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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abin,Sousa, Stockhausen, Strauss(Josef), Suk,Tarrega
Tartini, Teike, Telemann, Toselli, Tosti
(1) 스크리아빈(Scriabin, 1872~1915러시아)
1872년1월6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법률가였고,어머니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그러나 스크랴빈이 태어나서 얼마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므로,그는 숙모에게 맡겨졌다.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1888년에 사포노프의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했으며, 1891년에 피아노로 금메달을 받았다.출판업자 베라이에프는 일찍부터 스크랴빈의 재능에 주목하여,그의 작품을 평생 출판하는 계약을 하는 동시에 연주회의 매니지멘트를 맡아,스크랴빈을 베를린·파리·브뤼셀·암스테르담에 데려가 연주회를 열었는데,그 프로그램은 스크랴빈 자신의 작품뿐이었다.
1897년에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와 결혼하여,둘이서 파리를 연주 여행했다. 1898년부터1903년까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교수했고, 1906년에는 미국에 건너가 카네기 홀에서 연주회를 열었으며,미국 각지를 순회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08년 쿠세비쯔키를 알게 되어,그 이래 쿠세비쯔키는 스크랴빈과 그가 이끄는 관현악단과 함께 유럽 각지를 연주 여행했고, 1915년4월27일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그는 근대 음악의 한 쪽 기수로서 동양 신비주의의 깃발을 세웠으며,새로운 화성 조직에 공헌한 바가 적지 않다.
(2) 수자(John Philip Sousa, 1824~1932미국)
(3)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1928~2007독일)
쾰른 근교 뫼트라트 출생. 1947∼51년 쾰른음악학원에서F.마르탱에게 사사하고, 1952∼53년에는 파리에서O.메시앙 등으로부터 작곡의 개인지도를 받았다.
그는 음악의 요소로서 음고·음색·지속·강도뿐 아니라 음의 방위성·공간성도 논의되어야 한다고 결론짓고,음성학·음향물리학·정보이론 등을 연구하여1953∼54년 쾰른의 서부독일방송국에서 전자음악의 실험적 제작에 성공하였다.
또 부정기 음악잡지《라이에DieReihe》의 공동편집인으로서현대음악에 대한 계몽활동도 추진하였다(55∼58).그의 작곡양식은 세밀한 이론과 날카로운 감각의 독자성을 나타내면서 극히 급진적이어서《10악기를 위한대위법》(1953)에서부터《5목관악기를 위한 다속도(多速度)》(56)《5확성기군(擴聲器群)을 위한 화덕 속의 소년들의 노래》(56)《전자음향,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접촉》(60)등을 거쳐《소프라노,코러스군(群)과13악기를 위한 계기》(62)에 이르기까지 계속 급격한 변화 발전을 보였다.
특히 음악에 혁신적 이념인‘모멘트포름(Momentform)’이라는 새로운 구성원리를 제시하였다.
(4) 요셉 스트라우스(Strauss,Josef)
<왈츠의 아버지>요한 슈트라우스1세의 차남으로<왈츠의 왕>요한2세의 동생이다.처음에는 공예학교를 졸업하고 빈 시의 엔지니어와 민간 방적 공장의 기사로 일하면서 각 종 기계의 특허를 받기도 했다.그러다가1853년에 형 요한2세가 과로로 쓰러지자 그 해7월23일에 슈트라우스 관현악단의 대리 지휘자가 된 것을 계기로 그 후42셀 죽을 때까지17년간 작곡과 연주로 활약하였다.특히 지휘자로서는 바그너와 리스트 등의 동 시대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대중적인 관현악 연주를 통하여 소개함으로써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형에 비해 차분하고 섬세한 여성적인 성격인 그의 작품은 형 요한의 밝고 명랑한 작품들과는 달리 진지하고 로맨틱한 성향을 지닌 창조성이 강한 작품으로 당시에 이미 형 요한을 능가한다고 인정받았지만 애석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의 전성기가 될 후일의 작품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그의 대표으로는《오스트리아의 마을 제비Dorfschwalben aus Oesterreich,Op.164》,《천체(天體)의 음악》등이 있으며,출판된 작품은283곡에 달한다.
(5) 슈크(Josef Suk, 1874~1935체코)
▲생애
1874년1월4일에 체코의 크르세초비츠 출생하였다. 1885년 프라하음악원에 입학하여 베네비츠에게 바이올린을, A.드보르자크에게 작곡을 배웠다.
1892년 보헤미아 현악4중주단을 결성하고, 1898년에는드보르자크의 딸과 결혼하였다.또1922년 프라하음악원 작곡과 교수가 되고, 1930년에는 원장이 되었다. 20세기 초엽에는V.노바크와 더불어 근대 체코음악의 지도적 지위에 있었다. 1935년5월29일에 사망하였다.
* 3명의‘요제프 슈크(Josef Suk)
이 곡을 작곡한 요제프 슈크의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이며 드보르작의 외손자인 요제프 슈크(1929~2011)모두 완전히 동일한 이름으로 음악인 가족을 이루었는데,특히 손자는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로 쉐링과 쌍벽을 이루었다.
▲작품
주요작품으로는「현을 위한 세레나데」(1892)등 서정적인 실내악곡과「교향곡 제2번」(1906)등2편의 교향곡 외에 교향시·피아노곡·합창곡 등이 있다.
(6) 타레가(Tarrega,Francisco 1852~1909스페인)
타레가(Tárrega)는1852년11월21일에 스페인 카스텔론주의 빌라레알(Villarreal)에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산 파스쿠알에 있는 수도원의 경비로 일하면서 프라멩코(Flamenco)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음악을 기타로 연주하고 있었는데,타레가는 아버지가 출근하고 나면 아버지의 기타를 들고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소리가 날 수 있을까에 골몰하곤 하였다.
어릴적에 그는 자기를ㄹ 돌보는 할머니로부터 도망가다가 배수로에 빠져 눈을 심하게 다쳤는데,그의 아버지는 그가 시력을 완전히 잃을까 바 염려되어 주도인 카스텔론으로 이사하여 맹인이 되더라도 먹고 살게 해 주려고 둘다 맹인 음악 선생인 루이즈(Eugeni Ruiz)와 곤자레즈에게 맡겼다.
1862년(10세)에 어린 타레가의 기타 시력을 듣고 콘서트의 기타리스트인 아르카스(Julia’n Arcas)가 타레가를 바르셀로나로 데려 갔으나,그가 연주여행을 떠나버리자 커피하우스나 식당에서 연주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기타와 피아노를 함께 공부할 것을 고집하는 아버지를 피해3년 후에 발렌시아로 도망와서 집시 갱단에 합류했다.또 다시 아버지에게 잡혀 돌아와야 했다.
1874년(12세)에 타레가는 부유한 상인 카네사(Canesa)의 후원으로 마드리드왕실음악원에 들어갔는데,이 후원자는 타레가에게 토레스(Antonio de Torres)가 만든 기타를 선물했는데 타레가는 이 기타의 뛰어난 음질에 매료되어 연주와 작곡에 열심히였다.그는 여기서 에밀리오 아리에타(Emilio Arrieta)에게 사사하면서 아버지가 바라던 피아노는 그만 두고 오로지 기타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1870년부터 그는 학생들에게 기타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1880년 겨울에 그 도시의 저명인사의 부탁으로 그의 딸 리조(María José Rizo)에게 기타를 가르켜 되었다.그 이듬해부터 그는 리용에 있는 오페라극장에서 연주하고,런던으로 연주여행을 갔다가 객지 생활의 외로움에 젖어 그의 생애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눈물( Lágrima)」을 작곡하였고, 1882년 크리스마스에 돌아와 리조와 결혼했다.
1885년 바르셀로나에 안주하면서 알베니즈(Isac Albe’niz),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투리나(Joaquin Turina),카잘스(Pau Casals)등과 교제하였고,이 때 여성 후원자인 콘셒숀(Concepcio’n de Jacoby)을 만나 바르셀로나 교외의 그녀의 집에 살다가 그라나다(Granada)로 이사했다.여기서「알함브라 궁전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을 작곡하여 콘셒숀 여사에게 헌정하였으며,후일 후원자 콘셒숀과 파리공연에서 만난 프랑스 기타리스트인 코틴(Alfred Cottin)에게 수정 악보를 주었다.
1880~1893년에는 스페인에서만 공연하면서 작곡에 전념하였다.그러던 중1900년에 알제리 방문에서 아라비안 드림의 반복된 리듬을 듣고 다음 날 아침에 이 리듬에 기초하여‘Danza Mora’를 작곡하였으며,1903년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로마,나폴리,밀라노 등지에서 성공적인 연주여행을 했다.
1906년에는 우측 옆구리에 마비증세가 왔으나 회복되지 못한 상태로 연주무대에 돌아 왔으나,
1909년12월2일에 최후의 작품인‘Oremus’를 완성하고3일 후인12월15일에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 타르티니(Giuseppe Tartini, 1692~1770이탈리아)
타르티는1692년4월8일에 베네치아공화국 이스트리아주 파라노(현재 슬로베니아 피란)에서 태어나,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웠으나1709년경 한때 파도바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713년 자기 제자 엘리자베타 프레마초네와 결혼하였으나 그녀의 보호자이던 추기경의 노여움을 사 한때 아시시의 수도원으로 옮겨 살았다.거기서 그는 작곡과 바이올린연주법의 연구에 몰두하고 유명한 바이올린소나타「악마의 트릴로」를 작곡하였다.
1721년 파도바의 산안토니오 예배당의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고 그 곳에서 바이올린학교를 설립하여 나르디니 등의 우수한 제자들을 양성하였다.작곡가로서는 코렐리,비발디의 전통을 지켰으며 그의 음악은 우아한 선율과 간결한 화음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작품으로는 약150개의 협주곡과100곡의 바이올린소나타 등이 있다.또 이론가로도 뛰어나<화음론(和音論)>외에 다수의 논문을 남겼다.
남아 있는 작품 중에서「악마의 트릴」소나타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770년2월26일 파도바에서 악성 종기로 병고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8) 칼 테이케(Carl Albert Hermann Teike, 1864~ 1922독일)
칼 테이케는100여곡의 군대 행진곡과20여개의 합주곡을 작곡한 독일 작곡가이다.
그는1864년에 세틴 알트담(Settin-Altdamm)에서 대장장이의14명의 아이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4살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각종 악기를 다루었으며, 19세에 독일 남서부의 뷔르템베르그(Württemberg)지방에 있는‘울름(Ulm)’에 위치한 보병123근위연대에 군악대원으로 입대하였고,그 도시의 극장 관현악단에 프렌치호른과 타악기를 연주했다.
1889년에 그는 이 유명한 행진곡을 작곡하여 군악대장'파울 울터(Paul Oette, 1854~1931)에게 악보를 보고하자 작품을 검토한 군악대장은'우리에게는 행진곡 작품이 충분하다.이건 오븐에 던져 버려!'라는 폭언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이 쓴 작품에 대하여 직속상관으로부터 매우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테이케는 지나친 혹평으로 실의에 빠져 군대의 전역을 결정하게 되었다.작품의 곡명은 이때 결정되었는데,함께 군악대에서 복무하던 동료들이 슬픈 마음을 안고 전역하는 테이케를 위로하기 위해 송별회를 마련하여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이 작품을 연주하자,친구들의 우정에 감격한 그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행진곡의 곡명을'옛친구Alte Kameradem'로 명명하게 되었다.
이 곡은 불과20마르크에 출판업자에게 넘겨졌는데,후일 곡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행진곡이 된 것이다.
제대 후 경찰에 들어간 그는 그 지방의 지주의 딸과 결혼하고, 1895년 브란델부르크에 있는 포츠담으로 이사하여1908년까지 경찰에서 일하다가 병으로 은퇴하였다.그 후 우체국 고용인으로 일하다가1922년에 랜드스베르크(Landsberg)에서 타계하였다.
(9) 텔레만(Georg P. Telemann, 1681~1767독일)
오늘날 텔레만의 연구가 갑자기 성해져 수많은 작품이 연주되어 레코드화하게 되었고,이것은 바흐가 중심이 되어 움직이고 있던 세계에 새로운 파문을 일으켜,여기서 바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한 텔레만의 업적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텔레만은1681년3월14일 독일의 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났다.종교적인 가정이라고 해도 넉넉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나 대단한 교육도 받지 못했고,특히 음악은 이렇다 할 공부를 하지 않았으나 독학으로 악보 등을 널리 탐독하여 실력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1700년 라이프찌히 대학에 입학,어학과 과학을 배웠다.
1704년 신교회당의 오르간 주자가 되고 라이프찌히 극장을 위해 오페라를 몇 곡 썼으며,차츰 알려지게 되자1708년에는 아이제나하의 카펠마이스터로 취임하여 차츰 두각을 나타냈다.대교회의 음악 총감독,궁정음악장,오르간 주자를 겸임하고 거기서 사용하는 음악을 작곡했다. 1721년부터46년간 함부르크 시의 음악 감독으로 활약한 당시에는 바하보다 훨씬 유명한 작곡가였다.
1737년에는 파리를 방문.그곳에서 프랑스음악을 접하고,그 악상·악식을 도입한 바 있다.텔레만은 교회용 칸타타·세속 칸타타·타펠 무지크(탁상 음악) ·가극 같은 분야에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그것은 모두 출판되어 유럽과 미국에서 지금도 널리 연주하고 있다. 1767년6월25일 함부르크에서 타계했다.
(10) 토셀리(Toselli, Enrico 1883~1926이탈리아)
토셀리(Enrico Toselli)는 몬티그노소(Montignoso :이탈리아 프로렌스 북서쪽90 km에 있는 자치주)의 백작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그는1883년에 이탈리아 프로렌스에서 태어나 지오반니 스감바티에게 피아노,레지오날도 그라찌니에게 작곡을 배웠으며,연주단의 피아니스트로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각국의 수도와 알렉산드리아 및 북미를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세레나데‘탄식(Rimpianto)’ Op.6 No.1」과2개의 오페레타「사악한 프란체스카」(1912)와「이상한 공작부인」(1913)가 있다.
그의 명성은 음악적 재능이 아니라‘오스트리아의 루이제(Louise)대공비’와의 스캔들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다.그녀는 작센(Saxony)공국의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하였으나 곧 남편을 버렸고, 1903년에 이혼하였다.그런 후에1907년에 토셀리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고, 1912년에 이혼하였는데,그 도중인1904년에 그녀의 전 남편이었던 프레데릭은 작센의 왕이 되었다.
토셀리는1926년에43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11) 토스티(Tosti, Francesco Paolo 1846~1916이탈리아)
프란체스코 파올로 토스티(Francesco Paolo Tosti)는1846년에 로마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나폴리의 왕립음악학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핀트에게,작곡을 콘트외 메르카딘테에게 배웠고,얼마후 메르카단테의 추천으로 월급60프랑의 준교사로 취임했으나23세 때 공부에 지쳐서 직장을 그만 두고7개월 후에 로마궁정에서 일했다.
29세에 런던에 건너가 노래 선생이 돠는 한편 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두었다. 1880년에 남작작위를 받고 고향 로마롤 돌아와1916년12월에 타게할 때 까지 여생을 보냈다.영국,프랑스 및 이탈리아에로 작곡한 가곡은 오늘날에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주요 가곡으로는「세레니데(La Serenata)」,「이상(Ideale)」,「꿈(Sogno)」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