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5장 길고도 처절했던 공산주의와의 투쟁
2. 반드시 가야 했던 '모스크바로의 행진'
문선명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에 한결같이 반대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승공운동을 벌였고, 소련 공산주의의 세계 적화에 맞서 자유세계를 수호해야 한다고 역대 미국 대통령들에게 직언도 했다. 그 행적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공산국가에서 문선명을 제거하려고 테러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문선명은 그들을 미워하거나 원수로 여기지 않았다.
냉전시대의 끝자락인 1990년 4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나고, 그 이듬해 11월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난 것은 단순히 목숨을 건 모험이 아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찾아간 것은 하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문선명이 걸어야 할 숙명이었다. 모스크바(Moscow)를 영어로 발음하면 머스트 고(must go)였기 때문에 '가지 않으면 안 될 곳'이라고 역설했다.
지금은 공산주의가 몇몇 나라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불과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공산주의는 금방 세계를 덮을 기세였다.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은 완전한 공산주의 체제였고, 중국, 베트남, 쿠바 등은 자유주의 국가를 위협했다. 남미에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공산주의가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밀림에서 활동하는 게릴라부대가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일도 다반사였다. 문선명은 이러한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해 모스크바로의 행진을 관찰시키려 했다. 1983년 뉴욕 티파니빌딩에서 공산주의 국가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모스크바로의 행진'에 대해 말했다.
"우리가 모스크바로 행진한다 해도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모스크바는 우리의 중간 목표일 뿐입니다. 그것을 넘어 우리는 지옥까지도 해방시켜야 합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슬픔으로부터 해방시켜야만 합니다. 한순간도 그것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시작입니다. 본인은 이 새로운 카우사 본부가 여러분들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전진해 나갑시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문선명의 선언을 비웃었지만 문선명은 확신이 있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호소가 세계 각국에 서서히 영향력을 끼치면서 오래전부터 꿈꾸어왔던 모스크바로의 행진이 모양새를 갖춰나갔다. 1990년 4월 10~13일까지 제11차 세계 언론인 대회가 모스크바에서 노보스티(Novosti) 통신사와 공동 주최로 열렸다. 세계 각국에서 온 600명의 기자들과 41개국의 전직 국가수반들이 모여 대회장은 몹시 북적거렸다. 문선명은 그 대회에서 원론적이고 별 의미없는 내용 대신 직설적이고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다.
"나의 마음은 진실로 소련 사람들에게 향합니다.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은 이미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것이 나를 매우 슬프게 합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소련 혁명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흘림이나 무력이 아닌, 즉 심정과 영혼의 혁명이 되어야 합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기자들은 "소련인들에게 아담과 해와에 대한 강의를 했다 ・・・ 이것이 새로운 시대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 새로운 시대란 말인가?"라고 논평했다. 문선명의 연설은 무신론 종주국인 소련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연설을 마친 4월 10일 오후,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만나겠다는 연락을 전해왔다. 다음 날 오후 4시30분 문선명・한학자 부부는 크렘린 궁전을 방문해 고르바초프와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께서는 페레스트이카로 이미 훌륭한 성공을 거두고 계시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개혁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소련 땅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십시오. 하나님 없이 물질세계만을 개혁하려 한다면 페레스트이카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이 나라에 종교의 자유를 불어넣는 것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 이제는 러시아를 개방한 용기로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세계의 대통령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종교의 자유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뛰어나오자 고르바초프는 적잖이 당황하며 얼굴을 굳혔다. 그렇지만 독일 통일을 허락한 사람답게 곧 굳어진 얼굴을 펴며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문선명은 곧바로 "한국과 소련은 이제 서로 국교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한 뒤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면 어떤 점들이 좋은지도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그날 문선명은 고르바초프와 헤어지면서 손목시계를 풀어 그의 손에 채워주었다. 마치 옛 친구를 대하듯 스스럼없는 태도에 당황하는 고르바초프를 향해 "대통령께서 지금 추진하는 개혁정책이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이 시계를 보면서 나와의 약속을 생각하면 하늘이 분명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으로 절정을 이룬 '모스크바로의 행진'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각국 언론은 이 소식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한국과 소련 양국 간에 1년 내에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고 전했으며, 특히 폐쇄적인 소련의 국영언론 「이즈베티아 Izvestia」와 「프라우다 Pravda」는 문선명의 연설 내용까지 포함해 대대적으로 기사를 실었다. 4월 20일에는 TV에서 특별 프로그램도 방영 되었다.
그리고 그해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와 노태우 대통령이 만나 한소정상회담을 가졌다. 마침내 1990년 9월 30일 한국과 소련은 86년 만에 역사적인 국교를 맺었다. 문선명의 말처럼, 정치는 정치가가, 외교는 외교관이 할 일이지만 오랫동안 막힌 물꼬를 트는 일에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종교인의 역할이 더 효과적이기도 했다. 이후 세계 역사는 획기적으로 변했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 봄이 찾아온 것이다.
그 후 문선명이 소련 고위 관료들과 국회의원들을 미국으로 초대하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1991년 4월 30~5월 2일 까지 소련연방 내 15개 공화국의 200명에 달하는 고위 관료와 정치 지도자들이 미국지도자대회(American Leadership Conferences:ALC)에 참석했다. 역사 이래 그 누구도 15개 공화국 대표자들을 그렇게 한꺼번에 움직이게 한 적은 없었다. 미국을 방문한 소련 관료들은 카우사 교육을 받았으며 워싱턴DC에서 미국 고위 관료들을 만났고, 뉴욕에서는 사업가들을 만나 경제협력에 대해 협의했다. 이어 3천 명의 소련 젊은 이들도 문선명의 후원으로 미국을 방문해 국제교육재단(International Educational Foundation:IEF)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러한 문선명의 길고 긴 노력 끝에 소련은 공산주의의 잘못된 가면을 벗어 던졌다. 독일 역시 통일되었으며 동유럽의 모든 국가들도 공산주의 울타리에서 벗어났다. 이 모든 놀라운 성과들은 1970년대부터 꾸준히 뿌려온 승공의 씨앗에 의해 맺어진 열매였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