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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령강림 체험의 생활화>의 줄거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 삶을 주관하시려고 성령님을 보내십니다. 그러나 마구 아무렇게나 성령님이 내게 오시는 것은 아니잖아요? 내게서 어떤 조건이 이루어져야 성령님을 보내실까요? 그리고 내게 오시면 그분은 대체 내게서 무엇을 하실까요? 참으로 의외의 대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 언어를 전체적으로 새롭게 바꾸십니다.
성령강림 체험의 생활화
(누가복음 6:43~45)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령강림 체험의 생활화>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령강림 체험의 생활화’
본문 45절은 번역상의 아쉬움이 드는 부분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마음에 쌓은 선’이라는 문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번역대로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가 전달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맥락이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음에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성령강림 체험을 생활화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해주는 의외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위하여 말씀을 전하고 들으며 실천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상식의 차원에서나 논리적으로 볼 때도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질 때는 반드시 성령강림 체험이 뒤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뒤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제대로 한다면 당연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또한 생활화가 되어야만 합니다.
한편 부흥을 갈망하는 모든 목사님들의 소망이 있다면 목회 현장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재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사 속에서도 성령강림 사건에 준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무조건 울고불고 한다고 해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재현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을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령강림의 모습이 가시화되었던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라고 하였습니다. 혀는 언어를 위한 기관입니다. 성령이 불의 혀처럼 갈라지듯 내려왔다는 것은 언어와 깊은 연관성을 느끼게 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령강림 사건에서 전혀 엉뚱한 일을 기대합니다.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등을 바라면서 성령강림의 체험을 갈망합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성령강림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성령강림 사건은 언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꼭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성령이 불의 혀와 같이 강림하시자 나타난 일이 4절의 내용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나사렛 시골 출신의 무식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온 세상 각 지방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언어와 관계된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후에도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공회에 붙잡혔을 때를 생각해보면 이들의 하는 말이 무식한 어부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하는 말에 산헤드린공회원들이 놀라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성령의 역사가 언어와 관련하여 나타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의의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강림 사건은 위로 하늘을 향해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 눈앞에 보이는 가족들보다도 더 우선적 현실로 체감하게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래로 땅을 향해서는 언어와 관계된 일들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령의 전공과목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 때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소개된 바 있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43절을 보면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열매는 나무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간단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의지를 가지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가 되면 좋은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의식과 의지와 생각과 감정의 방향을 좋은 나무가 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열매라는 말로부터 연상되는 말씀이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언급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고 또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으로부터 열매는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지만 노력으로 맺을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될 때에 좋은 열매는 맺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서두에서 번역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부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45절을 보면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일상적으로 생활화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해줍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라는 부분을 직역해보면 ‘마음에 선한 보물로부터 선을 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물이란 헬라어 테사우로스(θησαυρός)로써 말 그대로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보물과 관련된 언급은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0~21절에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둔다면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라는 번역은 잘못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과의 연관성 때문에 이러한 번역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그 쌓은 악에서’라는 내용은 원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직역하면 ‘악한 사람은 마음의 악한 보물로부터 악을 내나니’가 됩니다.
전문을 다시 직역해보면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보물로부터 선을 내고, 악한 사람은 마음의 악한 보물로부터 악을 내나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의아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선한 보물과 악한 보물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보물에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이 보물을 갖고 있다거나 악한 사람이 보물을 갖고 있다고 해야 어법에 맞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러한 비유를 드셨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보물은 단지 금은보석과 혹은 희귀한 골동품이나 고가의 예술작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보물은 마음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겨지는 대상입니다. 실제로 갖지 못했을지라도 마음에서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가장 최고로 좋아하는 것이 보물입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을 좋아했습니다. 로미오의 마음에서 줄리엣이 보물이 된 것입니다. 한편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질리게 되었다면 더는 보물이 아닙니다.
이러한 마음의 특성을 염두에 두자면 좋아함은 곧 믿음입니다. 그것을 가지면 기쁘고 만족하리라는 믿음에서 좋아함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물의 의미 또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선한 보물이란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좋아하는 상태가 선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의 악한 보물이란 하나님 외에 세상의 가치들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상태가 악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에 돈을 좋아하여 보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기준에서는 악한 보물을 품은 사람입니다. 마음에 남편의 승진을 바라는 아내가 있습니다. 이 아내 또한 악한 보물을 품은 것입니다. 마음에 자녀가 형통하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습니다. 이 또한 마음에서 자녀의 형통이 보물이 되었기에 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보물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나무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 보물이 악한 보물이라면 못된 나무가 되어 못된 열매를 맺게 되고, 그 보물이 선한 보물일 때에는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무는 곧 마음이 보물을 붙잡고 있는 상태이고, 보물은 기쁨과 만족을 주리라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단지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 전반으로 보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45절을 보면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입에서 나오는 말을 마음의 열매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열매에 생각과 말과 행동 전반을 염두에 둡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에서도 행위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다만 본문 말씀에 충실하자면 일단 언어가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좋아하는 보물을 붙잡고 있는 상태가 나무로 비유되었습니다. 마음에 악한 보물을 갖고 있으면 악한 말이 나오게 되고, 마음에 선한 보물을 갖고 있으면 선한 말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열매를 말에 국한시키고 계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일상적으로 생활화할 수 있는 열쇠가 담겨 있습니다. 성령께서 불의 혀처럼 강림하셨다는 것으로부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특별히 언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본문 말씀을 대할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누가의 상태입니다. 누가는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음을 경험한 뒤에 복음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 또한 십자가와 부활을 염두에 두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의 활동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또한 십자가 복음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유지해나가는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누군가의 배우자이고 자녀들의 부모이며 회사의 직원이기에 앞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한편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찾게 됩니다. 가지면 기쁨과 만족을 얻으리라는 믿음이 바로 좋아함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들이 내 마음에 들어올 가능성이 배제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으니 마음이 향할 곳은 하늘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선한 보물로 의식하여 하나님을 갖고 싶고 하나님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보물을 가진 좋은 나무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좋은 열매로써의 언어가 나타나게 됩니다.
반대로 십자가에서 죽지 못했다면 세상의 가치에 대해 살아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빈자리를 세상의 가치를 통해 채우고자 하게 됩니다. 돈이나 건강이나 자녀의 형통 등이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있고 회사에서는 승진이나 월급이 가치 있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좋게 여기는 것이 못된 나무의 상태입니다. 못된 나무는 못된 열매로써의 언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은 언제 우리에게 강림하실까요?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첫 번째 대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붙잡을 때에 성령강림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만이 제일 좋고, 하나님만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 되실 수 있다고 믿을 때에 성령은 강림하십니다. 문제는 성령의 강림하심을 통하여 나타나는 일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 언어가 대체됩니다. 기존의 생각과 언어가 하나님을 보물로 여기는 사람의 생각과 언어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어가 바뀔 때에 삶은 복지가 됩니다. 처한 환경이 바뀜으로써 복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환경이 가난한 상태에서 부유한 상태가 되고, 멸시받는 상태에서 존경받는 상태가 될지라도 언어의 변화가 없다면 진정한 의미의 복지는 주어질 수 없습니다. 반대로 환경은 하나도 바뀌지 않을지라도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언어가 바뀌게 된다면 삶은 복지가 됩니다.
언어는 반드시 마음의 보물 즉 좋다고 여기는 대상을 중심으로 형성됩니다. 돈이 보물인 사람에게는 모든 언어가 돈을 중심으로 형성됩니다. 언어에서 돈에 대한 사랑과 돈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건강과 장수가 최고의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건강과 장수라는 기준을 중심으로 언어의 체계가 잡힙니다. 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말에는 건강과 장수를 향한 사랑과 의지와 희망이 배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보물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의지와 소망이 드러납니다. 세상을 끌어안고 살던 때와는 달라진 언어 체계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돈을 가장 좋아하는 대상으로 여기며 보물로 삼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악한 보물을 마음에 담은 채로 살아가는 못된 나무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당연히 “돈은 많을수록 좋다, 돈이 있어야 안정되고 행복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자녀가 형통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수많은 별들이 모여서 은하계를 이루듯이 돈과 연관된 무수한 생각들이 모여서 생각의 체계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돈이 없으면 걱정이 됩니다. 다만 실제로는 돈이 없어서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돈과 연관된 언어들이 마음에서 걱정을 일으키게 됩니다. 실제로 돈이 있고 없고가 행복에 관계되느냐에 대한 검증도 없이 언어가 마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망하게 된다는 언어가 마음을 파고들면서 복지를 무너뜨리고 부숴버립니다. 한편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는 이와는 정반대의 상황이었습니다. 돈은 고사하고 육체의 목숨을 잃는 것조차 마음의 평강과 행복감을 깨뜨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돈을 최고의 가치로 믿는 사람들과 동일한 언어 체계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 체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행복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언어에 의해서 마음은 계속해서 자극을 받고 마치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처럼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 속한 언어의 그물에 걸려있습니다. 여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은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마음에서는 하나님께서 보물이 되십니다. 그리고 돈이 아닌 하나님을 보물로 여기는 상태의 언어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저의 경험을 말씀드려보자면 돈은 청산가리와 같은 독입니다. 청산가리를 마시면 입과 식도와 내장이 다 녹아버립니다. 그렇기에 돈은 내 마음 밖에 두어야 할 대상입니다. 마음 안에 들이키면 영혼의 입과 식도와 내장을 모두 녹여버리고 맙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돈맛에 취하는 순간에 천국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돈은 좋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조심해야 할 대상입니다. 돈은 욕구해소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재료일 뿐입니다. 돈은 안 벌리고 없을 때보다 벌리고 많을 때가 훨씬 더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보물로 여기게 될 때 이와 같은 언어들이 마음에서 생겨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가 변화되는 순간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었습니다. 오순절 전까지 제자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자 문을 박차고 나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자들의 기탄없는 말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물인 상태에서 언어가 성립되는 것은 온전히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마음에 새로운 언어가 주어지게 됩니다. 돈은 청산가리와 같아서 좋아할 대상이 아니라 조심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하고, 마음이 돈을 받아들여서 먹어버리면 청산가리를 먹듯이 영혼이 녹아버리고 천국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온전히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보물로 삼았기에 성령님이 생각과 말을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이 땅에서 마주하는 대상들보다 더 우선적인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심으로 나타납니다. 또 땅에 대해서는 세상의 가치를 보물로 삼아 나오는 언어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만을 보물로 삼아 나오는 완전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보물로 삼은 언어가 성령님을 통하여 나의 생각과 입을 통해 나오게 될 때에 복지는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환경이 바뀌는 것으로는 복지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언어가 바뀔 수 있어야만 복지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언어가 바뀌어서 복지가 이루어지면 환경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바뀌어 갈 것입니다.
9월부터 십자가 온라인교회라는 이름으로 온라인상에서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이러한 모임이 처음이기에 어색하고 어떻게 해야될지 잘 모르는 상황이 많습니다. 늘 카메라를 보고 말씀을 전하다가 대화를 주고받는 상황이 되니 어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모임을 이어가는 동안 조금씩 마음에 확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임의 목적이 무엇이고 왜 이런 모임을 허락하셨는가에 대한 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반복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자리에 성령께서 불의 혀같이 강림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보내게 된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보물이 되신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불의 혀처럼 성령이 임하면서 이제까지 살면서 사용해왔던 언어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어부였을 때에는 고기를 가득 잡는 만선을 최고로 여겼을 것이며, 세리는 세금을 많이 걷어서 이윤을 남기는 것을 최고로 여겼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다윗의 나라가 재현되고 자신들은 그러한 나라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게 되기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악한 보물을 가진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며 하늘을 소원하게 된 뒤로 이러한 언어는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보내게 되었고 하나님을 보물로 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성령께서는 똑같은 언어와 문자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과 개념이 전혀 다른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언어가 바뀌면서 마음도 달라졌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도 마음에서는 평강이 깨지지 않는 복지가 이루어지고, 산헤드린공회에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9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신 새로운 언어가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 떨며 도망 다닐 때도 하나님은 살아계셨고 담대하게 산헤드린공회에서 말할 때도 하나님은 살아계셨습니다. 차이점은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확증하게 하시고 언어를 넣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입 밖으로 나오면 말이 되고 입안에 머물러 있으면 생각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그러한 언어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며 두려워 떨던 제자들이 그 예수님을 죽게 한 장본인이었던 산헤드린공회원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께서 이들의 언어 체계를 바꾸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 온라인교회가 시작된 이유도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십자가 생활화에 대해 알아왔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을 보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아갈 때에 성령께서는 이 세상 언어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언어를 주십니다. 승진이 최고의 가치인 회사에서 평강과 복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언어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이 역사를 성령께서 추진해 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십자가 온라인교회에 모이게 하셨는지를 확신하게 됩니다. 십자가 온라인교회를 통하여 삶의 현장에서 언어를 바꿈으로써 본격적인 복지를 건설해나가는 것입니다. 언어가 바뀐다는 것은 세상에서 복지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입니다. 이 복지 전쟁을 위해서 십자가 온라인교회의 모임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만을 보물로 삼을 때에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하나님 중심의 언어 체계가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이를 통하여 복지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고 새로운 언어로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동안에 하나님만이 보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성령이 임하셔서 온갖 종류의 악한 보물을 담고 있는 자들의 언어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보물로 삼는 언어체계가 만들어져 복지를 살아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