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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만 천국느낌 배달부>의 줄거리:
"느낌 아니까"는 한 개그우먼에 의해 만들어져 회자되던 유행어입니다. 그런데 웃자고 한 이 유행어가 가까이 다가온 천국 관련 하에서는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믿음이란 예수님만 아시는 천국 느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당신이 체험하신 천국 느낌을 세상에 전달하신 천국느낌 배달부셨습니다.
예수님만 천국느낌 배달부
(마태복음 13장 44절)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만 천국느낌 배달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만 천국느낌 배달부’
몇 년 전에 개그우먼 김지민 씨가 “느낌 아니까”라는 유행어를 만들었습니다. 남들이 모르는 세계에 대한 느낌, 남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일에 대한 느낌을 안다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천국에 대한 느낌을 알아야만 합니다. 느낌이라는 단어를 통해 오늘 말씀을 이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팔레스타인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당시에는 전쟁 등의 이유로 치안이 불안정하여 도적이 많았고 약탈을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재물이 있어도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요즘처럼 은행이 있어서 돈을 맡길 수도 없었고 튼튼한 금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아무도 모르는 땅에 묻어두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족도 모르게 밭에 재물을 파묻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돌연사 하게 되어 재물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소작을 하던 농부가 밭을 갈다가 쟁기에 부딪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열어보니 보화가 담긴 항아리였습니다. 농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보물을 땅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있는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삽니다. 보화가 숨겨져 있음을 알았으니 웃돈을 주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래 규정대로라면 보화를 발견하면 밭주인과 반반씩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농부는 이 규정을 알고 있었지만 보화를 독점하기 위해 밭을 사들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비유이기에 도덕적 윤리적인 가치평가를 대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행동하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농부가 보화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10년 동안 로또를 사다가 결국 1등에 당첨되었다고 생각하면 좀 더 와 닿을지도 모릅니다. 이 좋음과 기쁨에 대한 느낌이 오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한 초점이 됩니다. 또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소유를 다 팔았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천국을 사후에 가는 곳으로 소개하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신앙생활이란 지금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천국은 막연하게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천국을 사지 못했다면 죽어서도 갈 수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천국에 갈 수 없다면 결국 구원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속되게 표현하면 공짜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소유를 다 팔아야 천국을 살 수 있다고 하시니 상충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천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공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가격은 상대적입니다. 천국을 사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도 모든 것을 팔아야 하고 재벌도 모든 것을 팔아야만 합니다. 넉넉지 못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팔아야 될 것이 얼마 되지 않으니 다행인 셈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다 팔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천국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공짜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보아왔듯이 예수님은 천국을 전파하시고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이 좋다는 사실은 누구나가 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밭에 감추인 보화 같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천국의 좋음이 보화의 좋음과 비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에게 있어서 보화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지만 밭에 감추어져 있듯이 천국의 좋음이 사람들의 느낌에 대해서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느낌을 알고 천국을 믿고 천국의 좋음을 인정하더라도 그 좋음을 실제로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팔아서 밭을 샀다는 것은 나의 마음에서 좋음을 느끼는 모든 대상을 없애고 천국만을 남긴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한 상태를 좋은 것이라 여기는 사람이 천국의 좋음을 느끼고자 한다면 더는 건강을 좋아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돈은 누구나 좋게 여기는 대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의 좋음을 느끼고자 한다면 돈을 좋다고 여기는 느낌이 내 마음에서 없어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천국을 산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소유를 다 팔아 밭을 샀다는 비유가 의미하는 것은 실제로 가진 것을 다 팔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실제로 갖지 못했을지라도 내 마음에서 좋음을 느끼는 대상들을 모두 없앨 때에만 천국의 좋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좋음의 느낌은 지구상의 75억 명 중에 누구에게 감추어져 있다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3장 13절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천국을 경험해 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땅에 사는 사람 중에서는 오직 예수님만이 천국의 느낌을 알고 계셨습니다. 살아서 천국에 올라간 엘리야도 불 말과 불 수레를 타고 천국에 올라갔지만 이 땅으로 돌아와서 천국에 대한 느낌을 전파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천국의 느낌을 가지고 계신 유일한 분이셨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천국은 감추어져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지 2000년이 지났지만 천국의 좋음에 대한 느낌은 예수님 속에만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천국이라는 이름을 알고 그 천국이 좋다는 것도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실제로 천국의 느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천국의 느낌은 오직 예수님 속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좋음에 대한 느낌을 발견하는 것을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게 된 농부로 비유삼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느낌 즉 기쁨을 충만하게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에 좋음과 기쁨의 문제는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믿음이란 곧 좋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좋음을 체험하고 계셨기에 세상에 속하실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어떤 대상에게도 좋음을 느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어렵게 사시며 희생을 감수하셨다는 식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오해입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예루살렘 여자들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3장 28절에서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슬프게 여겼으나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그들의 앞날을 오히려 슬퍼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상에서 느끼던 대로 “예수님이 집도 없이 사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좋음을 실제로 느끼고 계셨기 때문에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집 한 채조차도 필요 없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외제차나 몇 백억 짜리 예배당을 좋음으로 느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을 낮고 비천한 것으로 보는 것은 세상의 관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탄생은 왕궁이 짐승의 마구간보다 전혀 좋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천국의 좋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생애는 마치 “느낌 아니까”라는 유행어의 반복 같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행동은 천국 느낌의 티내기였습니다. 천국 느낌을 아니까 그러한 말씀을 하셨고 행동하셨으며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지신 천국에 대한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나의 느낌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가지신 천국에 대한 느낌은 좋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느끼시는 좋음을 나의 좋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동료들과 점심을 함께 먹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스파게티를 먹고 싶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육개장이 먹고 싶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새로 생긴 추어탕 집에 다녀온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극찬을 하자 동료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추어탕 집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임금 삼고자 하였을 때에도 오히려 군중들을 물리치시고 산으로 기도하러 들어가셨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음을 느끼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으신 채 십자가 사건 후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배가 고파서 온갖 음식을 떠올리는 사람들을 향해 진짜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경험담을 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추어탕에 대한 생생한 경험담을 듣고 마음에서 다른 음식에 대한 욕구가 싹 사라지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마음에서 세상에 대한 좋음은 사라지고 천국 좋음에 대한 기대만이 남게 됩니다. 이것이 재산을 다 팔아서 밭을 사는 비유의 의미이며 천국을 소유하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천국 좋음에 대한 느낌을 아시는 티를 내셨습니다. 굳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세상에서 좋음을 찾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제부터 천국의 좋음을 알려주시겠다는 선포였습니다. 세상의 가장 훌륭한 왕궁이든 짐승의 마구간이든 천국 좋음에 비하면 아무 차이도 없으며 설령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모은다 하여도 천국 좋음에 비교할 수는 없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천국 느낌을 가져오신 배달부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천국이 가장 좋다고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온갖 음식이 생각나기 마련이지만 진짜 맛있는 집에 다녀온 동료를 믿고 발걸음을 옮길 때에 마음에서는 다른 모든 음식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마음에서 돈이 좋다고 여기던 마음을 파는 것이고 건강을 좋게 여기던 마음이나 출세나 형통 등을 좋아하던 마음을 다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지난 주말에 한 성도님이 강릉을 찾아오셨습니다. 이 분이 5년 정도 기간제 교사로 일을 하시다가 정식으로 임용을 받고 정규직 교사가 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그 기쁨을 공유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천국으로 기뻐하고 있음을 간증하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듣고 이렇게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기간제 교사 동료들의 최대 관심은 정규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기간제이든 정규직이든 하나님의 뜻에 달렸음을 믿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를 다른 동료들은 좋게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이 분이 정규직으로 전환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로 인해 기뻐하지 않고 오직 천국으로 기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고백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과도 참 일치하는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농부가 보화를 발견했을 때에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는 천국을 발견했을 때에 좋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의 좋음은 예수님께서 모두 공개해놓으셨습니다. 다만 그 좋음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 좋음의 느낌은 바로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공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천국 느낌의 티를 나타내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모든 말씀과 그 모든 행동을 통해 우리는 천국의 좋음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짜 맛있는 추어탕 집에 다녀온 동료를 따라 나서듯이 진짜 좋은 천국에서 오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좋음 중에서 천국의 좋음이 최고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돈을 좋아하고 건강과 장수를 좋아하고 형통을 좋아한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천국에 대한 예수님의 느낌을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은 원죄의 속성으로 인해서 자꾸만 세상을 향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천국의 좋음을 믿고자 하는데도 마음은 돈을 좋아하고 건강을 좋아하고 형통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마음에서 세상을 팔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세상을 좋다고 여기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임으로써 팔고 천국을 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음을 느낀다면 세상에 속한 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시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좋음을 느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돈이든 건강이든 형통이든 마음에서 좋음이 느껴질 때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 마음에 대해 죽으므로 파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짜 맛있는 추어탕을 먹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스파게티도 육개장도 떠나보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생활화는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 가지신 느낌이 최고로 좋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세상에 대해서 마음이 죽고 세상의 좋음을 팔아서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지속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가지셨던 천국에 대한 좋음이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고 이윽고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기간제 교사에서 정규직이 된 성도님이 고백하신 것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규직이 된 것은 세상의 기준에서는 기뻐할 수 있는 일이지만 천국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기에 정규직으로 만드셨을 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러한 고백이 공감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합격 문제 등을 비롯한 우리 삶의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다만 이것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갈 문제들이지 결코 좋음과 기쁨에 대해서는 연관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며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시면서 부터 천국의 좋음을 알고 계시는 티를 내셨습니다. “느낌 아니까”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느낌을 우리 또한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좋음을 기준으로 한다면 왕실의 화려함이나 마구간의 초라함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 천국의 좋음을 느끼시는 주님의 느낌을 받아들이기 위해 십자가에서 세상 좋음에 대한 느낌을 모두 팔아버리는 귀한 천국 가짐의 역사가 경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은 성탄절 이브입니다. 주님이 태어나신 사건을 생각하며 천국 느낌을 선포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십자가를 통해 세상 좋음을 느끼던 마음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주님처럼 천국 좋음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