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단상
추석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산에 오른다. 온 산야가 예초기 소리로 메아리친다. 내 몸은 조상으로부터 나왔고 묘소 돌봄은 후손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귀향 못한 사람들도 벌초대행과 온라인 성묘를 통해 예를 갖추며 마음은 산에 오른다.
동산에 초승달이 떠오르면 아버지는 닳아빠진 숫돌에 낫을 갈았다. 늦가을 갈색 사마귀마냥 몸을 가누기 힘들 때까지 평생을 한 자루 낫으로 조상님의 머리를 깎아드렸다. 쓰윽-쓱 그 소리는 소나 염소에게 풀을 뜯기는 식사처럼 느리고 고요했다. 그사이 우거진 풀숲에 놀던 개구리나 메뚜기도 여유롭고 안전하게 거처를 옮겨갔다. 한참 지나서야 박 같은 보름달을 띄워놓고 한 모금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 결국 푸른 연기처럼 한 줌 수목장으로 떠나셨다. 깊은 산속 소나무 아래 잠든 그곳엔 푸른 난초며 늙은 진달래, 굴러온 바윗돌이 살고 있다. 지조 깊은 석정 시인은 산을 한사코 예찬했다.
“지구엔 / 돋아난 / 산이 아름다웁다//
산에는 / 아무 죄 없는 짐승과
에레나보다 어여쁜 꽃들이
모여서 살기에 더 아름다웁다”
- 신석정 <산산산> 부분
어느새 낫의 세대가 저물고 예초기 세대가 되었다. 휘발유와 엔진오일을 혼합한 후 나는 예초기를 돌리고 형님은 갈퀴로 뒷마무리한다. 매캐한 잿빛 연기와 칼날의 소음이 고요한 숲을 깨운다. 오히려 도심 속 공해보다 콜록콜록 숨 막힌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산국·개망초·칡넝쿨·어린 참나무들이 줄줄이 쓰러진다. 풀 속의 작은 짐승들도 무자비한 날벼락에 유이민과 부상자가 속출하고 심지어 유명을 달리한다.
그 순간 생각한다. 예초기는 또 다른 아마존 정글의 개발업자는 아닌지? 문명의 이기란 인간만의 행복도구는 아닌지? 아찔한 죄의식의 혼돈에 휩싸이며 예초기는 잘도 돌아간다. 비탈면과 봉분을 오르내리며 기계를 돌리는 일이란 긴장의 연속이다. 숨은 돌멩이와 칼날의 만남은 석기와 철기시대의 쟁탈처럼 불꽃을 튄다. 자칫 움켜진 손목이 풀리기라도 하면 예초기는 술 취한 망나니가 된다. 회오리 막춤으로 누구라도 베어버릴 기세다.
올해도 무사히 마쳤다. 해가 갈수록 예초기도 지쳐 내려온다. 바싹 긴장된 온몸이 방전된 양 바르르 떨린다. 한참 떨어져 있는 선친의 산소는 추석날 살피기로 했다. 자연으로 가셨으니 그리 돌볼 이유가 없는 명분도 있었다. 단지 맹감나무 서너 넝쿨만 쳐낼 손가위 정도만 주머니에 넣고 가면 된다.
지구의 생물 중 유일한 무덤을 가진 인간을 생각한다. 인간은 의미를 탐구하며 날로 그 영역을 관념의 내세까지 확장해간다. 즉, 계세사상繼世思想을 추구하는 존재다. 그리하여 피라미드, 타지마할, 진시황 무덤 같은 불가사의가 탄생하였으리라.
현재 대한민국은 매장 문화에서 화장 문화로 정착했다. 편안한 납골당과 자연친화적 수목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 결과 산림이 복원되는 추세다. 그러나 ‘사또 지나가라고 길 닦아놓자 거지 먼저 지나가듯’ 산마다 태양광 패널이 검은 해일처럼 들어서고 있다. 무분별한 난도질로 산이 쓰러진다. 공존 없는 이기가 생태적 교란을 끝없이 부추긴다.
모든 생명의 품, 인자한 산은 아프다. 되레 산소호흡기를 달아야 할 처지다. 이제 세계적 기후재앙 앞에서 생태는 인류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셈법, 심리적 수수방관으로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이 와중에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산불이 진행 중이다. 링컨 대통령이 155년 만에 무덤에서 나온다면 무어라 연설할까? 노예해방도 아니요 국민도 아닌 생태의, 생태에 의한, 생태를 위한 정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도 지구에 돋아난 아름다운 산들이 불구덩이에 빠지고 있다. 공허한 인간 탐욕의 쇳물에 던져진 재물은 아닌지? 부디 구원의 범종으로 태어나 인류의 귀가 함께 모아지기를 기도한다.
/왕태삼 시인
전북시인협회 이사
[출처] [전라북도일간지] 벌초 단상|작성자 전라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