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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안>
제목: 기독교의 부활신앙
2023년 7월 9일 주일
[로마서 8:1~2]
설교의 목적: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살지 말자. 조상님의 낯을 어찌 볼까 생각하면서 살자. 부활신앙이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이유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해결책을 주신다. 죽음까지도 그 앞에서는 굴복한다. 그것이 부활신앙의 가치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이 붙드신다.
사도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 사건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사도들의 해석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자 핵심이 된다. 사도들은 부활을 증언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설명했을까?
나는 이 설교에서 부활이 기독교 신앙에서 왜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고, 신약성서를 기록한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설교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의 복음 전도와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사도들처럼 낡은 세상을 향하여 대안적이고 대항적인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설교 개요
1. 다시 안 볼 것처럼 살지 말라
2. 죽음 너마저!
3. 사도들의 이해를 넘어선 사건
4. 부활, 새로운 세상의 창조
5. 부활, 예언의 성취
6. 부활, 새로운 출애굽 백성의 탄생이다
7. 부활, 혁명의 시작
1. 다시 안 볼 것처럼 살지 말라
요새 더위가 제법 매섭습니다. 뜨거운 햇살에 푸른 나뭇잎은 더욱 푸르러 갑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시련의 따가운 햇살이 비칠수록 더욱 더 푸르고 짙은 지혜와 용기가 영글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의 삶과 꿈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님도 어린 시절을 보내시고 어려운 시절을 사셨으니 그 시절을 보내시면서 어떤 꿈을 꾸셨을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꿈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에 담겨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기를 사모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사셨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더 크게 생각하고 더 높이 기념합니다. 교회의 상징은 아예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형틀인 십자가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점에서 중요할까요? 오늘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 전에 부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전에 유대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들이 믿은 부활은 세상의 끝날에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마르다와 나눈 대화를 보면 마르다가 부활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한복음 11:23~24
마르다와 같은 유대인들은 부활을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그 부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5:29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끝나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날에 의인들은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는 부활에 들어갈 것이고, 악인들은 그들이 행한 대로 심판을 받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도 유대인들의 전통을 이어서 모든 사람이 다시 살아 하나님 앞에 설 것이라는 부활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조상들도 죽은 후에 조상들을 어떻게 뵈올까를 생각하면서 이 세상을 살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현세의 삶이 끝나고 나면 조상들이 계신 곳으로 간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은 현실에서 더 진실하고 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었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인들에게도 부활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매정하게 돌아서거나 관계를 단절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주님 앞에 함께 서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을 조정합니다.
저에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1997년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후 1년이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대학원 학생대표인 원우회장을 선출하는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그때 저의 경쟁자가 있었는데 저에 대한 잘못된 소문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사실과 달랐습니다. 점차 저는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학교에 갔는데 그 증오심이 제 마음을 점령하여 제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서점에 들렀습니다.
거기서 어떤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오늘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죽는다면 가장 후회할 일이 바로 그 친구를 증오하는 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찾아가서 우리가 이렇게 선거를 통해 경쟁하지 말고 원우들 앞에서 제비를 뽑아서 결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화해를 하고 제비뽑기에 들어갔습니다.
제비뽑기에서 그 친구가 우리 반을 대표하는 후보가 되었고 마침내 선거에서 최종적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신대원 원우회장 선거는 끝났습니다. 그때 죽음이 내 앞에 온다면 내가 가장 후회할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깨우침이 저를 구해주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한평생을 살고 나면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현실의 삶에 대한 평가와 반성을 요구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너무 현세적이고 기득권을 많이 누리는 사람들이므로 나중에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 신앙은 다시 안 볼 사람처럼 살지 말고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함께 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믿음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인내하고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선행이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죽음 너마저!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설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탄생한 것이 신화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이지만 사실 그것은 이 세상을 설명하려는 고대 현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 신화 중에 판도라의 상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들이 준 판도라의 상자를 받은 인간은 호기심에 그만 그 상자를 열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던 나쁜 것들이 상자 밖으로 튀어나와 사방에 퍼집니다. 그것들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각종 재앙과 질병, 전쟁과 심지어 사망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놀라서 그 상자를 얼른 닫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하나가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희망이었습니다.
그리스 신화 판도라의 상자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겪는 운명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리스인들은 그 척박한 운명을 헤쳐 나가는 열쇠가 바로 희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말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처럼 늘 희망을 잃지 말라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관리자인 인간의 타락과 배신으로 말미암아 세상에는 다시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증오와 살인, 전쟁과 재앙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성경 이야기를 좀 더 읽어 보면 하나님은 이 어지러운 세상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계속 새롭게 만드십니다. 노아 시대 때 하나님은 이 세상을 물 속에서 다시 건져내시고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탑 사건 이후로 흩어진 인류에게 복을 주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한 민족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처럼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을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럽게 될 때 그것을 그대로 버려 두신다면 하나님의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게 됩니다.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고치십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시고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전쟁 대신에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을 일으키십니다.
그렇게 세상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치유하시는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치유하시는 질병이 바로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죽음까지도 고치셔서 결국 모든 사람을 다시 살리시고 죽음에서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분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시 완전히 새롭게 만드시고 죽음까지도 정복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하시고 완전히 새롭게 만드실 것과 고치실 것을 믿습니다. 그처럼 만물이 완전히 회복되고 새롭게 되는 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다시 일어나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물려받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창조 신앙과 짝을 이루는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것을 바로잡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이라는 마지막 대적을 물리치시는 날 우리는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것입니다.
3. 사도들의 이해를 넘어선 사건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점에서 중요할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은 부활은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기 전에 누군가 한 사람이 중간에 부활한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을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하는 여인들을 실성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며칠 안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믿었다면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기뻐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첫번째 반응은 놀람이었습니다.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누가복음 24:36~43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미리 생각하고 기대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정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는 일을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일을 신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것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야 그 사건을 설명하고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음을 분명히 목격한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므로 그 일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기도하면서 성경을 묵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차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이 깨달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는 사도들의 복음전도의 중심 주제가 되었습니다. 무릇 사도의 임무는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인지를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사도행전 1:21~22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자신들의 생각을 넘어선 일이었으며 그들은 성경말씀의 묵상과 기도를 통한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였다고 소개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4. 부활, 새로운 세상의 창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을 붙드시고 새롭게 하시며 마침내 회복과 치료를 완성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회복의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이 바로 사망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날에 일어날 부활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한 분이 사망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사망에서 풀려난 일입니다. 그것은 마지막 창조의 날에 일어날 일이 벌써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하나님의 창조활동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사망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패배하기 시작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사람들은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세상이 열렸다고 제자들은 확신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확신을 한마디로 압축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로마서 5:17
이렇게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사람들도 다 그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사도들은 깨달았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는 선언은 그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세상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사망의 종노릇 하지 않으며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합니다. 그들은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그것은 마지막에 일어날 일이 먼저 일어난 것입니다. 마지막에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이 먼저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며, 장차 모든 사람들이 그 부활의 열매로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고 새로운 인생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매우 특별한 자부심과 사명감을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예수님의 부활은 사도들에게 어떤 의미였습니까? 가장 먼저,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장차 일어날 일을 지금 시작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이 지금 시작되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새롭게 열린 세상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맡기기로 계획하신 일에 동참하며 살아갑니다. 부활을 통해서 새 날이 시작되었고, 새롭게 해야 할 일이 우리 앞에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이 창조되던 날에 아담과 하와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5. 부활, 예언의 성취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후에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성경말씀을 다시 묵상하고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의 깨달음은 사도들의 설교에 잘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전도하러 갔다가 그들의 회당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의 설교는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견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이 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일이라고 소개합니다. 즉, 성경이 예언한 대로 예수님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암송하고 있는 시편 16편을 인용하면서 말하기를, 주님의 거룩하신 분은 썩음을 당치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시 16:10).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선지자이므로 하나님이 다윗의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그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사도들이 깨달은 내용이 이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보낼 것이니 무엇이든지 그가 말한 것을 순종하라는 성경 구절을 생각했습니다(행 3:22, 신 18:15). 그리고 그 말씀대로 예수님이 오셨다고 소개했습니다. 또한 사도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깨닫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3:25~26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리라고 약속하신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며 그분은 또한 세상 만국을 다스릴 분이라고 시편에 기록된 것을 사도들은 즐겨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편 2편과 72편입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시편 2:6~8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시편 72: 8, 17
그래서 사도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는 단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세계 만민의 왕이시며 주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통치를 위하여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또한 하늘로 올리셨다고 제자들은 확신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설교의 절정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사도행전 2:33~36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어려서부터 암송한 성경말씀을 새롭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고 바로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으로 세상 만민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자신들을 위협하여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권력자들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용기를 내어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이 모든 일이 성경에 미리 예언된 대로 이루어졌으며 그 예언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에 오르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고 성도들을 위하여 통치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교회는 적은 무리였어도 태산 같은 자부심과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더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6. 부활, 새로운 출애굽 백성의 탄생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억누르고 포박하는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이 자기 조상들을 애굽에서 건지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담긴 메시지는 사도 바울의 편지에 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로마서 6:4~7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은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1~2
과거에 조상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은 파라오라는 권력자에게 붙들려 강제노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들이 깨닫고 보니 세상 사람들이 다른 권세에게 붙들려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기고 그의 종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우상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유혹하기도 하고 죽음을 무기로 하여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그 권세자에게 종노릇할 때마다 사람은 죄에 빠지고 그 결과 사망의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사도들은 깨달았습니다.
경건한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충실하던 바울도 자신이 바로 그렇게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고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그가 고백한 것이 바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을 바로 그 종살이에서 해방하셨음을 사도들은 깨달았습니다.
전에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시려고 하나님이 파라오의 권세를 꺾으시고 애굽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되게 하셨다면, 이제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위협하던 사망의 권세를 꺾으시려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도를 닦거나 철학을 배움으로 그 권세를 극복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망의 권세를 극복할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누구든지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으면 나사렛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사도들의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전에 세상에서 자랑으로 여기던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에 두려워하던 세상의 권세보다 더 큰 권세 아래 있는 자신들의 위치를 깨닫고 나서 제자들은 죽음으로 위협하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게 하고 비굴하게 하던 세력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유를 경험한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 즐거움이나 권세의 종살이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 곁에서 위로하고 당당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칭찬을 받으며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은혜를 받아 감동하고,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확신하면서 선한 일을 하기 위하여 의연하게 일어나는 것은 정말 인간 본연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경험한 사람은 다시는 노예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7. 부활, 혁명의 시작
오늘 저는 기독교에서 부활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활신앙은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처럼 매정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함께 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썩어짐과 죽음을 보면서 하나님이 결국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죽음까지도 몰아내시고 모든 것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있기에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올지라도 소망 가운데 눈을 감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당연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나서 사도들은 자신들이 배운 성경말씀을 새롭게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르쳤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핵심 내용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서 들려주고 가르친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후에 적어도 세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 부활은 마지막에 일어날 창조의 완성인데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그 새로운 시대의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그 새 시대의 주역으로 다시 지어진 새 피조물임을 확신했습니다. 이제 사도들은 교회와 더불어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할 일이 생겼다고 확신했습니다.
둘째,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경을 다시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릴 구원자와 왕으로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지금도 다스리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섬기면서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을 위해 사는 대리인입니다.
셋째,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새로운 출애굽 사건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전에는 무엇엔가에 묶여 있고 눌려서 살았다면 이제는 성령 안에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전에는 죄의 종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런 확신을 가진 교회는 이 세상에서 다른 방식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때때로 세상의 권력자들은 교회를 위험하게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위협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새로운 방식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혁명과도 같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걸어가는 그 길을 외면하고 아무도 걷기를 원하지 않을 그런 길을 택하는 일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백년 전에 조선에 와서 자기의 청춘을 바쳤습니다. 그들이 바로 지금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 존 헤론(1859~1890)같은 수많은 선교사들입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매우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필요한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먼저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를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노라면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를 조용히 알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가 가진 소망의 이유에 대하여 질문할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태어났으며 지난 2천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우리 시대와 세상을 맡아서 그 위대한 이어달리기에 참여한 선수들입니다. 우리는 쉽고 편안한 길을 선택하기보다 아무도 찾지 않은 그 길을 택하여 길을 내겠다는 선구자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에 임해 봅시다. 그렇게 해서 생긴 새로운 길을 보고 우리의 후발 주자들이 용기를 낼 수 있게 해 봅시다.
주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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