을 휘두르셨고,그 아버지의 주권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2)고 하시며 사랑으로 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위기를 맞아 결단을 내려야 할 때엔 '내 원대로 마옵시고,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라며 ,의지를 아버지의 주권 앞에 굴복시키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삶을 통하여 자신의 본질을 증명하셨습니다. 3)소년 예수의 세계관 주님의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씀은 또한 모든 세계와 하나님의 권세하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악한 세대 속에 살아가면서 때로,모든 세계와 역사의 통치권을 사탄이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히11:3) 움직이는 하나님의 집임을 믿는 자는 결코 모든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어둡고,막다른 자리인 십자가 위에서도,죽음의 세계마저도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하에 있음을 믿었기에 원수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해 주실수 있었고(눅23:34),죽음의 순간이 찾아올 때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는 희망의 기도를 올릴 수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모든 세계가 발 하나님의 집이라는 세계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고전3:22,23). 3.신앙 교육의 중요성 우리는 본문의 소년 예수의 말씀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데,그것은 곧 신앙 교육,조기 교육의 영향력입니다. 1)부모들이 행해야만 하는 일들 소년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손에 이끌려서 단 한번의 예루살렘 성전 방문을 통하여 삶의 큰 전환점을 맞은 것입니다. 즉 그 동안 여명으로 비취던 메시야적 의식이 성전에 머물며 여러 신앙 교육적인 행사를 겪는 동안 확고하게 각성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리아와 요셉의 성실한 신앙생활의 분복입니다. 우리의 자녀도 어릴 때부터, 유한한 내 아이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교육시켜야 하겠습니다. 2)자녀들이 행해야 할 일 예수님은 열두 살 때 이미 위대하신 결심을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집에 있기로 말입니다. 이 결단은 빠를 수록 좋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집'(시27:4)에 거하지 않는다면 죄악과 허무와 심판의 '악인의 장막'(시84:10)에 거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장이 주는 교훈 눅2:51,52 본문은 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언급한 단 한 곳의 증언가운데 한 절입니다. 41절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의 행적은 사복음서 중에 오직 여기에만 나타난ㄴ 특별한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성장은 그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었을지라도 다른 인간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종교의 교주들이 신화적 신비 가운데서 태어나고 자라납니다. 예를 들면,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마야 부인의 몸에서 태어나자마자 동으로 일곱 발자국 서로 일곱 발자국 걸은 후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태어남과 성장의 상식을 초월한 신비스럽게 꾸며 놓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정상적으로 태어나 강보에 싸여 있었으며,나 지 팔 일만에 율법의 규례를 따라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성장 모습에 대한 누가의 증언은'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40절)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다른 아이의 성장 과정과 동일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1.예수님은 열두 살 때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세의 법에는 모든 이스라엘의 남바들은 매년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명령되어 있습니다(출23:14 ;신16:16).그것은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입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의 유대인들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지방에 있는 회당에서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틴 지역에 사는 유대인은 최소한 유월절만은 허용되었으나 위대한 교법사 힐레에 의하여 여성까지 참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은 경건한 유대인이었으므로 해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열두 살이 '율법의 아들'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교육은 어머니의 지도로 시작되어 6세가 되면 '쉐마'(신2:4)나 시편을 공부하게 되고,10세가 되면 율법의 해석인 '미쉬나'를 배우며,12세에는 '율법의 아들'로 본격적으로 율법을 배우고 익히며 그것을 지킬 의무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율법이 명하는 절기와 금식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열두 살이 되매 율법에 따라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그는 해마다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2.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예수께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51절). 신약성경에는 부모에 대한 효를 말할 때 '눈에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한 구절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에 복종하기를 원하신 주님께서는 육신의 부모에게도 효성과 순종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원하신 주님께서는 육신의 부모에게도 효성과 순조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30여 년 간 부모의 보호와 권위 아래 순종하며 받들어 모셨습니다. 훌륭한 시민을 만드는 것은 질서 정연한 가정의 훈련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효자의 집안에서 충신이 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작은 소망을 갖는 즐거움과 순수한 애정의 높은 가치를 배우는 곳도 가정이며,모든 도덕적 미적 안목과 순결을 유지하는 가장 튼튼한 안전 장치가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예수님은 그렇나 가정에서 근면하게 생활했습니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라고 불리웠던 것처럼 그 자신도 목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죽은 후에 그의 모친과 여러 동생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은 준비 기간을 끝마치고 공생애 들어감에 있어서도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 모든 가치 있는 능력을 축적하고,지식과 자각 뿐만 아니라 ,조용한 자기 성찰에서 오는 자제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마을에 있는 자신의 가정에서 훗날 십자가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3.예수님은 키가 자람과 함께 지혜도 자랐습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매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절).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모든 지식과 능력을 소유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잘못 이해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났으므로 신화적 인물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으므로 인간의 성장 법칙에 따라 키가 자라고 또한 지혜도 자라갔습니다. 인간이 키만 자라고 지혜가 자라지 않는다면 그는 '바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즉 ,모자라는 사람이 되어 사회에 공헌하는 인물이 되기는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음으로써 동시대의 어떤 유년이나 청년들보다 더 큰 지혜와 도덕적 탁월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항하기 쉬운 사춘기와 죄의 유혹을 받기 쉬운 청년기,또는 본격적인 사회적 활동으로 인기와 외로움을 한몸에 지니고 있었던 예수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던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비록 연약하지만,완전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몸소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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