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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南解王 (제2 남해왕)
<南解居西干>, 亦云「次次雄」, 是尊長之稱, 唯此王稱之. 父<赫居世>, 母<閼英夫人>, 妃<雲帝夫人>(一作<雲梯>, 今<迎日縣>西有<雲梯山聖母>, 祈旱有應), <前漢><平帝><元始>四年甲子卽位, 御理二十一年, 以<地皇>四年甲申崩, 此王乃<三皇>之弟一云.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존장(尊長)에 대한 칭호인데 오직 남해왕(南解王)만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赫居世)요,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며, 비(妃)는 운제부인(雲帝夫人; 또는 운제(雲梯)라고도 한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 여기에 기도를 드리면 감응(感應)이 있다)이다. 전한(前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甲子)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지황(地皇) 4년 갑신(甲申)에 죽었다. 이 왕이 삼황(三皇)의 첫째라 한다.
按《三國史》云: 「<新羅>稱王曰「居西干」, <辰>言「王」也, 或云, 呼貴人之稱. 或曰「次次雄」, 或作「慈充」. <金大問>云: 「次次雄」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爲「慈充」, 或云「尼師今」, 言謂「齒理」也.
<삼국사(三國史)>를 상고해 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이란 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귀인(貴人)을 부르는 칭호라고 하며, 차차웅(次次雄)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김대문(金大問)은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드디어 존장(尊長)되는 이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사금(尼師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잇금[齒理]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初, <南解王>薨, 子<弩禮>讓位於<脫解>, <解>云: 「吾聞聖智人多齒, 乃試以餅噬之.」 古傳如此. 或曰「麻立干」(立一作袖),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橛也. 橛標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 史論曰: 「<新羅>稱「居西干」‧「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한다."하고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傳)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立은 혹은 袖라고도 한다) 이것을 김대문(金大問)은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말뚝)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 말뚝 표지)은 위(位)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은 주(主)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왕(新羅王)으로서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이란 이름을 쓴 이가 각기 하나요, 이사금(尼師金)이라고 한 이가 열 여섯이며,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이가 넷이다.
<羅>末名儒<崔致遠>作《帝王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之也. 今記<新羅>事, 具存方言亦宜矣. <羅>人凡追封者稱葛文王, 未詳. 此王代<樂浪國>人來侵<金城>, 不克而還. 又<天鳳>五年戊寅, <高麗>之裨屬七國來投.」
신라 말기의 명유(名儒) 최치원(崔致遠)이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을 적에는 모두 모왕(某王)이라고만 하고 거서간(居西干) 등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혹시 그 말이 야비해서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인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는 데 방언(方言)을 모두 그대로 두는 것도 또한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들을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南解王) 때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또 천봉(天鳳) 5년 무인(戊寅)에 고구려(高句麗)의 속국인 일곱 나라가 와서 항복했다.
第三弩禮王 (제3 노례왕)
<朴弩禮尼叱今>(一作<儒禮王>). 初, 王與妹夫<脫解>讓位, <脫解>云: 「凡有德者多齒, 宜以齒理試之.」 乃咬餅驗之, 王齒多故先立, 因名「尼叱今」, 「尼叱今」之稱, 自此王始. <劉聖公><更始>元年癸未卽位(《年表》云, 甲申卽位), 改定六部號, 仍賜六姓, 始作《兜率歌》, 有嗟辭‧詞腦格. 製犂耜及藏氷庫, 作車乘. <建虎>十八年, 伐<伊西國>滅之, 是年<高麗>兵來侵.
박노례잇금(朴弩禮尼叱今; 유례왕(儒禮王)이라고도 함)이 처음에 매부(妹夫)인 탈해(脫解)에게 왕위(王位)를 물려 주자 탈해는 말했다. "대개 덕이 있는 사람은 이[齒]가 많은 법이오. 그러니 잇금을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 이리하여 떡을 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이가 많았기 때문에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런 일로 인하여 왕은 잇금[尼叱今]이라고 한 것이다. 잇금(尼叱今)이란 칭호는 이 왕 때부터 시작했다. 유성공(劉聖公) 갱시(更始) 원년(元年) 계미(癸未)에 즉위하여(연표(年表)에는 갑신(甲申)년에 즉위했다고 함)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쳐서 정하고 여섯 성(姓)을 하사했다. 이때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었으니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 또 비로소 쟁기와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호(建虎) 18년(서기 42년)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 해에 고구려(高句麗) 군사가 침범해 왔다.
第四 脫解王 (제4 탈해왕)
<脫解齒叱今>(一作<吐解尼師今>). <南解王>時(古本云壬寅年至者, 謬矣. 近則, 後於<弩禮>卽位之初, 無爭讓之事; 前則, 在於<赫居>之世, 故知壬寅非也), <駕洛國>海中有船來泊, 其國<首露王>, 與臣民鼓譟而迎, 將欲留之, 而舡乃飛走. 至於<雞林>東<下西知村><阿珍浦>(今有<上西知>‧<下西知>村名).
탈해잇금(脫解齒叱今; 토해이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함)은 남해왕(南解王) 때(고본(古本)에는 임인(壬寅)년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가까운 일이라면 노례왕(弩禮王)의 즉위 초년보다 뒤의 일일 것이니, 양위(讓位)를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또 먼저의 일이라면 혁거세왕(赫居世王) 때의 일일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은 임인(壬寅)년이 아닌 것임을 알겠다.)에 가락국(駕洛國) 바다 가운데에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이것을 보고 그 나라 수로왕(首露王)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법석이면서 그들을 맞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배는 나는 듯이 계림(鷄林)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로 달아났다(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하서지촌(下西知村)의 이름이 있다).
時, 浦邊有一嫗, 名<阿珍義先>, 乃<赫居王>之海尺之母. 望之謂曰: 「此海中元無石嵓, 何因鵲集而鳴?」 拏舡尋之, 鵲集一舡上, 舡中有一櫃子, 長二十尺, 廣十三尺. 曳其船, 置於一樹林下, 而未知凶乎吉乎, 向天而誓爾,
이때 마침 포구에 한 늙은 할멈이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赫居世王)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그는 이 배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에는 본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까치들이 모여들어서 우는가." 배를 끌어당겨 찾아보니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다. 그 배 안에는 궤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척(尺)이오. 너비는 13척이나 된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숲 밑에 매어 두었다. 그러나 이것이 흉(凶)한 것인지 길(吉)한 것인지 몰라서 하늘을 향해 고했다.
俄而乃開見, 有端正男子, 幷七寶‧奴婢滿載其中. 供給七日, 迺言曰: 「我本<龍城國>人(亦云<正明國>, 或云<琓夏國>, <琓夏>或作<花厦國>, <龍城>在<倭>東北一千里), 我國嘗有二十八龍王, 從人胎而生, 自五歲六歲繼登王位, 敎萬民修正性命, 而有八品姓骨, 然無揀擇, 皆登大位.
이윽고 궤를 열어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하나 있고 아울러 칠보(七寶)와 노비(奴婢)가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7일 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그제야 말을 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오(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琓夏)는 또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龍城)은 왜국(倭國) 동북쪽 1천 리 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나라에는 원래 28 용왕(龍王)이 있어서 그들은 모두 사람의 태(胎)에서 났으며 나이 5, 6세부터 왕위(王位)에 올라 만민(萬民)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바르게 했소.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는데 그들은 고르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소.
時, 我父王<含達婆>, 娉<積女國>王女爲妃, 久無子胤, 禱祀求息, 七年後産一大卵. 於是, 大王會問群臣: 人而生卵, 古今未有, 殆非吉祥. 乃造櫃置我, 幷七寶‧奴婢載於舡中, 浮海而祝曰: 任到有緣之地, 立國成家. 便有赤龍, 護舡而至此矣.」
그때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王女)를 맞아 왕비(王妃)로 삼았소. 오래 되어도 아들이 없자 기도를 드려 아들 낳기를 구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卵] 한 개를 낳았소. 이에 대왕은 여러 신하를 모아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고금(古今)에 없는 일이다. 이것은 아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칠보와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아무쪼록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한 집안을 이루도록 해 주시오.' 했소. 빌기를 마치자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더니 배를 호위해서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이오."
言訖, 其童子曳杖率二奴, 登<吐含山>上作石塚, 留七日. 望城中可居之地, 見一峰如三日月, 勢可久之地, 乃下尋之, 卽<瓠公>宅也. 乃設詭計, 潛埋礪炭於其側, 詰朝至門云: 「此是吾祖代家屋.」 <瓠公>云「否」, 爭訟不決, 乃告于官. 官曰: 「以何驗是汝家?」 童曰: 「我本冶匠, 乍出隣鄕, 而人取居之. 請掘地撿看.」 從之, 果得礪炭, 乃取而居爲.
말을 끝내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吐含山) 위에 올라가더니 돌집을 지어 7일 동안을 머무르면서 성(城)안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았다. 산봉우리 하나가 마치 초사흘 달 모양으로 보이는데 형세가 오래 살 만한 곳 같았다. 이내 그곳을 찾아가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아이는 이에 속임수를 썼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 놓고, 이튿날 아침에 문 앞에 가서 말했다. "이 집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집이오." 호공은 그렇지 않다고 하여 서로 다투었다. 시비(是非)가 판결되지 않으므로 이들은 관청에 고발하였다. 관청에서 묻기를, "무엇으로 네 집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 하자, 어린이는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었소. 잠시 이웃 고을에 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는 것이요. 그러니 그 집 땅을 파서 조사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오." 이 말에 따라 땅을 파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이리하여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時, <南解王>知<脫解>是智人, 以長公主妻之, 是爲<阿尼夫人>. 一日, <吐解>登<東岳>, 廻程次, 令白衣索水飮之, 白衣汲水, 中路先嘗而進, 其角盃貼於口不解. 因而嘖之, 白衣誓曰: 「爾後若近遙, 不敢先嘗.」 然後乃解. 自此白衣讋服, 不敢欺罔. 今<東岳>中有一井, 俗云<遙乃井>是也.
이때 남해왕(南解王)은 탈해(脫解)가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알고 맏공주(公主)로 그의 아내를 삼게 하니, 이가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토해(吐解)는 동악(東岳)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했다. 백의(白衣)는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로에서 먼저 마시고는 탈해에게 드리려 했다. 그러나 물그릇 한쪽이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백의는 맹세하였다. "이 뒤로는 가까운 곳이거나 먼 곳이거나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물그릇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는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東岳) 속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세상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바로 이것이다.
及<弩禮王>崩, 以<光虎帝><中元>二年丁巳六月, 乃登王位. 以「昔是吾家」取他人家故, 因姓<昔>氏. 或云, 因鵲開櫃, 故去鳥字, 姓<昔>氏, 解櫃脫卵而生, 故因名<脫解>. 在位二十三年, <建初>四年己卯崩, 葬<䟽川>丘中. 後有神詔「愼埋葬我骨」.
노례왕(弩禮王)이 죽자 광호제(光虎帝 ; 광무제) 중원(中元) 6년 정사(丁巳; 서기 57년) 6월에 탈해(脫解)는 왕위에 올랐다. 옛날에 남의 집을 내 집이라 하여 빼앗았다 해서 석씨(昔氏)라고 했다. 혹 또 까치로 해서 궤를 열게 되었기 때문에 까치[鵲]라는 글자에서 조자(鳥字)를 떼고 석씨(昔氏)로 성(姓)을 삼았다고도 한다. 또 궤를 열고 알을 벗기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로 했다고 한다. 그는 재위(在位) 23년 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 서기 29년)에 죽어서 소천구(疏川丘) 속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뒤에 신(神)이 명령하기를, "조심해서 내 뼈를 묻으라"고 했다.
其髑髏周三尺二寸, 身骨長九尺七寸, 齒凝如一, 骨節皆連瑣, 所謂天下無敵力士之骨. 碎爲塑像, 安闕內. 神又報云「我骨置於<東岳>」, 故令安之.(一云, 崩後二十七世<文虎王>代, <調露>二年庚辰三月十五日辛酉, 夜見夢於<太宗>, 有老人貌甚威猛, 曰: 「我是<脫解>也. 拔我骨於<䟽川>丘, 塑像安於<土含山>.」 王從其言, 故至今國祀不絶, 卽<東岳神>也云.)
그 해골(骸骨)의 둘레는 석 자 두 치, 신골(身骨)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나 된다. 이[齒]는 서로 엉기어 하나가 된 듯도 하고 뼈마디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骨格)이었다. 이것을 부수고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 그랬더니 신(神)이 또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안치해 두어라." 했다. 그래서 거기에 봉안케 했던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탈해(脫解)가 죽은 뒤 27대 문호왕(文虎王 ; 문무왕) 때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서기 680년) 3월 15일 신유(辛酉) 밤 태종(太宗)의 꿈에, 몹시 사나운 모습을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내가 탈해(脫解)이다. 내 뼈를 소천구(疏川丘)에서 파내다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吐含山)에 안치하도록 하라." 왕은 그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 한다).
金閼智 (김알지) 脫解王代 (탈해왕대)
<永平>三年庚申(一云<中元>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已)八月四日, <瓠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櫃, 掛於樹枝, 光自櫃出, 亦有白雞鳴於樹下. 以狀聞於王, 駕幸其林, 開櫃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故事. 故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
영평(永平) 3년 경신(庚申; 서기 60년, 중원(中元) 6년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중원(中元)은 모두 2년뿐이다.) 8월 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고도 함) 속에서 비치는 것이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황금(黃金)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빛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호공(瓠公)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동남(童男)이 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赫居世)의 고사(故事)와도 같았으므로 그 말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閼知)라고 이름지었다. 알지(閼知)란 곧 우리말로 소아(小兒)를 일컫는 것이다.
抱載還闕, 鳥獸相隨, 喜躍蹌蹌. 王擇吉日, 冊位太子, 後讓於<婆娑>, 不卽王位. 因金櫃而出, 乃姓<金>氏. <閼智>生<熱漢>, <漢>生<阿都>, <都>生<首留>, <留>生<郁部>, <部>生<俱道>(一作<仇刀>), <道>生<未鄒>, <鄒>卽王位, <新羅><金>氏自<閼智>始.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면서 기뻐하여 뛰놀고 춤을 추었다. 왕은 길일(吉日)을 가려 그를 태자(太子)로 책봉했다. 그는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破娑王)에게 물려 주고 왕위(王位)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혹은 구도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으니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신라의 김씨(金氏)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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