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의 造化
점잖게 안달 난 꽃 색이야
초록 바다에 떠 있는 하얀 무덤들을 봐
천년을 지켜온 한 떨기 弔花 같아
네가 처음으로 뿌리내린 흙에서는
분홍이 올라왔지
어느 날 흐려진 꽃대 툭 잘라내자
계절은 부푸는 색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어
위태로운 소리를 삼킬 때마다 잎이 마르는 건
용도가 파기된 꽃말의 처세
저기 저 파랑 엉덩이를 봐
붉게 피던 절기가 겹겹 색을 바꾸고 있어
분홍 떨기로 다시 돌아가게 해주세요
만년의 기도는 땅속으로 스미고
초록의 내력을 아는 흙은 보랏빛으로 냉정했지
그래, 이것이 너와 나의 사랑이었던 게야
분홍으로 와서 파랑으로 번지고
보라로 가라앉더니 하양으로 지고 있어
우리 뜨거움의 온도가 달라지고 있던 게야
그래, 이 모든 색의 조화가
자주 변하는 내 배꼽의 농도 때문이었던 게야
시작 노트
분명 청보랏빛 수국을 심었다. 그런데 다음 해에 분홍 수국이 피었다.
흰색으로 피기 시작하여 점차 분홍으로 되었다가 보라로 지기 마련이라던데 어찌 분홍에 머물러있는지 안타까웠다. 여러 해를 넘기고서야 흙의 ph농도에 따라 색을 달리 한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가 내 기대와 다르게 변한다는 건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그 속내를 들추어 보면 결국 내 마음의 농도가 달라졌던 게다. 올해도 어김없이 수국의 계절이 돌아왔다. 알칼리성 비료를 사러 가는 시간과 정성을 내지 못해 나는 또다시 성의 없는 분홍과 마주하고 있다. 우리의 바깥이 자꾸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는 탯줄의 조화인 것이다.
유금란 / 수필가이자 시인. 산문집 ‘시드니에 바람을 걸다’, 공저 ‘바다 건너 당신’. 재외동포문학상, 동주해외신인상. 문학과 시드니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