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3 ~ 1527:동생의 나이와 비교한 생년과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정)
조선병충분의정국공신통정대부정주목사
朝鮮秉忠奮義靖國功臣通政大夫定州牧使
증병조판서청평군김공우증지묘
贈兵曹判書淸平君金公友曾之墓
증정부인남양홍씨부좌
贈貞夫人南陽洪氏祔左
공의 휘는 우증(友曾)이오. 자는 희여(希輿)이며 청풍김씨이다.
고려조에서 문화시중을 지내신 휘 대유(大猷)공의 후예이다.
고조부의 휘는 관(灌)이고 본 조정에 들어와서 호조참의를 지내고 증직은 의정부 좌찬성이다. 증조부의 휘 의지(儀之)이고 강원감사와 한성부윤을 지냈다. 조부의 휘는 리(理)이니 부사이고, 선고의 휘는 극함(克諴)이고 진사에 올라 사제감 첨정을 지냈다.
선비(先妣)는 의령남씨(宜寧南氏)인데 소윤 상명(尙明)의 따님으로 정당문학 좌시(佐時)의 증손녀이다.
공은 도략(韜略)(육도삼략병법)에 출증하고 의지가 굳고 기계가 크고 원대하였으며 경사(經史)를 통달할 뿐 아니라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으므로 무예과(武藝科)에 등과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일찍이 연산주(燕山主)가 말을 타고 내전으로 힘차게 돌진하려 하니 공이 말 굴레를 잡고 제지하며 간하기도 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 : 1498 연산 4년에 김일손(金日孫)등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훈구파와 대결하다가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가 일어날 시기에 공이 명천현감(明川縣監)으로 있으면서 조정에 공물을 보내지 아니하니, 이때에 그곳에 유배되어 있던 윤여해(尹汝諧)에게 돗자리를 준 것을 이창년(李昌年)이 조정에 아룀으로써 연산주가 크게 노하여 국문(鞫問)하고 장형(杖刑)1백대로 다스리게 한 후 외방충군(外房充軍)하게 하였다.(조선왕조실록참고, 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 7월 6일)
병인(丙寅1506)년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니 공이 정국훈공(靖國勳功) 등의 책봉됨으로써 직위가 낮은 사람들이 차례로 신분이 고귀해지니 모두가 아름답다 하겠다. 이로써 공이 벌도 받지 아니하고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나갔다가 그 후 일찍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고 정주목사(定州牧使)에 이르렀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였으므로 과실이 있는 자는 면전에서 물리쳐 버리게 하는지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즐겨 대하지 아니하였다.
기묘(己卯1519)년 경에 공이 취중에서 말한 바가 있더니 마침 간교한 서얼인 강윤희(康允禧1등공신)가 그 소위를 무고함으로 이 사건이 날로 예측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며 이때에, 정암(靜庵 趙光祖)이 제일 먼저 관평지론(寬平之論)을 주장하였고, 삼상 정광필(鄭光弼)과 신용개(申用漑)와 안당(安瑭) 및 판의금부사 이계맹(李繼孟)과 지의금부사 김안국(金安國) 및 승지 윤자임(尹自任) 등이 공을 변명하지 못하고 마침내 경흥부(慶興府)로 유배되었다.
다음 해에 공의 아들인 호군공이 송사함으로써 주상이 즉시 석방할 것을 명하시니 원통함을 면케 되었다. 공은 나라의 간성지재로 주상을 가깝게 뫼시면서 진실로 도우시니 그의 이름이 솔밭같이 나타나고 또한 미래의 크게 현달하였다.
세상이 어수선하여 불행하게도 한때나마 횡액으로 재화를 만나게 된지라 뜻한바 과업이 중도에서 좌절됨으로 옥관자도 받지 못한 채 얼마 되지 않는 동안에 급하게도 장서(長逝:영영가고 돌아오지 않음으로 곧 죽음을 일는 말)하고 말았으니 어찌 명이 아니라 하겠는가.
공이 몰하신지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이 지났으니 생과 졸한 년.월.일이며 또한 연세조차 밝히지도 못하고 다만 그 근거는 묘주불도(廟主不桃 : 왕명으로 제사를 그치지 말라는 교시)와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한다. 이에 의하면 공이 졸한 날은 8월 13일이고 부인이 졸한 날은 7월 18일이라는 것을 겨우 알 뿐이다.
공이 관직을 역임한 것이나 행사한 것을 얻게 된 것은 항간에 야사 및 후손들이 사관으로 있을 때에 실록을 조사한 바에 그친 것이다.
묘소는 광주 백운산 기슭에 있으니 손좌지원(巽坐之原)이다. 즉 이곳은 공이 평소에 길복지를 스스로 택해 둔 곳이다.
부인은 남양홍씨이고 참판을 지낸 이로(梨老)의 따님이다.
장사는 공의 묘소에 부좌(祔左)하여 지냈다.
금상(今上 : 영조) 임술(1742)년에 대궐에서 대전(大典:나라의 큰 의식)을 밝히게 함으로써 비록 친공신(親功臣 : 군주를 가까이에서 돕는 신하)이라 하나, 직위가 낮으니 정2품직을 청하게 하였으니 마침내 공에게도 증직이 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훈련원사 청평군(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訓鍊院事 淸平君)이 내려졌고, 따라서 부인도 정부인(貞夫人)을 받게 되었다.
슬하에 아드님을 한 분 두시니 여광(汝光)이고 즉 호군공(護軍公)이다. 그는 사자(嗣子 : 대를 이을 아들)가 없으므로 족질(族姪 : 유복친(有服親 : 상복을 입는 가까은 친척)이 되는 조카인 계(繼)를 데려다가 후사를 잇게 하였다.
계(繼)는 학문과 품행 덕행을 골고루 갖추었으므로 집의(執義)에 증직 되었다.
그는 사남(四男)을 두니, 장남은 충백(忠伯)이고, 이는 효행이 두터웠으며 증직은 호조참의(戶曹參議)이다. 차남은 효백(孝伯)이고 증직은 집의(執義)이다. 다음은 인백(仁伯)이고 이 또한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났으며 증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이다. 다음은 예백(禮伯)이다.
이로부터 아래 세대로 내려오며 후손들이 계계승승 번영하니 이에 모두를 기록하지 못한다. 그 중에서 관직 및 대과에 붙은 자만을 열거하여 보면,
수(洙)는 참봉(參奉)이고, 간(榦)은 유일(儒逸 : 학문이 높은 사람으로 시험을 보지 않고 천거로 불러 쓰는 것)로 벼슬이 우참찬(右參贊)이고, 재(栽)는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이고, 치후(致厚)은 문과의 장원하고 관찰사(觀察使)이며, 종정(鍾正)은 진사(進士)이니 이들은 모두 충백파이다.
익겸(益謙)은 무과로 선전관(宣傳官)이고, 익성(益聲)은 진사(進士)이고, 박(博)은 감역(監役)이고, 상(相)은 무과로 영장(營將)이고, 추(樞)는 무과로 군수(郡守)이고, 형로(亨魯)는 무과로 방어사(防禦使)이고, 몽로(夢魯)는 무과로 병사(兵使)이고, 치명(致鳴)은 무과로 만 호(萬戶)이고, 치구(致龜)는 무과로 부사(府使)이고, 종만(鍾萬)은 무과로 부정(副正)이니 이들 모두 효백파이다.
극형(克亨)은 생원으로 학문이 독실하니 조정에 천거되어 정랑(正郎)을 지냈고, 징(澄)은 문과로 관찰사(觀察使)이고, 담(澹)은 생원(生員)이고, 혼(混)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순(洵)은 진사(進士)로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이고, 구(構)는 문과 장원으로 우의정(右議政)이고, 유(楺)는 문과로 참판(參判)에서 대제학(大提學)에 이르고, 무(楙)는 진사(進士)로서 목사(牧使)이고, 고(橰)는 문과로 좌승지(左承旨)이고, 희로(希魯)는 진사(進士)로 참판(參判)이고, 재로(在魯)는 문과로 영의정(領議政)이고, 정로(正魯)는 생원으로 좌랑(佐郞)이고, 취로(取魯)는 문과로 판서(判書)이고, 성로(省魯)는 진사로서 판결사(判決事)이고, 약로(若魯)는 문과로 판서(判書)이고, 상로(尙魯)는 문과로 대사헌(大司憲)이고, 익노(益魯)와 술로(述魯)는 함께 현감(縣監)이고, 득로(得魯)은 문과로 도사(都司)이고, 갑로(甲魯)는 진사(進士)이고, 치만(致萬)은 진사장원으로 시직(侍直)이고, 치일(致一)은 진사(進士)로서 목사(牧使)이고, 치인(致仁)은 생원이고, 치량(致良)은 생원으로서 직장(職掌)이고, 치온(致溫)는 생원으로서 교관(校官)이고, 치공(致恭)은 진사로서 참봉(參奉)이고, 치각(致恪)과 종후(鍾厚)는 함께 생원이니 이들은 인백공(仁伯公)파이다.
예백(禮伯)은 아들이 없고 다만 외손이 있을 뿐이다.
옛날에는 묘전에 표석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자획이 깎였으므로 이제 갈석을 고쳐 세움으로 인하여 간략히 후면에다 이와 같이 알리고자 한다.
숭정 병인(1745) 10월 일립
崇禎 丙寅(1745) 10月 日立
칠세손 의정부영의정 재로 술
七世孫 議政府領議政 在魯 述
외칠대손 유수 송득화 병전면서
外七代孫 留守 宋得和 並前面書
청풍김씨판서공파 가승 한영 著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