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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21. 사순 제 5주일. 부대동성당. 유낙준 모세 주교.
“내 것으로 삼은 출애굽시의 계약을 깨트렸으니(31:32), 가슴에 새겨줄 법인 새 계약인 ‘나는 너희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을 주겠다(예레미야31:33).”
“마음속의 진실을 기뻐하시는 하느님(시편51:6).”
“사제의 자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히브5:5).”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그리스도의 큰소리로 눈물기도와 간구)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히5:7).”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히브5:8).”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왔어요(요한12:21).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뵙고 싶어서 성당에 왔습니다. 새롭고 하느님께 충성스럽고 고결한 영loyal spirit 이 가득 채워지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나이다. 아멘.
우리를 창조하신 이야기인 창세기와 죽음의 자리에서 건지신 구원의 이야기인 출애굽기사이에 사순절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창조와 부활(구원)사이에 죽음(고난)이라는 인간의 좌절과 배신을 넣어서 인생을 순탄하게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창조의 기쁨인 인생의 탄생을 모두가 기뻐했지만 지루한 반복된 훈련과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나 다치고 쓰러진 일들을 경험하면서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은퇴를 맞아 노후에 곧 몸의 아픔을 얻으면서 평화의 노년기가 깨지고 어려움을 함께할 노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무너지는 결과를 갖게 됩니다. 영감이 막히면 시각을 바꾸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혼의 삶이 생경하지 않다면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산다고 보면 대개 맞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새롭게 고결한 영혼으로 살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주소서(시편51:10). Create a pure heart in me, O God, and put a new and loyal spirit in me.” 자기 생각을 접고 자기 힘을 접고 자기 감각을 거절할 때 우리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인생길을 걷고 걸어서 자신을 찾아 하느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기까지 우리는 갈끔하게 정리된 선처럼 인생길이 이루어져 있지 않고 뒤죽박죽한 인생을 경험하게 됩니다. 비논리적이고 예측불가이고 발작적이고 아무일이나 닥치고 단절적이고 비극과 승리가 주제곡과 변주곡처럼 반복하여 나타나는 인생입니다. 가장 귀중한 가치를 놓쳐서 한없이 멍하게 지내기도 하고 앞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몰라 더 두려워하기도 하는 인생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도우면 둘다 웃지만 아이가 부모를 도우면 둘 다 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까딸스럽고 신경질적이고 불같이 화를 버럭내는 저 자신을 보니까 방어적이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나타나는 성격인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스토아학파(BC3c-AD2c)는 그리스 로마시대의 철학으로 자연주의철학(노른자), 윤리학(흰자), 논리학(껍질)로 구분하고 세상적인 요소(물질)과 신적요소(이성)를 대립으로 보지 않고 일치하는 개념으로 보았고 올바른 파악을 위해서는 정념(감정)의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며 금욕과 평정을 주창해 인류애를 지니기에 기독교와 화해를 이루어 발전시켰습니다. 세상이 물질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그 물질 속에 신성이 부여되어 있다고 인식한 그리스사람들이 예수님을 방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한 알이 죽어야 풍요로워진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내가 곧 죽어야 구원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창조와 구원 사이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사이에 넣은 것입니다. 창조와 구원 사이에 죽음을 넣어야 제대로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고자하는 자기이익에 충실한 사람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죽지 않고자 하는 사람은 생명을 잃을 것이라고 합니다(요한12:23참조).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죽어야 한다는 자기삭감, 자기손시르 자기상처를 입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리스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금욕”이라는 점에서 공감하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전적으로 수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 시간을 포기할 때 식구들이 편안해짐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내 시간을 내려놓을 때 다른 사람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오는데 편안해했습니다. 고립된 씨앗 한 알로 남겨져 있을 때는 독립이 주는 편안함 그대로로 변화하려 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으로 그려지는 삶입니다. 그러나 고립된 씨앗의 삶을 내려놓자마자 다른 이들이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자신의 삶의 한 부분에 다른 이의 삶을 공유하게 됩니다. 자신 스스로도 자신 외부의 에너지를 받아들이고자 뿌리를 뻗치고 새싹이 빛을 향하면서 에너지를 받고자 합니다. 이렇게 변화는 외부와의 공유할 때 일어납니다. 새로운 형상인 하느님의 형상이 외부의 힘을 받아들일 때 내 것을 공유하면서 발생합니다. 한 알로 인하여 풍요가 우리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씨는 축소되고 새싹만 남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무덤만 남습니다.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의 친구들이 다음에 일어날 일들로 두려워서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새로운 생명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씨가 어린 새싹이 되는 것을 보고 전혀 다른 일들이 이루어진 것을 깨닫습니다. 전혀 다른 모습이 된 것입니다. 막달래나의 겸험으로부터 울려퍼졌습니다. 무덤 밖에 서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 실패한 맏달래나입니다. 몸의 부서짐 안에서 예수님을 찾은 막달래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예수님은 정원사(최초의 아담)입니다. 이를 발전시켜 예수님의 부활이 없는 작가들과 영화까지 나오는 것을 보앗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의 모든 시간에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한 기도로 양분을 얻은 것도 아니고 영적인 복을 받은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음에 의해 영원한 생명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서 죽음으로 떠남으로 제자만들기에서 떠나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만들려는 유혹과 자기이익을 위한 영성에서 떠나려는 예수님이 죽음으로 들어간 이유입니다.
화분 밖에서 하느님은 믿음 안에 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화분 밖에 있는 것을 꺼려하는 우리들입니다. 화분이 교회이기도 합니다. 화분이 집, 작업장, 학교, 대학교에서 관용적으로 살고 자유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갖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화분 안에 있거나 화분 밖에 있거나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는 하느님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새로운 로열한 충성스럽고 고결한 신앙으로 변화하기를 바랍니다. 세례성사를 강조하는 사도신경과 그리스도의 신앙을 진술하는 니케아신경을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이유는 바로 새롭고 로열한 성도로 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39개 신조와 1662년의 공도문(기도서)은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자유라는 삶은 자기욕심을 채우려는데서 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2주후에 우리는 부활절이라는 선한 잔치를 하게 됩니다. 세상의 물질은 사라지고 새로운 영이 남게 됩니다. 몸은 사라지고 빛만 남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살고 이동하고 존재하는 새로움이 시작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였나이다. 아멘.
2021.3.21. 사순 제 5주일. 부대동성당. 유낙준 모세 주교.
“죽음에서 구해주실 하느님께 예수님은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겸손과 충성심)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히브5:7).”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서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히브5:8).”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성공회 성도(요한12:28)
내 욕심이 죽으면 많은 이들이 삽니다. 사람들을 하느님의 집에 오게 하시는 하느님께 영광을 올리는 성공회 부대동 성도 여러분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나이다. 아멘.
성공회 조도(아침기도 morning prayer)와 만도(저녁기도 evening prayer)는의 노래로 기도하는 전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조만도가 시작될 때 이렇게 노래를 합니다. “주여, 우리 입을 열어주소서.”라고 사제가 선창하면 신도들이 이어서 “우리가 주를 찬미하리이다.”라고 응송을 합니다. 고요한 아침에 그레고리안 리듬으로 이 노래소리로 성당을 채웁니다. 만물이 이 노래소리로 잠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서 이 말씀이 나옵니다. “나의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이 입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편51:15).”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이 소리로 깨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불러 봅니다. 우리의 소리로 하느님께 영광을 올리고자 합니다. “주여, 우리 입을 열어 주소서.”
영적으로 깨어난 사람으로 살게 하시고자 하느님은 우리에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살면 영적으로 깨어난 진리로 모습으로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면 무지로 살게 됩니다. 선배나 스승은 제대로 사는 길을 후배나 제자들에게 가르쳐 줄 책무가 있습니다. 책임 responsibility 은 결과지향적인 언어로 과거를 근거로 과거를 회복시키겠다는 의지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는 개인이 강조된 뜻이 담긴 언어입니다. 그러나 책무 accountability 는 미래지향적인 언어로 미래라는 앞을 근거로 하여 지금을 끌어 올리자는 의지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제기하는 공동체를 강조하는 뜻이 담긴 언어입니다. 그래서 책무는 자유, 진실이 담기어 존재의 자유를 경험하지만 책임은 벌과 노예가 담기어 어깨의 짐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를 보내신 것은 바로 책임보다는 책무로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대다수 세상의 부모는 책임으로 자녀를 훈육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책무로 훈육하신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죽음으로 살지 않고 죽음에서 건져 주시어 생명으로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주실 분(히브5:7)”이십니다. 살고 죽느냐의 문제에서 사는 길을 제시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새 구두를 얻거나 보리쌀 한 되 더 얻자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이 오가는 문제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앞에서 “충성을 다 바치는 마음으로 누구나 온몸을 낮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히브5:7). humble and devoted.”
오늘 복음서(요한12:20)에 그리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철학적으로 높은 경지에서 사는 사람들의 상징이 그리스 사람들입니다. 찬란한 문화와 깊은 철학적인 삶으로 사는 사람들이 척박한 땅과 저열한 문화에 사는 곳으로 온 것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들이고 진리를 찾아 고생하며 온 사람들입니다. 뉴욕의 고상한 사람이 우리 한국의 시골성당으로 전재식신부님을 찾아온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겸손한 사람에게 겸손의 끝이 죽는 것이라는 앞길을 제시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예수님이 “십자가에 높이 올리실 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올 것이라고 선포하신 말씀이 이어서 나옵니다(요한12:30).” 사도 바우로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얻으려고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었다(만도, 1고린9:19)”는 자신의 삶을 고백한 말씀이 이 말씀과 연결되어 나온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하느님의 집에 오게 하려면 사도 바우로처럼 그들의 처지에 가야합니다. 그리고서 죽음에서 건져 주시는 하느님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죽음에서 건져 내신 하느님의 매일매일의 놀라운 사랑의 작업을 경험하는 성공회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인생입니다. 현대인은 외로운 인생들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늘 찾아다닙니다. 사랑이 넘치는 우리 부대동성공회 성당의 성도들로 인하여 외로운 인생들이 많이 모이는 성당이기를 빕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 때 우리는 “눈이 열려 ‘비밀스러운 생각(예레23:22)’인 진리를 깨닫게 되고(조도, 예레23:20)” 어둠에서 빛을 주시는 하느님을 뵙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고자 성경공부와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하느님은 계시다((예레23:24).” 그래서 어디에서나 나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를 올리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불같이 타오르게 하고 망치로 바위를 부스는 힘을 갖게 합니다(예레23:29).”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의 힘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주는 고통은 하느님이 주신 영혼을 죽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 더 복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도 하느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름이 나의 나깅오니 하느님의 말씀을 잊지 않으오리이다(시편119:16).” 그러니 우리의 미래세대인 청년이 어떻게 살게 할까?가 고민이 된다면 “하느님의 계명을 순종하게 하면 됩니다. ”하느님이 일러주신 말씀대로 살게 하면 청년이 살 것입니다(시편119:9 참조).“
고통의 시간은 우리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통의 시간이 이미 우리 안에 있다면 하느님만 향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죽음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입니다. 사순절의 절정기에 다다르는 이 시점에 하느님께 복종하는 삶이 인생의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말씀을 우리 가슴에 새기는 삶이기를 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