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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주시는 생수
본문 <요4:1~19>
오늘본문은 예수님께서 자기백성을 찾아내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앞선 3장의 니고데모와는 다른 모습이지요.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찾아 가십니다.
스스로 찾아간 니고데모는 율법신앙을 말하고,
예수님이 찾아간 사마리아 여인은 은혜를 말합니다.
구원이란?
니고데모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이 찾아가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 스스로 ㅎ님을 찾아 구원을 쟁취하려는 것이 종교입니다.
모든 종교는 그 바탕이 인간 자신이 신을 찾을 수 있고 또한 그 신을 감동시킬 능력이 있다는 가능성을 갖고 신을 대합니다.
인간이 구원의 주체가 되는 구도이지요.
이렇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결과물이 종교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이 구만리장천, 우주 밖에 계신 창조주 ㅎ님이 어디 계시며 어떤 분인 줄도 모르고 어떻게 찾아 간다는 말인가요?
생각해 보시라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그래서 종교는 처음부터 빗나간 것입니다.
이 빗나간 것을 죄라고 하지요(헬/하마르티아: 죄=빗나가다는 어원). 이렇듯 인간이 ㅎ님을 찾을 수 없기에 구원은 ㅎ님이 직접 찾아와 만나 주실 때만 가능해 집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찾아오시는 것일까? 바로 창세전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기백성들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이지요.
이러한 구원의 대상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처럼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내용을 같이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3~4절을 보자.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고 말합니다. 참고로 9절 후반을 보면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한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개나 돼지로 취급했어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거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 사후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나중에 북조는 앗수르의 침공을 받고 망합니다. 그 후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과 민족적 우월주의를 없애기 위해 여러 다른 나라 백성들을 북조 이스라엘에 이주시켜 살게 하고, 북조 이스라엘 사람들도 강제로 다른 나라로 이주시키는 혼합 이민정책을 폈어요. (북조 이스라엘의 별칭이 사마리아)
그래서 순수한 이스라엘의 단일민족은 끝났고 다른 여러 족속들과 혼인하여 사는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남조 유대 사람들도 바벨론에 의해 포로가 되어 끌려갔지만 70년 이후에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는 성전을 재건하는 등의 신앙운동을 펼치고 다른 족속과의 혼인을 엄격히 금함으로 민족 단일혈통과 여호와 신앙을 고수했습니다. 이것이 남조 유다가 북조와 다른 길을 걸어간 신앙의 자존심이고 자랑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남조 유다의 입장에서는 북조 이스라엘이 더 이상 형제나라가 아니라 이방인과 똑같은 부류로 취급해 왔던 것이지요. 그래서 남조 유다가 북조를 무시하고 미워하니 북조 이스라엘도 반작용에 의해 남조유다를 미워하게 되어 서로 상극이요 원수지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 사람이 갈릴리로 왕래할 때는 사마리아로 가면 직선거리이지만, 민족적 악감정과 혐오 사상 때문에 요단강 동편 길로 돌아서 다녔습니다.
우리나라로 비유하자면 부산에서 서울로 갈 때 대구를 거쳐 가야 하는데, 대구가 미워서 광주를 거쳐 전주로 돌아서 서울로 가는 꼴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그런 우회 길로 가지 않으시고 직선 도로를 택하셔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수가성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다는 내용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은 우연의 산물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주님이 단지 길을 단축해서 사마리아로 가셨다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거기에 ㅎ님의 잃어버린 양이 있음을 아시고 일부러 찾아가신 것이지요. 그래서 그 발걸음은 은총의 사건을 의미한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어진 것이니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혜로 빚어진 일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시는 것, 갈릴리로 가시는 것, 도중에 사마리아로 통행하셔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것 모두가 오늘 우리들에게 ㅎ님의 구원의 어떠함(전모)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확대해서 해석해 보자. 유대인들이 보는 사마리아는 저주의 땅입니다.
이는 영적인 의미로 사마리아는 죽은 땅이고!, 사마리아인들은 죽은 자를 상징하고 있지요.
“죽었다”라는 의미는 죄 안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죄와 사망이라는 세력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을 표상하고 있어요. 이들을 누군가가 사망의 권세에서 꺼내주지 않으면 일평생 사망 안에 갇혀서 살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가신 것은 곧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이 사마리아에서 구원의 일을 해 나가시는 것을 통해서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구원의 일을 해 나가시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구원이란 죄에서 건짐 받은 것을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거기서 구원을 받았다면 사망이 없는 영생을 소유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생을 얻었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영생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영생을 가지고 오셨다는 말은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죽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요. 영생을 가지신 예수님이 죽음의 땅에 갔다는 것은 죽은 자들을 살려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죽음의 세상이 생명의 세계로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게 되고 예수님이 찾아가는 자마다 죽은 자에서 산 자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자’라고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 속에 자기 백성들이 섞여 있다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저주 받은 땅에 오신 것은 자기백성들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예수님에 의하여서 찾아냄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으로 찾아짐을 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원함으로 찾아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몫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루실 몫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셨습니다.
계획에서부터 완성까지 예수님 홀로 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잃어버려진 채로 살아간 것뿐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은 자기백성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부터 영생을 주시는 것까지 또한 천국에 앉히는 것까지 다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처음과 나중”이고, “시작과 끝”이고,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시작도 예수님이 하시고 마무리도 예수님께서 다 하신다는 말입니다.
자기 백성도 예수님이 정하시고, 정해 놓은 그 백성을 찾아내는 일도 예수님이 하십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 구석구석 다니시면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십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자기백성들의 구원을 추수로 비유하였는데 추수하는 곡식의 한 알갱이라도 다 찾아내신다고 합니다.
암 9:9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체질이란 키질을 말합니다. 농부가 추수한 후에 타작마당에서 곡식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할 때 키질을 하지요. 그 때 벼이삭이나 혹은 들깨 같은 아주 작은 알갱이가 키질의 바람에 날려 멍석에서 벗어나서 주변 풀속이나 땅의 모래 속에 떨어지면 영영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ㅎ님은 어찌하신다고요?
한 알갱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잃어버린바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안심하라는 뜻입니다. 시139편(ㅎ님의 택함을 받은 자가 바다 끝에 가 있을지라도, 음부에~, 하늘 끝에~, 다 찾아내어 구원시키신다. 이게 ㅎ님의 구원 능력이고 사랑이다.)
예수님도 장차 재림을 하실 때면 천사들을 보내서 세계만방 구석구석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하나라도 잊지 않고 다 찾아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마 24: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천사= 전도자, 복음 사역자)
누가복음 15장에서 성도의 구원을 -잃은 드라크마, 잃은 양을 찾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여자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서 기뻐하여 이웃을 초청하고 잔치를 벌인다고 합니다. 드라크마는 생명이 없는 물질이지요. 당연히 생각 감정 의지가 없습니다. 죄로 죽은 인간의 정체성이 그러하다는 의미이지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자유의지 운운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일 뿐이지요. 이처럼 하늘에 대한 지정의의 감각이 상실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무가치한 자를 ㅎ님이 찾아와서 ‘넌 내 새끼다’하면 안아주시는 게 ㅎ님의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기뻤으면 주인이 잃었던 드라크마, 잃었던 양을 찾고선 찾아낸 즐거움으로 잔치를 벌이고 있다고 비유할까요? 야! 잃어버린 것을 드디어 찾았구나! 야! 기쁘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예전엔 자기 소유였음을 암시하는 말)
성도는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찾아짐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성도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 이외에 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를 자랑하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구원 받음이 너무도 고맙고 감사해서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가적인 것이고 본질은 감사가 전부이고 최선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구원 속에는 인간의 공로는 전혀 개입할 틈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순전히 예수님 홀로 찾아내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그 찾아냄의 첫 케이스가 바로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찾아냄을 당한 사람에게 어떤 일을 일어나는지를 살펴봅시다.
앞서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난 사람은 마치 바람이 스치고 가듯이 어떤 떨림이 나타난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에 의하여서 찾아짐을 받고 구원을 받은 성도에겐 어떤 반응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처음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보면 영과 육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영과 육은 본질이 다릅니다. 본질이 다르다는 것은 곧 가치관도 다르고 지향하는 바도 다르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의 대화는 동문서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늘의 사람과 땅의 사람의 관심사가 어떻게 다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땅의 사람은 땅의 것을 달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하늘의 것을 주시고자 합니다.
육은 땅에 것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땅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육에겐 하늘은 없는 세계입니다. 하늘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바다라고 합니다.
바닷물은 먹을수록 갈증을 유발합니다.
마귀는 이 바닷물로 인간을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육은 늘 목마른 것입니다.
그 목마름의 상징을 오늘 본문에선 우물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을 찾은 것은 물을 긷기 위함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목마르지 않으면 물 길러 올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물물을 가지고 인생이 목마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왜? 목마르느냐 하면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일컬어 “무저갱”이라고 합니다.
“무저갱”이란? 바닥이 없는 굴이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밑 빠진 항아리 입니다.
인간 속에 밑 빠진 탐욕이라는 항아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심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죽도록 움켜잡고자 하여도 잡지 못하고 그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죽습니다.
이 현상 모두가 죄가 몰고 온 저주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은 항상 외부에서 육의본능이 원하는 것을 채워 주어야 합니다.
떨어지면 또 외부에서 충당해야 하고 또 떨어지면 충당해 주어야 합니다.
마치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서 주유를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육신이 필요로 하는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어제도 길었고, 오늘도 길어야 하고, 내일도 길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육신이 요구하는 갈증을 해갈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육이라는 놈은 이젠 되었어! 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항상 다고! 다고! 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인간을 거머리로 표현한 것입니다.
잠 30:15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거머리는 배가 터져도 그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결국 먹다가 죽습니다.
지금 사마리아 여자가 얻고자 하는 물이 그렇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그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다고 다고 합니다.
육의 결핍을 채우고 또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육신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아주 생소한 물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육신이 단 한 번도 필요로 느끼지 못한 아주 기이한 물을 주시겠답니다.
예수님은 물을 얻어먹기 위해서 물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고,
그 물을 빌미로 예수님이 주는 물이 있음을 알려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땅의 물을 가지고 하늘의 물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당초 접점이 없고 상종할 수없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9절에, 여자는 대뜸 ‘어째서 유대인이 개 같은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요4:10~18> 읽고,
10절에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을 알고 너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도리어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랬으면 내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에 여자는 ‘아니 이 우물이 얼마나 깊은데 당신은 두레박도 없으면서 어떻게 이 물을 긷는단 말입니까?’ 반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은 우물에서 긷는 물이 아니고 뱃속에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합니다. 점입가경입니다. 갈수록 알아먹지 못하는 소리만 합니다.
예수님이 주신다고 하는 물은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들 속에서 공장이 차려져서 주야장창 샘물처럼 펑펑 솟아난다고 합니다.
어떤 물이 마음속에서 솟아난다고 합니다.
세상에선 볼 수 없는 참 희한한 물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낯선 물입니다. 아니 세상에 어디에 그런 물이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에게 그런 물이 있으면 얼른 달라고 합니다.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이 어떤 것이기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합니까?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 물은 다름 아닌 성령입니다.
예수님이 주는 물이 성령이라면, 세상의 물은 세상의 영이란 뜻입니다.
세상의 영이란? 마귀의 영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사람으로 하여금 목마르게 한다는 말이 됩니다.
마귀는 인간의 육을 볼모로 잡고 인간을 괴롭힙니다.
마귀의 영은 세상의 영입니다.(그 정신사상, 그 가치관, 세계관, 추구하는 가치와 의미)
마귀는 세상의 것으로 끝없이 갈증을 유발시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로 사람들을 목마르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일평생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하여 종처럼 수고와 슬픔으로 살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세상 것으로부터 목마르지 않게 해 준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성령이 사람을 죽이고 살려내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세상 것으로 목말라 하는 육을 죽이고,
세상 것과 전혀 상관없는 하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사람은 땅에 것을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시는 말은 내가 너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땅의 가치관으로 사는 인간을 십자가로 끌고 가서 죽이고,
하늘의 가치관으로 사는 인간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그 물을 달라고 하니 뜬금없이,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신 겁니다.
아니, 예수님이 주시는 물인 성령과 남편이 무슨 상관이 있길래 불러 오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여자는 난 남편이 없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맞다. 넌 남편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남편은 여섯 번째인데, 그래 네 말대로,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분명히 남편이 있다고 하시면서 남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자 입장에선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이 무슨 의도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하셨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남편을 바꿔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알다시피 사마리아 여인은 육신의 갈함을 해결하려고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혼에 갈함을 해결해 주는 물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앞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거듭난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사람이 되면 육의 것으로 목말라 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생명이 작동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생명은 땅에 것으로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시는 말씀은 네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목말라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육신이 요구하는 갈증만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갈증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여인에게
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를 바꿔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모든 죄인들을 표상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마리라 여인같이 육적인 문제를 해결 받으면 행복하리라 생각을 합니다.
이것을 목마름을 해갈하는 물긷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은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육적인 조건이 좋다고 하여도 목마름을 해결할 수가 없고 마음에 쉼을 누릴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죄인은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영생을 받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구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먹을 것 마실 것이 해결되어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지 않으면 인생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죄 문제를 해결 받지 않으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 날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하여서 이 사실을 잘 알려 주셨습니다.
부자는 세상 것을 많이 모아두면 불안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쌓아도 쌓아도 심연 깊은 곳부터 밀려오는 불안함은 해소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결국 어리석은 부자는 세상 것이 부족해서 불안해 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것으로도 해결 할 수 없는 마음속에서부터 밀려오는 근원적인 생사문제 때문에 번민한 것입니다.
지금 사마리아 여인도 어리석은 부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물에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에게 근원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화목 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마음으로부터 밀려오는 불안을 해소 할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죄인은 죄와 사망의 문제가 해결 되지 않고서는 곤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이 일평생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풀어 주려고 오셨습니다.
죽음에서 풀려나면 그 어떤 것으로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죽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은 한 셋트입니다.
그러니 죄가 없어지면 죽음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마귀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원인이 죄라는 것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죽는 것은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났다는 것은 곧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만물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서러워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은 죽음을 거부합니다.
본능이 죽음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죽기 싫어한다는 것은 죽지 않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종교들이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여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불노장생하려고 쉼 없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삯으로 죽음을 주었습니다.
이는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노장생 할 의약품을 개발할 것이 아니라 죄 문제를 해결하여야 합니다.
관심을 약 개발에 두지 말고 죄 문제를 해결할 것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귀가 마음을 혼미케 하여서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가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마귀 아래 있는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서는 소경인 것입니다.
죄가 있는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인줄도 모르는 겁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자는 죄 문제를 해결해야할 필요성도 모르고 그 의미도 모릅니다.
구원이 복음이 되려면 먼저 죄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가 숨기고자 하는 죄의 수치를 폭로하여 인간 실존을 고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 좀 얻어 마십시다!’ 라고 해 놓고선, 여인의 수치를 까발리시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자 입장에선 예수님이 하는 말이 해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치를 감추고 싶어서 아무도 오지 않는 정오 시간에 물을 길러 온 것인데,,,
중동 지역의 정오는 너무 더워서 아무 일도 못합니다.
그곳의 한 낮은 너무 더워서 장사하는 상점들도 문을 닫습니다.
그 시간에 일하면 너무 뜨거워서 열사병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여인들도 그 시간엔 물을 길러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는 가장 뜨거운 낮 12시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왜? 남들이 쉬고 아무도 없는 그 시간에 물을 길러 왔을까요?
이는 사람을 만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아무도 없는 그 시간에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결국 사마리아 여자가 낮 12시에 물을 길러 왔다는 말은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인데,
이는 자기를 숨기기 위하여 아무도 없는 시간에 온 것입니다.
사람의 눈을 피하고자 함은 곧 자신이 수치스러운 여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감추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수치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은 수치가 많을수록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두문불출하는 이유가 창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법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책잡힐 수치스러운 일은
곧 남들로부터 무시당하는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것입니다.
수치란? 죄입니다.
죄의 특성은 감추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드러나면 세상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제일먼저 한 것이 숨는 것이었습니다.
왜? 숨습니까?
벌거벗은 것이 수치스러웠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사마리아 여자는 창기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선악의 잣대(윤리, 도덕)로 본다면 형편없이 타락한 여자입니다.
스스로가 수치가 많은 여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아무도 없는 낮 시간에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결국 사마리아 여자가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는 이유는, 여섯 남편을 거쳐 온 자기의 과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진정으로 시원해지려면 자신의 수치가 가려져야 합니다.
과거가 다 날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살면서 과거는 상처의 흔적처럼 없어지지 않고 따라다닙니다.
과거를 지우려면- 죽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나야만 합니다.
한마디로 죄인의 몸이 죽어야만 비로소 죄라는 수치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여인이 목말라 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자기의 추한 모습 때문입니다.
과거의 추한 모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않고서는 목마름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자신의 수치를 감추고 숨어서 지낸다는 것은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가 진정으로 자유로워 질 수 있게 하려고, 들추고 싶지 않은 그의 과거를 끄집어내도록 한 것입니다.
즉 죄 문제를 들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여자를 찾아가서 넌 창기이고 죄인이라고 각인시키는 겁니다.
너는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를 들춰 낸 것은 정죄키 위함이 아니라 자유케 하려는 것입니다.
죄는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고통은 더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니 두려움이 엄습하였고 수치를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서도 불안해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ㅎ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찾으신 것은 수치를 가려 줄 옷을 입히기 위함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감추어주기 위함입니다.
수치를 없애 주려고 수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살리기 위해서 죽인다는 말과 같습니다.
인간들이 생각엔, 수치를 없애주려면 수치를 드러내지 말고 가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수치를 없애려고 수치를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죽음으로서만 해결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죽지 않고 죄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죽지 않고 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야만 한 것은 죄는 죽음으로서만 해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넌 죄인이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숨기고 살고 싶은 사람에게 넌 이런 죄인이라고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피하고자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에 물을 길러 왔는데 상종하지도 않는 사람이 찾아와서 너는 창기라고 지적하고 있으니 예수님은 참으로 야속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남에 허물을 들추어내서 묵사발을 만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성격이 괴팍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숨겨서 없애지는 것이 아니라 드러남으로서 없애집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때 죄는 사라집니다.
ㅎ님은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아니야 넌 의인이야” 라고 하고,
“주여 난 의인입니다” 라고 하면
-“아니야 넌 죄인이야” 라고 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자는 의인이고, 죄를 모르는 자는 죄인입니다.
죄 사함이란? 죄를 아는 자에게만 기쁜 소식이지,
죄를 모르는 자에겐 우이독경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죄사함이 복음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성도가 받은 복이란? 죄를 지적해 주시는 분이 있고 죄를 안다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받은 복은- 죄를 고발하는 율법을 받은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에게 율법은 복음입니다.
죄를 지적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3장~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뇨? 즉 복이 무엇? 율법을 받은 것이라)
이방인들은 죄를 지적하는 율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니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죄를 지적하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지금 사마리아 여자는 복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죄를 지적하는 예수님이 찾아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감추고 싶은 남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섯 남편이 있었다고,,,,
이혼을 다섯 번 하였거나 아니면 속된 말로 남편 다섯을 잡아먹었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지지리도 복이 없는 재수 없는 여자입니까?
사람들마다 저 여잔 남편 다섯이나 잡아먹은 여자야! 라고 수군거리는 말이 귓전에 쟁쟁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남편 이야기만 하면 경끼를 하고 귀가 번쩍 뜨일 것입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처음 본 사람이 부채도사 같이 자신의 과거사를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자는 대뜸 예수님을 보고 선지자라고 합니다.
선지자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자의 반응을 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무슨 일을 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타락하면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이 죄를 지적하도록 했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이유는 사람은 죄를 품고서는 절대로 마음에 쉼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에게 선지자를 세워 죄를 폭로케 하는 것은 죄에서 놓임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역설적으로 복음은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언제 기분이 나쁩니까?
나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잘못을 지적 할 때입니다.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할 때입니다.
세상의 영은 인간을 긍정하지만 성령은 인간을 부정합니다.
성령은 인간에겐 선이 없다고 정죄합니다.
너는 누에고치에서 실이 뽑혀 나오듯이 일평생 죄만 토해낸다고 합니다.
지금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선지자 역할을 감당케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아시아 7교회에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여
각 교회마다 책망하고 쉴 길을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곪은 것을 짤 때는 고통스럽지만 짜고 나면 시원한 것 같이
성도들도 죄를 찔림 받을 땐 아프지만 회개하고 토설하면 시원함을 얻습니다.
아! 내가 이런 존재였구나! 를 알면 자기에게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편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마르지 않고 시원케 해줄 생수를 남편 문제로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의 남편들은 모두가 여자를 목마르게 하는 것들 이였습니다.
작게는 자기 수치를 가리는 일이고, 크게는 세상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행복의 지수: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남편에 따라 운명이 달라짐)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의 여섯 남자들을 보고 네 남편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여자를 진정 평안케 해주는 진정한 남편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생수를 줄 남편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수를 주기 전에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여 남편과의 단절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진정 자유로워지려면 세상 것에 목말라하는 옛 사람의 죽음입니다.
옛 사람이란? 세상을 돋보고 지향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도는 세상과 단절하지 않고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구원이란? 과거로부터의 심판을 전제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십자가로 주어지는 것은 옛 사람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성도를 십자가로 데리고 가서 넌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같이 죽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이게 믿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IX 십자가가 믿어지는 게 기적이다)
인간은 세상에 대한 탐욕이 죽지 않는 한 시원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새사람으로 살려 내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은 성도에게 십자가 사건을 일으켜서 세상에 대한 목마름으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임으로서 자유를 주십니다.
12제자들이 이 물을 마셨고, 사도바울이 이 물을 마셨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물을 마셔서 세상 것으로부터 초월된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신 성도들은 세상 것으로부터 목말라 하지를 않습니다.
불가능 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물론 생수가 펑펑 솟아 날 때만 가능해지지만 말입니다.
잘 안됩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성령충만으로 지속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늘 상한 마음으로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실패케 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넘어질지라도 네가 사는 것은 IX의 대속의 은혜가 지금도 계속되기 때문임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여전히 죄 아래 팔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헐적이나마 육이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생수의 샘이 그 속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실력이 아니고 주님이 내가 너희 속에 살았다는 것을 알리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 안에서란? 세상 밖에서라는 뜻입니다.
즉 난 이미 예수님과 죽은 자라는 것을 알 때란 말입니다.
십자가 안에선 세상을 이길 수 있지만, 십자가 밖에선 번번이 깨어집니다.
예수님 뜻대로 못 산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육신을 못이기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와 긍휼과 용서로서 구원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라는 놈은 성도들 속에서 그 샘물이 솟아나지 못하도록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세상 것으로 우물의 아구를 막고자 합니다.
마치 구약 아브라함의 우물을 블레셋 원수들이 막아 버리듯이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야곱이 라헬을 만날 때, 우물의 아구를 돌로 막은 것을 야곱이 옮겨주어서 라헬의 양떼를 먹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야곱처럼,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늘의 물을 먹이고 계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들을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서 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행위를 보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믿고 감사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 합니다.
...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