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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34
요한복음 6장 52-58절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믿음을 일으키실 뿐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서도 믿음을 확증하시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고려해 ‘보이는 말씀’, 곧 성례를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더욱 확증하고자 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와 성찬을 제정하셨는데, 둘 다 복음의 약속,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단 한 번의 제사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베푸신다는 것을 드러냅니다(66문).
특히 성찬의 경우는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보게 하셨는데, 떡을 먹음으로, 그리고 포도주를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드려지고 찢겨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위하여 흘려졌다는 사실을 보게 하십니다. 나아가 비록 먹는 것은 떡과 포도주이지만 그것을 먹는 것이 확실한 만큼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거기서 흘리신 그의 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의 영혼을 먹이시고 양육하사 결국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찬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거기서 흘린 피를 마신다는 것인데,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으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죄 사함과 영생을 얻는 것이요,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거룩한 몸과 더욱 연합함으로써 마치 한 몸의 지체들이 한 영혼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고 다스림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세례와 성찬이 복음의 약속을 보여주지만 차이도 있습니다. 세례의 경우 표가 물이라면, 성찬의 경우 표가 떡과 포도주입니다. 세례가 물로 씻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씻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성찬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 그가 우리의 영혼을 먹이시고 양육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가 언약의 표라면, 성찬은 언약의 보존의 표입니다.
세례의 경우 중생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세례를 받을 수 있고, 또한 세례는 회개와 믿음을 고백하는 성인들과 교회 내에서 출생한 유아들까지도 포함합니다. 그러나 성찬은 자기 믿음을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 죽으심을 기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아들 혹은 어린 나이에 있는 자들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가 성찬보다 앞섭니다. 즉 성찬은 세례를 받은 자가 참여할 수 있는데, 유아 때 세례를 받았다면 어느 정도 나이가 되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때 성찬에 참여하게 됩니다.
세례와 성찬의 차이와 관련해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면 세례의 시행 횟수는 한번이면 족합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언약의 표인 동시에 중생의 표라고도 하는데, 중생은 오직 한번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찬의 경우는 계속해서 시행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중생한 자로 하여금 양육하고 보존하신다고 할 때 계속해서 먹고 마셔야 하는 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찬과 관련해 주의해야 될 내용에 대하여 살펴볼 것인데, 성례가 표와 약속에 대한 인으로 되어 있다고 할 때 표와 약속을 그대로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례에서 표가 물이요, 그것을 통해 약속하신 바가 죄를 씻는 것이라고 할 때 물 자체가 죄를 씻는 것인가?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찬의 표가 떡과 포도주라고 할 때 떡과 포도주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의 몸이 찢기시는 고난을 받았으며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사함과 영생을 약속 받습니다. 이때 떡과 포도주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요, 그것 자체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 사함과 영생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의 교리는 소위 ‘화체설’이라고 해서 떡이 몸으로 변화되고 포도주가 피로 변화된다고 생각합니다. 루터파에서는 ‘공재설’을 주장하는데, 떡의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이 표인 떡 아래, 떡과 함께, 떡 안에 임재한다고 주장합니다. 둘 다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이 이 땅에 동시적으로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적어도 인간의 몸이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8문은 이 문제, 특별히 화체설에 대하여 반박하게 됩니다.
78문. 그렇다면 떡과 포도주가 정말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합니까?
답. 아닙니다.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 것도 아니요, 그 자체가 죄를 씻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그것에 대한 신적인 증표요 확증이듯이(엡5:26, 딛3:5), 성찬의 떡도 마찬가지로 실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니지만(마26:26-29), 성례의 본질과 속성에 합당하게(창17:10-11,14,19, 출12:11,13,27,43, 13:9, 고전10:1-4, 벧전3:21) 그것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고전10:16-17, 11:26-28).
요리문답 자체에서도 설명하지만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물 자체가 죄를 씻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세례와 관련해 중생의 씻음이라는 표현이나 죄를 씻는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런 표현은 성례적 용법에 따라 이해를 해야 되어야지 직설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떡에 대하여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시고, 또 포도주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떡이 곧 몸이요, 포도주가 곧 피라고 이해하면 가톨릭처럼 화체설을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표현은 성례적 용법 혹은 성례적인 환유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잠시 가톨릭의 성경 해석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겠는데,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찬 제정 시의 말씀에서 성례적으로 말씀하심을 부인하고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실 때 떡과 그리스도의 몸을 일치시켜 해석합니다. 또한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실 때 포도주와 그리스도의 피를 일치시켜 해석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떡이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가 피로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만이 아니라 루터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떡이 몸으로 변하거나 포도주가 피로 변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지만, 저들은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떡 속에 혹은 떡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이 공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 부류다 이것이 성경에 대한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르시누스는 성경의 참된 의미는 보통 다음 세 가지 법칙의 도움을 받아서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첫째, 믿음의 법칙과 일치하지 않는 해석은, 혹은 믿음의 조목이나 십계명의 어느 계명에나 성경의 분명한 선언에 반하는 해석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성령께서는 결코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경의 참된 의미에 대해 논란이 있을 때에 그 말씀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그 주제의 본질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둘째 법칙의 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동일한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거나 혹은 동일한 교리를 가르친다는 것이 입증되는 성경의 다른 병행 구절들을 살피는 것입니다. 더 선명하여 논란의 여지가 없는 다른 본문의 참된 의미를 찾아서 그것이 동일한 것을 가르친다는 것이 드러나면 논란이 되는 본문의 의미도 그것과 동일하게 이해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 제정과 관련된 말씀과 정황들을 생각해 보자면 성찬 제정 때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인성은 처음 성찬을 행하실 때 식탁 옆에 적절한 자리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는 승천하셨기 때문에 지금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인성이 떡 속에 물질적으로 동시에 계신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처음 성찬 시에 자신의 몸을 취하여 손에 드시고 떼신 것이 아닙니다. 떡을 떼셨습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도 떡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 자체는 아니요, 포도주 자체가 그리스도의 피는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눈에 보이는 떡을 떼시면서 그것에 대하여 “이것은 내 몸이니라”, 또한 눈에 보이는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떡 자체를 떼어 주셨고 포도주 자체를 주신 것입니다. 저들이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할 때 떡 자체를 떼어 주시고, 포도주 자체를 주신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라고 해석하면서 거기에는 변화가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넷째, 성찬과 관련해 기념하라는 말씀도 있지만 기념한다는 것은 육체로 실제 하는 존재가 아니라 현장에 없는 존재에 대해 행하는 것입니다. 처음 성찬을 행하시면서 기념하라고 하셨다면 이후로는 그가 거기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첫 성찬 시에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었고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먹었던 것처럼, 그와 똑같은 의미로 적용해야 합니다. 즉 지금도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것을 먹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 성찬 때의 떡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그의 몸은 떡으로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찬 제정과 관련된 말씀과 그 정황을 생각해 볼 때 화체설이나 공재설은 결코 성경에 합당한 내용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6장 마지막 부분을 읽었지만 가톨릭에서 화체설을 주장할 때 요한복음 6장을 성경적 근거로 제시한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김병훈 교수님의 책(소그룹 양육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참고하여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우선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고 말씀하십니다. 또 “내가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38)는 말씀을 하시자 듣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41) 이렇게 반응하게 되는데,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 48절로 가면 다시금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고, 51절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또 오늘 본문 안에서는 55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이런 모든 표현들에 대하여 가톨릭에서는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52절은 어떻게 말씀합니까?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의문을 가집니다. 즉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고 말씀하실 때 문자적으로만 이해를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53절 이하 5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물론 저들 편에서는 문자적 의미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자 그것을 좀 더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요한복음 6장 전체적으로 보면 이 교훈을 위하여 오병이어 사건을 일으키시고 또 나아가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먹었던 만나를 언급하십니다. 특히 만나 사건과 관련해 49절로 올라가면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육신의 양식은 결코 생명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동일하게 오병이어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어떤 면에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먹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든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먹은 것이든 그것 자체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냐?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참된 양식이라, 참된 음료라 말씀하십니다. 또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만나와 대조적으로 말씀합니다. 만나를 먹었어도 그들은 죽었지만,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광야 이스라엘 백성처럼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54절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린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60절로 넘어가면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이 어렵다고 반응합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63절, 64절을 보시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즉 이 모든 말씀은 믿음으로 받아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40절에서도 말씀한 바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를 참되게 믿는 것입니다. 성찬과 관련해서 생각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실제 그의 살, 실제 그의 피를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과 관련해 성례적으로 이해할 말씀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합당한 성경 해석이 아닙니다.
성례 부분을 살피기에 앞서 우리가 사도신경의 내용을 살폈지만, 사도신경을 해석한 내용 안에서도 우리는 화체설이나 공재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35문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라는 항목에서 우리는 그가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심으로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계셨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인성은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같은 자로 오셨습니다. 다른 점이 있자면 죄가 없으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성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 있으면서 다른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자리에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신성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성의 편재는 결코 성경에 따른 우리 믿음의 고백이 될 수 없습니다.
46문 “하늘에 오르사”라는 항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올라가신 뒤로는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럼 언제 이 땅에 계시게 되는가?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때입니다. 그때까지는 이 땅에 결코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성의 편재를 말하는 화체설과 공재설은 결코 성경에 따른 우리 믿음의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좀 더 부정할 수 없는 성경의 구절들로 확증하자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고전10:16)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라, 떡은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을 먹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는 것이요,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을 먹음으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성찬 제정과 관련하여 말할 때도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11:23-25) 기념하라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육체로 실제 하는 존재가 아니라 현장에 없는 존재에 대해 행하는 것입니다. 또 잔에 대하여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성경이 옛 언약 그리고 새 언약이라고 할 때 언약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화목입니다. 따라서 잔이 새 언약이라고 할 때는 새 언약의 표를 의미하는 것이지, 새 언약 자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잔은 약속의 인일뿐입니다.
다시 요리문답 78문으로 오면 떡과 포도주가 정말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느냐는 질문은 가톨릭의 ‘화체설’을 의식한 질문입니다. 루이스 벌코프의 기독교 교리사를 참고하면 818년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Paschasius Radbert)는 성례의 물질적 요소들은 신적인 능력에 의해서 마리아에게서 난 바로 그 몸으로 문자 그대로 변하고, 성별 후에 떡과 포도주라는 외적인 모습은 단지 감각들을 기만하는 베일(veil)에 불과하다는 교설을 공식적으로 주창하였습니다. 이후 이것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1133년 투르의 힐데베르트(Hildebert of Tours)에 의해 최종적으로 정의되어서 ‘화체설’로 지칭되었습니다. 그리고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어 신앙의 한 조목이 되었습니다. 이후 트렌트 공의회를 통해 다시금 공인이 되었는데, 「교령과 교회법」(Decrees and Canons) 제13부에 있는 성찬에 대한 내용의 골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실재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 거룩한 성례 속에 임재해 계신다. 그가 자연적인 존재 방식에 따라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해서 그가 좀 더 높고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 방식에 따라서 동시에 여러 곳에 임재해 계실 수 있는 가능성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가 동시에 여러 곳의 성례에 본질적으로 임재해 계실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성별의 말씀을 통해서 떡과 포도주의 본질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 그리스도가 전인적으로 두 성물(떡과 포도주) 아래와 두 성물의 각각의 조각 아래에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성별된 떡의 한 조각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를 전인적으로 받는 것이다.
그러나 교부들에게서 이런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르시누스는 이 내용과 관련해 교부들의 증언을 첨부하여 확증하기도 하는데, 몇 사람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이레나이우스(140-203)입니다. 땅에 속한 떡이 하나님의 말씀의 부름을 받으면(말씀으로 인치는 것) 더 이상 보통의 떡이 아니고, 성찬의 떡이 되는데, 그것은 지상적인 것(표)과 천상적인 것(의미) 두 가지로 되어 있다(Lib.4.c.34). 다음으로 테르툴리아누스(160-220)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취하셔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 떡을 그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시는데, 곧 이것이 내 몸의 형상이라는 것이다(Lib.4.contra Marcion). 키푸리아누스(200?-258)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를 보여주는 포도주가 들어 있지 않는 잔에는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성경의 성례와 증언이 모두 이에 대해 말씀한다. 또한, 성찬을 행할 때마다 우리는 먹는 목적을 위하여 우리의 이를 날카롭게 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떡을 참된 믿음으로 떼며 나누는 것이요, 그러는 중에 신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과 구별하여 분리시키며 그것들이 분리된 후에는 다시 그것들을 하나로 연합시키면서, 한 분이신 신인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이 성례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의 몸이 되며, 그 나타내는 것을 통하여 우리의 머리에게 붙여져서 그와 연합하는 것이다(Lib.2.epistola.Sem.de.coena). 니케아 공의회(325)의 교령에도 성찬과 관련된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에 또 주의 만찬이 있으니 우리 앞에 놓인 떡과 포도주에 유치하게 집착하지 말고, 믿음으로 우리의 생각을 하늘로 높이 올려서, 세상 죄를 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사제들에 의해서 죽임 당하는 일이 없으면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그분께서 그 거룩한 식탁 위에 자리하고 계시는 것을 생각할 것이요, 또한 그의 몸과 보배로운 피를 받으면서, 그것들이 우리의 부활의 표라는 것을 믿을 것이다. 우리가 적은 양만 받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니, 곧 그것을 받는 것이 우리의 배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성화를 위한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De divina mena, & quid.).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떡과 포도주가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떡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 포도주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피라고 하는 것은 성례적 용법이요 성례적 환유법에 따른 것일 뿐입니다. 여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79문.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왜 떡을 “그의 몸”이라 부르시고, 잔을 “그의 피”, 혹은 “그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 부르시며,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을 말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에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즉, 떡과 포도주가 이 땅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처럼 십자가에 달린 그의 몸과 흘린 피가 우리의 영혼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참된 양식과 음료라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요5:51,55).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를 기념하여 이 거룩한 표들을 육체의 입으로 받아 먹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역사하심을 말미암아 정말로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것과(고전10:16-17, 11:26), 또한 우리 자신이 친히 고난을 당하여 우리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보상을 치른 것이 될 만큼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롬6:5-11), 이 눈에 보이는 표와 보증을 통해서 확신시키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말하는데, 하나는 떡과 그리스도의 몸 사이의 유비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성례를 정당하게 시행할 때 표와 그 표가 나타내는 것들이 공동으로 드러내는 것이 확실하게 확증되기 때문입니다. 떡과 그리스도의 몸 사이의 유비에 대해서는 일단 떡과 포도주가 지상적인 삶을 유지시켜 주듯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영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영혼이 양식을 공급받는 참된 음식이요 음료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떡과 포도주를 입으로 받듯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도 영혼의 입인 믿음으로 받습니다. 떡을 받아 먹을 때 통째로 받아 먹지 않습니다. 떼어서 입으로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도 십자가에서 희생당하고 찢어진 상태로 받습니다. 식욕이 없는 사람들이 먹고 마실 때에는 떡과 포도주가 별 유익이 없으며, 또한 주리고 목마른 상태로 식탁 앞에 나올 필요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로 성찬 상 앞에 나아오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곡식이 갈아지고 구워져서 하나의 떡이 나오고, 수많은 포도송이를 다져서 포도주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도 숫자가 많으나 이 표를 사용함으로써 한 몸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몸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유비에 따라 우리가 주께서 제정하신 성찬을 정당하게 시행하기만 하면 표인 떡과 포도주를 통해 표가 나타내는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루터파가 말하는 것처럼 육체적으로 임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이 말하는 것처럼 육체적이고 물리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쯔빙글리의 경우 기념설을 말하기도 하지만, 주의 만찬을 기념할 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임재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례의 본질과 속성에 합당하게 사용하기만 하면 비록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지만 요리문답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믿음으로 정말로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눈에 보이는 표와 보증을 통해 확신하게 됩니다.
칼빈은 성찬과 관련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임한다고 이해하는가에 대해 전 그리스도가 임하시되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이 임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실제로 임하신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때 실제적이라는 말은 육신적으로 임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임하신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가상적으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임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는 것이며, 우리에게는 측량할 수 없는 신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성찬이기에 성찬을 합당하게 받기 위해서는 결코 육체적이며 정욕적인 방식으로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해야 합니다. 먹는 것은 감각할 수 있는 표로써 떡과 포도주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임을, 다시 말해 우리를 위해 찢기신 몸이며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임을 믿음으로 받아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