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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 전덕기(全德基) 목사 소전(小傳) (1949년 5월)
나는 전목사를 안다 할 수 있어도 그 가정은 알지 못한다. 그는 일생에 자기를 숨기고 말하지 않음으로 상동교회(尙洞敎會)에 근 이십년 주재하여 있고 교우들이 부모와 같이 사랑하건만 전목사의 생일을 아는 사람이 없고 다만 그의 친지들에게 들으면 그는 병자생(丙子生)이고 그의 가정은 정동(貞洞)에 있었는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叔父) 전성여(全成汝)에게 양육을 받았다고 한다.
전성녀씨는 枾炭商(시탄상:북창동-숯장사)으로 생활하는 중 너무 빈곤하여 매양 그 조카에게 교육을 주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였으나 전목사는 근본 총명한 사람이라 이웃집 서당에 가서 어깨너머로 배워 들은 것이 약간 한자를 알게 되고 신학을 공부한 후에는 이것저것 섭렵하여 상당한 지식을 수입하였다.
어릴 때에 몹시 불량하여 사람을 잘 때리고 서양인들이 처음으로 정동(貞洞)에 들어와 있으며 무슨 교를 전파하매 사람들이 모여 성경을 공부하는데 전목사는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기와 공부하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더하기를 마지않았다.
한번은 선교사 스크랜톤 의사가 조선에 들어와 조선정부의 지휘로 전도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교육과 의료만 허하는 고로 스크랜톤 의사는 개업하고 사무원을 구하는지라. 전성녀씨는 그 조카를 병원에 소개하여 일을 보게 되었다.
스크랜톤 대부인이 전목사를 보고 끔찍이 사랑하여 범백을 가르쳐 주며 특히 가정예배를 볼 때에는 일부러 조선말을 사용하여 전목사로 말을 알아듣게 하였다. 전목사는 이에 감동을 받아 차차 진리를 배우게 되였다. 전에 돌을 던지던 일과 사람을 모욕하던 일을 다 뉘우쳐 고치고 양순하고 부드러운 새사람이 되었다. 전에 같이 놀던 친구들도 보고서 놀라며 하는 말이 “네가 어찌 이렇게 변(하였느냐” 하였다.
우리 감리교회(監理敎會)가 비로서 정부의 인가를 얻어 전도하기 시작하여 정동(貞洞)에 제일예배당을 짓고 상동(尙洞)에 제이예배당을 세우고 스크랜톤 목사가 주관하는 고로 전목사도 스크랜톤 목사를 도와 상동에서 예배하며 그 교회에서 권사와 전도사가 되었었다.
이때의 한국정부는 날로 부패하여졌다. 매관매작(賣官賣爵)하여 번군동상(煩君同上)하는 간세배(奸細輩)들이 朝權(조권:조정의 권리)을 잡고 있으며 따라서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가 간세배를 이용하여 조정을 어지럽게 하며 점차 한국의 이권을 잠식하는 때라.
민간유지의 발기로 독립협회(獨立協會)를 만들어(참조;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 창립, 1898년 11월 4일 해산) 장소는 독립관으로 정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회원들이 모여 시사를 토론하며 시정을 풍자하기 시작하였다.
회원의 대부분은 기독교인이 많았고 그 회의 주관은 이상재(李尙在), 이승만(李承晩),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등이다. 백성들이 시정의 부패를 원망하던 중 이런 정치의 비평의 소리를 듣고 모두 박수갈채하며 회일(會日)이면 민중들이 구름같이 모여 그 연설을 듣고 모두 통쾌히 생각한다.
그 때에 산림천택(山林川澤)을 일인(日人)에게 매도하려는 운동이 있었다. 본회에서는 이 소문을 듣고 각부 대신을 청하여 질문하여 그런 매국행위를 곧 정지하라고 권고하여 계약을 해제한 일이 있었고 그 외에 제반 행정에 긍(亘)하여 협회에서 아는 대로 간섭하여 그들의 비행을 규탄하니 이것이 시제(時霽)들이 가장 미워하는 바이요 협회를 해산하려고 고심 중이다.
그 때 전목사의 연설요지 일부를 들면 “항해학(을 알지 못하는 자가 함장이 되여 배를 몰고 험한 바다를 건너가 배가 암초에 걸려 깨여지면 배 안의 사람은 그 함장으로 인하여 다 죽고 말지라. 그와 같이 지금 대관들이 국가가 무언지 민족이 무언지 정치가 무언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정부요로에 있으며 나라를 지도하니 이 나라는 필경(반드시) 암초에 걸린 배와 같이 깨어질지라. 이 나라의 목숨을 담은 우리 민족은 다 멸망하고 말지니 이 일이 답답하지 않으냐”고 외치니 장내는 우뢰가 움직이는 것처럼 박수갈채하였다.
그 후에 협회는 필경 정부고관들의 시기로 부상패장(負商牌長장사꾼) 길영수(吉泳洙)를 시켜 협회를 습격하여 다시 모이지 못하게 되고 이상재(李商在), 이승만(李承晩) 양씨는 피검되고 일부는 도외(逃外)하고 일부는 전목사를 따라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로 몰켜(몰려) 들어왔다.
우리나라 독립이란 말이 독립협회로부터 생겼고 그 정신은 상동(尙洞)에서 함양되었다. 이때에 전목사는 비로소 목사안수를 받고(1907년 33살 때) 상동교회(尙洞敎會)를 담임하였고 동시에 청년회장이 되었다.
청년회(靑年會)에는 매주 목요일 하오 7시에 집회하여 잠깐 예배와 기도)를 봉(奉)하고 시사 논평이 있었다. 독립협회 때와 다름없이 가장 격렬한 풍자와 비평이 있었다.
그 때에 시사가 점점 글러지고 대관들의 비행은 모두 매국행위에 지나지 못함으로 도처에 민심이 분사(憤査)하여 수습이 어려울 때라. 회의 간부 몇 사람이 상동교회의 지하실에 따로 모여 결사구국을 목적하고 무형한 회를 조직하니 곧 신민회(新民會)이다.
간부로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양기탁(梁起鐸)씨 등이고 신민(新民)은 비밀에 속하고 회로는 청년회가 있고 기관지로는 매일신보(每日申報)가 있고 교육으로는 청년학원이 있었다. 신민이 비록 무형 무명에 속하였으나 그 정신은 해내(海內), 해외(海外)로 파급이 민속(敏速)하여 신민의 말을 한번 들은 사람은 죽음을 아끼지 않고 달겨 들어 부탕(赴湯뜨거운물)염화(焰火)라도 사양치 않을 만큼 석화전광적으로 신속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큰 역할을 하였고 그 외에는 안창호(安昌浩)선생의 열렬한 변설(辯說)과 기타 회원들의 선전으로 불같이 일어났다. 모두 지하로 되었고 표면으로는 죽은 듯이 아무 힘이 없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일인(日人)들이 상동을 주목하여 청년회를 없이 하려고 백방으로 운동하였고 선교사들을 보고 청년회를 해산하라고 권하여도 듣지 않으니 직접 고종황제(高宗皇帝)께 아뢰어 상동청년회가 나라에 불온한 단체라 하여 해산을 청하였다.
그 때에 시제(時宰)들은 독립협회)를 미워하던 마음이 또 청년회를 미워하여 칙령으로 해산을 명하였다. 망국근성(을 가진 소위 대관들은 한 사람도 차를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일인(日人)순사가 교회안에 함부로 들어와 검거에 착수하니 교회를 의지하고 있던 이동녕(李東寧)은 만주(滿洲)로 들어가고 이회영(李會榮)도 같이 입만(入滿)하였다.
전목사도 병으로 오랫동안 신음하는 고로 지방의 연락사무를 나에게 위임하여 나는 힘 있는 대로 출력(出力)하여 도와주었고 병중이라고 기동할 수만 있으면 회원들을 격려하는 것과 활동하는 방법을 친히 지도하였고 어느 때는 병상 옆에 있는 나를 부르며 “형님 어찌하면 좋으오. 동지들이 다 흩어졌으니 이 곳에 남은 자는 우리 둘뿐이니 우리는 사력을 다하여 신민정신(新民精神)을 지켜야지요” 한다.
그러자 마침 어느 시골목사가 와서 하는 말이 “오늘 배재광장에서 일본목사 평암(平岩)의 연설이 있었는데 조선교회와 일본교회가 합동연회를 보자 하니 종교에 어디 원수가 있오. 형님 생각은 어떠시요.”하니 전목사는 별안간 소리를 높여 대답하되 “목사양심에서 나온 소리요. 양심에 허락하거든 행하시요”라고 말하였다. 그 후로는 그 목사는 다시 전목사 앞에 오지 못하였다.
정의에 대하여 절대성을 가진 전목사는 그런 간세배(奸細輩)를 일절 용납치 않았고 또 한번은 어느 선생이 찾아와서 말하되 “독립운동에 물질이 필요하니 내가 수만여원을 변통할 터이니 사용하시요”한다. 전목사는 묻되 “선생이 무슨 돈이 있오. 필경 어느 곳에서 얻어 오려는지 자세히 말씀하시요”하자 그는 답하되 “송병준(宋秉晙)이라”한다. 전목사는 손을 흔들며 “역적의 돈을 얻어 나라를 구원한다는 일은 할 수 없오”.
지방에 있는 동지 연락과 내왕에 물질이 있어야 할 때는 자기가 동대서취하여 차용하느라고 그 숙부의 소유인 가옥까지 전집차용(典執借用)하였다. 그 가옥을 잡힐 때 돈 삼백원을 차용하였는데 집에 와서 돈을 헤어보니 돈이 삼백 오십원이다. 그 즉시로 돈 오십원을 가지고 전포주(典鋪主)에게 주고 이유를 설명하니 전주(典主)는 너무 감사하였다.
상동를 중심하고 각처에 지교회를 설립하고 전도하였는데 공덕리(孔德里), 새남터, 궁정동(宮井洞), 창의문외(彰義門外) 등지이다.
그의 설교는 평범하여 알아듣기 쉽고도 격려가 심하였다. “주를 믿으면 참으로 믿고 나라를 사랑하거든 참으로 사랑하라”하니 그의 설교에 정신이다. 일측(日側)의 정탐으로 다니던 자들도 와서 그 설교를 듣고 자기 실정(實情)을 자복하고 용서를 청하는 자도 있었다.
자기 손으로 설립한 학교 곧 청년학원(靑年學院)과 공옥학교(攻玉學校)에 일어(日語)를 한 과목 넣어 가르치라고 권하는 자가 있어도 전목사는 듣지 않았다. 전목사와 운명을 같이하던 청년학원은 근본 청년회에 발기로 된 것이요 독립정신을 양성하던 최초의 기관이다.
미국에 사는 하와이 동포 강천명(姜天明)이란 청년이 미화 4원을 보내어 조선청년을 교육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은 청년회에서 이 학원을 설립하고 조선청년들에게 독립 정신을 함양하던 유일의 기관이다. 교원들은 무보수로 교수하였고 주시경(周時俓)씨는 조선말을 중심하고, 유일선(柳一宣)씨는 수학을 중심하여 4회의 졸업생을 내게 되었다.
고종황제(高宗皇帝)는 들으시고 학원의 건물이 없음을 통촉하시고 단성사(團成社) 건물을 하사하시겠다는 처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회에서 생각하기는 “황송하지만 우리가 상동을 떠날 수가 없고 하사를 받을 것이 없이 우리 힘으로 유지하여 보자”하고 하사를 받지 않았다. 그 때 시제(時帝)들이 우리 청년회를 방해하던 중 만일에 하사를 받으면 다소 그 간섭을 받지 않을까 하는 그런 의심도 있어 받지 않았다.
이때에 조선에 개발회사라는 것이 있어 이들의 소개로 조선동포 1014인이 멕시코에 들어가 노동하는 중 그 고생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였다. 소위 집정자는 개발회사가 무엇 하는 곳인지 자기 민족이 외국으로 팔려가도 심상시 하고 있으며 민족을 구원하자는 무슨 토의가 있으면 이것을 곧 박멸하는 자들이다.
전목사는 회에 발론하기를 “우리가 멕시코에 사람을 파송하여 우리 동포 1014인을 데려오자.”고 발론하였더니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즉석에서 수금하여 여비를 만들고 그 이튿날 박용만(朴容萬) 외에 삼인을 위원으로 정하여 출발하게 하였다.
전목사가 남대문 안에 볼 일이 있어 나아갔더니 어느 청년들이 따라오며 “멕시코 여비를 드립니다”하고 금품을 드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인격)과 덕격(德格)이 사람을 감화하여 애국의 길로 인도함은 오직 조선목사중 한사람이다. 그는 물루(物累,돈을 걷는데에 뛰어나고 정의를 목표하는 위인이다.
그의 가장 좋아하는 글은 성경과 역사이다. 그의 서재에서 혼자 있거나 사람과 같이 있을 적에 가끔 음읍(飮泣,울음)을 금치 못함은 어찌하면 이 민족을 구원할까 함이다. 학원경비를 염출(捻出)하기와 교사 연용(延用채용)이 심히 어려웠으나 모두 다 그 성의에 감화하여 도와주었고 특히 우당(友堂) 이회영선생(李會榮先生)이 직접간접 노력이 많았고 또 학원생도들이 무슨 웅변집을 인쇄판매하니 일경(日警)에 탐지되여(나누워 준 것이) 수다학생이 검거되었다.
그 후로 학원이 주목이 욱심(旭甚)하고 또 전목사는 병세가 위중하여 학원에 출력(出力)이 곤란하게 되었다(경비를 댈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학원은 한 옆으로 핍박이 심하고 한 옆으로 유지 곤란으로 폐지가 되었다.
“오호라! 학원이 없어지는 것이 곧 나라 없어지는 것이라” 하여 교사 생도들은 모두 통곡해산하였고 그 후 일 년이 지난 1914년 3월 23일에 전목사는 필경 상동목사관에서 별세하시니 원근에서 듣고 다 통석(痛惜)하여 마지않으며 중국신문에는 종교위인 서거라 제(題)하고 그의 약사를 기록하였다.
전목사가 떠난 후라도 나는 오히려 상동교회에 남어 있으며 잔무를 처리하고 후임목사를 도와주었다. 사람이 떠난 후에는 결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전목사에 대하여서는 갈수록 유애(遺愛)가 깊었다.
여러 해 중병에 있으므로 교회일을 살피지 못한 고로 병석을 타처로 옮기려 할 때 직원과 교우들이 한사코 “우리 목사님은 타처로 옮기지 못합니다. 시체라도 우리가 모시겠는데 하물며 살아서 어디고 가신단 말이요” 하고 막는 고로 떠나실 때까지 생활비를 지불하고 또 치료비까지도 담당한 적이 있었고 목사관을 떠나게 되었으니 교우들이 모두 통곡하느니라. 이렇듯 유애(遺愛)가 깊었다. 임종 시에는 교우들이 밤을 새워 가며 구명기도를 올렸다.
그의 두 가지 절대성을 고칠 수 없다(성격). 하나는 반종교자요 둘째는 반민족자니 이 종류의 사람은 용서 없이 질책을 가하여 회개를 촉(促)하고 불능이면 거절하였다. 고로 전목사 생존하여 있는 동안에 그런 불의한 도배가 상동에 오지 못하였다.
그의 부인 조(趙)위늬씨에게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은 전진택(全鎭宅), 차는 전진원(全鎭垣)이요, 삼은 전진수(全鎭洙)인데 다 배재중학을 졸업하였고 전진택은 전목사(全牧師) 별세 후에 감독 헤리스씨를 따라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미령(美領미국영토) 포화도(布화島하와이)에 상륙하니 전목사의 친구들이 진택군을 환영하고 조선총독의 악랄한 정치를 장문논설(長文論說)로 신문에 게재하여 일경(日警)들이 진택군의 경성본가에 와서 가택을 수색하였고 해리스씨는 진택을 돌아보지 않았다. 진원(鎭垣)군은 지금 공옥학교 교원으로 있고 진수(鎭洙)군은 수년 전에 사망하였다.
전목사가 병자생(丙子生)이라면 계유생(癸酉生)인 나에 비하여 삼년이 적다. 전목사와 같이 고생하던 이승만박사(李承晩博士), 김구선생(金九先生)이 다시 돌아와 나라를 건설하였는데 전목사는 어찌하여 오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났는고.
이실난감(理實難감) 1949년 5월 11일 죽지 않고 살아있는 쓸데없는 친구 김진호 기록 77노물(老物)
* 참고
김진호 목사의 '병중쇄록'중에서 김희영(金喜永)씨의 고증 (김진호 목사의 셋째 아들) “세째 아들 진수는 나와 같이 배재에서 공부하였고, 전목사는 처음에 고문에 병이 들었으나 나중에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진수군도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부는 전목사가 병환 중에 있을 때 전목사와 침식을 같이하며 내내 병간호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