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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소재지 1: 강원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 198번지 (남이섬의 주장)
소재지 2 : 경기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 145 (문화재청 주장)
실제로는 둘다 증거는 없지만 문화재청에서 인증한것을 우선으로 해야 할 것 같고 다른 내용은 비교해보시라고 올림니다.
남이장군이 묻힌 장소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가 묻혔다는 전설이 담긴 돌무덤이 있고, 그곳의 돌을 함부로 가져갈 경우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고 한다.이로 인해 관광회사에서 그 돌무더기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고, 둘레를 잘 꾸며 지금의 묘를 만들었다 한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화성시에 있는 것은 봉분이 둘로 합장된 묘로 보이고 문화재청에서 그쪽에 비중을 더 두고 있어 현재는 화성시쪽으로 봅니다.
남이섬은 관광차원에서 홍보를 하지 않을까? 암튼 이건 제 생각입니다. ^^
----------------아래는 참고하세요------------------
세조 3년(1457)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세조 13년(1467)에는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여 적개공신 1등에 봉해진 후, 여진을 토벌하여 이등군공에 올랐으며 26세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1468년에 예종이 즉위하자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모를 꾀한다하여 28세 때 처형당하였다. 그 뒤 순조 18년(1818)에 복직되었으며,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고려 공양왕릉이 경기 고양과 강원 삼척에 있습니다만, 남이장군 묘도 경기 화성과 강원 춘천(남이섬) 두 곳에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화성에 있는 남이장군 묘를 인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남이장군이 어디에 묻혀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고도 합니다.
남이장군이 묻힌 장소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가 묻혔다는 전설이 담긴 돌무덤이 있고, 그곳의 돌을 함부로
가져갈 경우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관광회사에서 그 돌무더기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고,
둘레를 잘 꾸며 지금의 묘를 만들었다 한다.
그의 묘는 경기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있다.
남이장군의 일화
그는 좌의정 權擥(권람)의 사위이다.
권람의 사위가 된것도 전해져 오는 사연이 있다.
남이 장군이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한양의 외가에 들려 그곳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젊은 처자 하나가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빨간 보자기로
무엇인가를 싸 가지고 머리에 이고 가고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니 분 바른 요괴 하나가 보따리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른 아이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나머지 그 여자의 뒤를 쫓아가다 보니
어느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조금 있더니 집안에서 갑자기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이는 '분명히 그 귀신의 짓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들어갔다.
남이가 안채에 들어가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길에서 보았던 그 분 바른 귀신이 규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 요망한 귀신아, 그 손을 썩 놓지 못할까?"
남이의 호통에 놀란 귀신은 재빨리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죽어있던 규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일어났다.
죽어 있던 규수가 살아나자 남이가 밖으로 나오니, 규수가 또 죽었다면서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한 번만 더 살려달라고 붙잡았다.
남이는 복숭아나무 회초리를 꺾어 들고 방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귀신이 규수의 가슴을 타고 앉아 목을 조르고 있었다.
남이는 회초리로 세차게 내리치면서,
"이 요망한 귀신아, 감히 뉘 앞인데 사라지지 않느냐!"
하고 호통치자 귀신은 두려워하며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규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났다.
이 규수는 좌상 권람의 막내딸이었다.
그날 저녁 퇴궐하여 집에 돌아온 권람은 그간의 전말을 듣고
귀신을 쫓았다는 도령을 범상치 않은 인물로 생각했다.
권람은 점장이를 불러들여 남이의 사주를 짚어 보게 했다.
"대감, 아무래도 제명대로 살기가 어렵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권람은 다시 딸의 사주를 짚어 보게 했다.
"여쭙기 어렵사오나 따님의 명도 역시 매우 짧을 듯하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식도 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도령을
사위로 삼아도 그 복만 누리실 뿐 화는 보시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남이를 사위로 삼았다한다.
귀신을 쫓아준 인연으로 권람의 사위가 되었던 남이는 점장이의 말대로
명대로 살지 못했지만, 그의 부인은 옥사가 있기 전에 죽었다한다.
[사진 / 草阿(초아) 박태선(안내판과 인터넷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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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장군(南怡將軍)에 대한 소고(小考)
옛날 충주 음죽현[현 경기도 이천군·충북 음성군 일부] 지역에는 남이장군과 관련된 전설 몇 편이 전승되고 있고, 이 지역 상평국민학교 교가에도 남이장군이 나타나고 있어 예전부터 이 지역 주민들은 남이장군이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잔자골에서 태어났다고 알고 있다.
남이장군의 출생은 전설뿐 아니라 음성군지·이천군지에도 기록되어 있고, 흔히 국민학교 교가라고 하면 지리적으로 당해 지역의 근간을 이루는 산이나 하천 또는 역사적으로 그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을 인용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이장군이 태종의 외증손이라고는 하지만 태종의 장남인 경령군의 묘가 충주시 주덕에, 그 부인인 청풍김씨의 묘가 바로 장군의 탄생지인 영산리로 지척에 소재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장군의 장인인 길창부원군 권람이 묘소(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도 직선거리로 대략 2km이내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한성부에 ‘남이의 집이 동부□방에 있었는데 사람이 감히 살지 못했기 때문에 드디어 없어져서 채소밭이 되었다.’ 그리고 이규태 선생의 『이규태의 600년 서울』에서 남이장군이 ‘종로구 연건동 126번지에서 태어나 살던 집터’로 보고 있기 때문에 남이장군의 출생지가 서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나 아직 단정하기는 이르다고 본다.
따라서 남이장군을 생각하면서 장군과 관련된 전설·유적 등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남이장군(南怡將軍) 전설(傳說) 1<출생설화>]
장호원읍 백족산(白足山) 위에는 굴바위라고 부르는 커다란 바위굴이 있고 근처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는 절터가 있다.
옛날 이 절에는 수십 명의 스님들이 수도를 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밤이면 꼭 한 사람씩 승려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거듭되자 남은 승려들은 전전긍긍하여 하나씩 둘씩 떠나버리고 마침내 스님 한 분이 홀로 남게 되었는데 믿음이 깊은 이 스님은 사라진 승려들이 모두 부처님이 극락으로 데려갔을 것으로 믿고 자신도 떠나기 전에 평소 각별히 지내오던 장호원의 글방 선생을 하는 친구를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해 두기로 하였다.
전부터 이 괴변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오던 글방 선생은 친구인 스님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절로 떠날 것을 권고하였으나 스님이 듣지 않으므로 무명 옷 한 벌을 내어 주면서,
“내가 자네에게 바라는 마지막 청이니 이 옷을 입고 가게나, 냄새가 좀 나더라도 절대 벗어 버리지 말고 꼭 입고 있어야 하네.”하고 간곡히 당부했다.
친구에게 작별을 고하고 돌아온 스님은 친구가 준 무명옷이 약간 거무칙칙한 빛깔에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이 싫었지만 친구의 간절한 부탁도 있고 해서 그냥 입은 채 부처님 앞에 나아가 염불에 열중하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밤이 깊어지자 별안간 천둥치듯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나타나 스님을 덥석 물고는 굴바위 쪽으로 사라져 갔다.
이튿날 친구의 안위가 궁금해진 글방 선생이 절에 올라 스님을 찾아보았으나 절안은 텅텅 빈 채 친구의 간곳이 묘연했다. 주변을 찾아보니 굴바위 앞에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나자빠져 있고 그 목에는 자신이 친구에게 주었던 무명옷 자락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옷에 칠해 둔 독한 담뱃진 때문에 스님을 삼킨 지네도 죽었던 것이다.
그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으니 백족산 허리 부근에 오색영롱한 구름이 감돌더니 구름에서 나온 상서로운 기운이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개미실(충북 음성군 감곡면) 남씨 집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달부터 남씨 문중에 태기가 있어 사내 아니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자라니 그가 유명한 남이장군이라 한다. 그러므로 남이장군은 지네의 정기를 타고 나서 영특하였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출전 : 이천군지pp900~901/이천군지편찬위원회/1984》
☞ 음성군지에는 마지막 남은 스님이 주지승이라 하고, 스님의 친구는 지금의 율면 총곡리(포기실)에 사는 박진사라 하고 있다. 그리고 무명옷에 바른 것은 담뱃진 대신 비상을 물에 풀어 여러번 먹인 솜으로 지은 두루마기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아래 설화에서와 같이 남이에게 글공부를 시키는 선비는 바로 박진사로 표현하고 있다.
[남이장군(南怡將軍) 전설(傳說) 2<출생설화>]
장호원읍 남서쪽에 있는 백족산에는 ‘굴바위’라 부르는 천연의 바위동굴이 있다. 옛날 이 바위동굴 속에 백개의 발이 달린 천년 묵은 지네가 살았다고 하여 산 이름을 ‘白足山’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백족산 밑에 자리잡은 마을에서는 일년에 한 번씩 일정한 날을 택하여 굴바위 앞에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제사도 그냥 제사가 아니라 아리따운 처녀 하나를 골라 산채로 바치는 인신공양의 끔찍한 풍습이었다.
제사를 지낼 때는 마을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모여, 제물로 간택된 처녀와 죽을 쑤어 담은 커다란 항아리와 과일 등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 후, 겁에 질려 울부짖는 처녀를 그냥 남겨둔 채 산을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튿날 사람이 가보면 처녀는 영락없이 빈껍데기만 남은 시체가 되어 굴바위 앞에 쓰러져 있곤 했다.
해마다 제사일이 가까워오면 마을의 과년한 처녀들이나 그 부모들이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만약 제사를 거른다면 산신의 노여움을 사서 큰 재앙이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에 해가 거듭될수록 꽃다운 처녀들의 희생만 늘어가게 되었다.
어느해 음죽현(陰竹縣, 지금의 경기도 장호원읍, 율면, 충청북도 감곡면, 생극면, 금왕읍 일대) 고을에 새 원님이 부임하여 왔다. 이 원님은 마을을 순행하던 길에 통곡소리가 낭자한 집이 있어 그 까닭을 묻게 되었다. 그랬더니 마을의 장로 한 사람이 나서서 말하기를 “우리 동네에서는 일년에 한 번씩 처녀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이번에 저 집 처녀가 제물로 뽑혔기 때문에 가족들이 슬퍼서 저러는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장로에게서 일의 자초지종을 들은 원님은 여기에는 필시 어떤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사람을 제물로 바치다니 참으로 해괴한 일도 다 있구나.”하고 중얼거린 원님이 드디어 영을 내렸다.
“여봐라, 멀쩡한 산처녀를 제물로 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 저 집 처녀를 그냥 집에 있도록 하여라.”
원님의 영이 떨어지자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사색이 되고 말았다. 장로 한 사람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면서 “안됩니다. 사또, 지금까지 한번도 제물을 거른 일이 없는데, 이번에 그 일을 중단한다면 우리 고을에는 큰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마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장로의 말이 옳다고 했다.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제물로는 내가 대신 갈 것이다.”
원님의 대답에 이번에는 그를 수행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만류했으나 원님을 입을 굳게 다물고 머리를 흔들었다.
드디어 제삿날이 되자 원님은 새색시의 옷으로 변장을 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굴바위로 올라갔다. 제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원님을 그 자리에 남겨둔 채 황급히 산을 내려가면서 모두들 내일 아침에는 원님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노라고 쑤근대는 것이었다.
한편 굴바위 앞에 혼자 남은 원님은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인채로 무엇인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별안간 ‘쏴아’하는 바람소리가 들리더니 굴바위 안으로부터 뽀얀 안개같은 연기가 흘러나와 주변을 감싸는 것이었다. 순간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르며 거대한 뱀과 같은 시커먼 괴물이 안개 속에서 나타나더니 제물로 차린 커다란 죽 항아리를 순식간에 비우고 이번에는 처녀로 변장한 원님을 향해 덮쳐들었다.
원님은 옷자락 속에 숨겨두었던 장검을 뽑아 덮쳐오는 괴물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칼을 정통으로 맞은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무섭게 날뛰기 시작하자 원님은 계속 칼을 휘둘렀다. 이윽고 주변을 감쌌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나자 그 자리에는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몸이 몇 개의 토막으로 잘리어진 채 죽어 있었다. 결국 해마다 마을 처녀 한 명씩을 잡아먹은 괴물은 천년 묵은 지네였던 것이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죽은 지네의 몸둥이에서 새파란 기운이 뻗쳐 나오더니 곧장 청미천 건너에 있는 개미실(지금의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로 날아가서는 마을에 있는 한 농가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집이 남씨(南氏) 댁이었는데 남씨의 부인이 그 날부터 태기가 있더니 열달 후에 귀여운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자라면서 남달리 영민하고 비범한 자질을 나타냈다. 하루는 선비차림의 길손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남씨 아이가 노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아이를 앞세우고 부모를 만나 자신이 아이를 가르치겠노라고 자청했다. 아이의 부모도 쾌히 승낙하여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선비는 그 날부터 아이에게 글공부와 무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깨우칠 만큼 자질이 뛰어 났다.
아이가 선비에게 글공부를 배우기 시작한지도 수년이 지난 어느날 밤의 일이다. 선비가 자는 사랑방 앞에 작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손에 비수를 든 작은 그림자는 깊이 잠든 선비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더니 선비의 가슴을 사정없이 찌르는 것이었다. 이 때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병풍 뒤로부터 깊이 잠든 줄 알았던 선비가 나타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선비를 죽이려한 괴한은 선비가 가르치던 남씨 아이였던 것이다.
선비는 아이를 처음 본 순간, 아이가 비상한 상을 타고 났으면서도 그 미간에 깊은 살기를 지니고 있어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이부자리 속에 짚으로 만든 인형을 넣어 잠든 것처럼 가장하고는 아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너는 천년 묵은 지네의 정을 타고 났기 때문에 지네의 원한이 깃든 살기를 너도 모르게 지니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지네의 살기도 없어졌으니 앞으로는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나라를 위해 큰 인물이 되도록 하여라.”
선비의 말에 아이는 깊이 머리를 숙였다. 이 소년이 자라서 나중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라 이름을 떨친 유명한 남이장군이라고 한다.
《출전 : 음성군지pp1461~1463/음성군지편찬위원회/1996》
☞ 음성군지 인물·성씨편에 ‘남이장군은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 · ·(중략)· · ·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잔리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옛 지명으로 개미실이라 함은 상평리, 영산리, 월정리 일대를 가리킨다.
☞ 설화상 남이장군의 출생지는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2리 잔자골이다.
[남이장군(南怡將軍) 전설(傳說) 3<결혼 및 요사(夭死) 설화>]
남이장군은 세조 3년(1457) 17세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소년 무장으로 세조 13년(1467)에 이시애(李施愛)가 북관에서 난을 일으키자 우대장으로 이를 토벌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오르고 27세에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요사(夭死)하였다.
요사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장군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회정할 때 백두산상에 평정비를 세우고 비문에 새기기<'北征詩(북정시)>'를,
白頭山石磨刀盡 /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 / 두만강의 물은 말먹이 물로 다 없앴네.
男兒二十未平國 / 사내 나이 이십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 훗날 그 누가 사내대장부라고 일컬으리오.
라는 시를 남기었는데 후에 비문이 화근이 되어 간신들의 간교(奸巧)로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이라 했다고 하여 역적으로 몰려 요사한 것이라 한다.
또한 전설에는 장군이 소년시절 요괴를 능히 보았다고 한다. 하루는 거리에서 감을 광주리에 담아 이고 가는 여인을 보니 광주리 위에 요괴가 앉아가는 것을 보고 이상히 생각하여 뒤를 따라갔다. 그 여인이 큰 소슬대문으로 들어가므로 쫓아 들어가지 못하고 이 집에 반드시 큰 일이 생기리라 생각하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해가 질 무렵 대감 따님이 죽는다고 집안에서 야단이 났다. 장군은 즉시 뛰어 들어가 주인 대감을 보고 사연을 말하니 상황이 다급하여 그대로 장군을 내실로 안내하였다. 환자의 방에 들어가 보니 환자가 헛소리를 지르는데 아까 광주리 위에 앉아온 요괴가 환자의 목을 누르고 가슴 위에 올라앉아 있으므로 장군이 이를 보고 호령을 하니 요괴는 원통하다는 듯이 장군을 보고 눈을 흘기며 달아나자 환자가 즉시 일어나 앉으니 대감내외는 물론 집안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에 대감은 장군을 보니 영특하고 또한 딸이 아무리 병중이라 해도 처녀의 몸으로 외간 남자를 보았으니 다른 데로 출가할 수 없다하여 장군을 사위로 삼았다. 이 대감이 당대 재상이요, 세조 공신인 권람(權擥)이니 이로써 남이장군은 권람의 사위가 되었다.
남이장군이 역신으로 임금을 배알할 때 임금도 인물을 아깝게 생각하고 몇 번이나 비문조사 사신을 보냈으나 보고는 한결같이 득(得)자가 분명하다고 했다.
이 때 임금이 공모자를 심문할 때 (이시애)난을 평정할 때 대장 강순(康純)이 영의정으로 임금을 옆에 모시고 앉아 있으면서도 자기의 안전만을 위하여 부하의 억울한 누명을 보고도 가만히 있는 비의(非義)에 분개하였고, 또한 함께 정벌에 나섰다는 관계로 강순도 사형을 받았는데, 수레에 묶여 남문 외 형장으로 끌려 나가는 도중에 강순이 억울하게 죽는 것을 분하게 여겨 “남이야 너는 어찌하여 이 늙은이를 억울하게 죽게 하느냐?” 하니 태연한 얼굴로 “직위는 한 사람 아래에 있고 모든 사람의 위에 올라 있으며 나이가 70을 넘었으니 무엇이 아깝고 원통하오. 나는 삼십도 안되어 앞이 창창하며 아직 국가를 위해 일을 많이 할 수 있겠거늘 어찌 목숨을 아껴 부하의 원통함을 씻어주지 않는 불의(不義)의 목숨은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미평국(未平國)이 미득국(未得國)으로 보이게 한 것은 요괴가 남이장군에게 복수를 한 것이라고 한다.
《출전 : 이천군지pp901~902/이천군지편찬위원회/1984》
<남이장군 출생지 잔자골 : 주천저수지 건너>
잔자골에는 30~40년 전만해도 민가가 있었으나 지금은 외진 곳으로 사람이 살고 있지 아니하다. 저수지는 일제시대에 조성하였다.
<경령군부인김씨묘(敬寧君夫人金氏墓)>
종 목 : 시도기념물 99호
소재지 :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산15-1
조선 태종의 장남 경령군의 부인 청풍김씨의 묘이다. 태종 16년(1416)에 경령군과 혼인을 하였으며, 태종 17년(1417)에 안산군부인으로 봉해졌다. 세종 32년(1450) 4월 죽어서 현 위치에 장례하였다. 세조 4년(1458) 9월에 삼한부부인으로 봉해지고 고종 9년(1872)에 청원부부인으로 봉해졌다. 이 묘소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왕족의 4각형 묘로서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으며, 묘 앞에는 묘비 가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이 있다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음동마을에 있는 경령군(敬寧君)의 묘와 떨어져 있는 이유는 서로 명혈을 찾아서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 재 지 : 종로구 연건동 126번지
남이(南怡, 1441~1468)는 본관이 의령으로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에게 장가간 휘(暉)의 손자로 태종의 외증손자가 된다. 17세에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좌의정 권람(權擥, 1416~1465)의 넷째 딸과 결혼하였다.
서울대학병원의 동남쪽 모서리에 서울대학 수의과대학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안쪽으로 창경국민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모두 옮겨가고 없지만 그 북쪽 경계목이 연건동 126번지로 세조 때 불운의 명장 남이장군이 태어나 살던 집터이다. 이곳 지명 연건동이 이전에 연지동이었고 연지동 이전에는 남이탑동으로 불렸던 것은 바로 이 남이를 위령하는 탑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살았다고도 한다.
남이는 태종의 외증손자이기에 궁 나들이를 자주했고 어릴 때부터 기가 센 편이라 궁중을 드나들며 당시 세자였던 예종하고 자주 싸워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길창부원군 권람(吉昌府院君 權擥)의 집터>
권람(權擥, 1416~1465)은 자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시호는 익평(翼平)이며 권제(權踶)의 아들이며 양촌 권근(陽村 權近)의 손자이다. 문종 때 친책(親策)에 급제하고 세조정난 때에 한명회와 같이 공을 세워 일등공신으로 이조참판이 되고,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진봉되었고 우의정의 벼슬까지 지냈다. 출세에 힘써서 사치가 대단했다 한다.
그의 집은 후조당(後凋堂)이라하여 목멱산(현 서울 남산) 북쪽 기슭, 비서감(秘書監) 동쪽 바위 벼랑에 있었는데 세조가 그 집에 갔을 때 그 서쪽 벼랑에 돌샘이 있으므로 이름을 어정(御井)이라 하였다.
그 위에 소한당의 유적이 있다.
젊을 때부터 대가 집의 자제답게 글 일기를 좋아하여 책을 지고 명산 고적을 찾아서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반드시 한명회와 더불어 함께 다녔으며 이르는 곳마다 글을 읽으며 문장을 지어서 회포를 풀고 벼슬길에는 마음이 없었다. 하루는 어떤 친구가 과거를 보라고 권하였다. 부질없이 새삼스레 무슨 과거냐고 일축하다가 생각을 고쳐 과거를 보기로 했다. 과거에 응하여 초시부터 시작하여 모조리 세 번이나 장원을 했다. 평소의 실력과 학문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말해주고 있다.
또 공이 어머니를 위해서 잔치를 벌렸더니 학발(鶴髮, 학의 털)이 마루위에 덮이고 초헌과 일산이 문을 메워 높은 손님들이 끓을 사이 없었고 당시의 영의정이었던 세조가 잔치에 참가하여 친히 그의 어머니께 헌수했다 한다.
《출전 : 음성군지pp1454/음성군지편찬위원회/1996》
☞ 『동국여지비고』 제택조에 “권람의 집이 목멱산 기슭 비서감 동편에 있었는데 그곳은 일찍이 무학대사가 잡아준 바위 위의 집터였다. 세조 임금이 행차하여 그 서쪽에 있는 벼랑바위 돌샘물을 마신 후로 어수우물(御井)이라 불려왔다. 그 집터 위에 소조당(素凋堂) 유적이 있어 후에 후조당(後凋堂)이라 했다가 지금 녹천정(鹿川亭)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남산동3가 34번지 2호 일대이다.
<후조당기(後凋堂記)>
후조당이란, 세조 때 명신 권 익평공(권람의 시호)의 옛집이다. 당은 목멱산木覓山;남산 북쪽 기슭 비서감 바른편 바위 둔덕에 있는 돌샘을 어정이라 부른다. 그 위에 소한당의 유지가 남아 있다. 당은 3칸에 남쪽으로 온돌방이 있는데, 겨울에 따스한 볕이 들고 여름에 시원한 바람이 든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서 푸른 언덕에 석양이 비낄 때면 창가는 쓸쓸하기만 하다. 세운지는 아주 오래다. 상국의 당시에서 오늘날까지 수백 년을 거쳐 6대째 사도공(형조판서 권반權盼)에 이르러 비로소 중건되었다. 마룻대를 고치거나 기둥을 갈거나 하지도 않았고 또 더 꾸미지도 않았으며, 기울고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때묻은 곳이나 닦아서 집은 예나 다름이 없다. 집 남쪽 돌속에서 솟는 샘물이 극히 맑고 차갑다. 섬돌 밑은 모두 펑퍼짐한 너럭바위이고 뜨락에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더욱 기이하다. 3월에는 산꽃이 만발하고 동산에 꽉 들어선 소나무는 겨울 추위가 닥쳐와도 이파리가 변하지 않는다. 태사공(한나라의 사마천)이 날씨가 추운 뒤에야
“송백이 맨 나중 시듦을 알 수 있다.”
란 공자의 말을 일컬었다. 이 말에 연유하여 소위 ‘후조당’이라 하였으니 자신을 경계하는 뜻이다. 지세가 높아 북록北麓을 바라보면 화산 백악산 인왕산 묏부리가 벌려 섰고, 금원의 깊은 숲에 층층이 솟은 높은 궁궐들이 관청과 시가를 이루고 있어 정사를 내는 벼슬아치와 재산을 늘리는 장사치들이 사방에서 몰려드니, 종횡으로 누빈 넓디 넓은 길과 집이 다닥다닥한 장안 터전은 구계久溪․학동鶴洞과 함께 남산의 명승으로 불린다.
사도공 손자인 사부 적이 뒤를 이어 당 앞에 돌을 깨고 연못을 팠는데 이끼는 짙고 물은 맑아 바위 그림자가 환히 비친다. 사부는 아들 흠을 두었는데, 그는 곧고 올바름을 좋아하며 학식이 넓고 행실이 훌륭하다. 때문에 나는 권씨 집안에 인재가 있다고 했었다. 그가 지난 세대의 고사 고적을 열거하여 나에게 후조당 기문을 청하기에 글을 지으니 3백여 글자로 사실을 기록했다.
우리 대행大行 15년(현종15년1674)10월 신축일
<새남터 : 남이장군 처형지로 천주교 성당이 들어서 있다>
<남이장군 사당 1>
소 재 지 : 용산구 용문동 107번지
【유래】남이장군은 1441년(세종 23)에 나서 1468(예종 원년)에 돌아가신 세조 때의 명장으로서 1457년(세조 3)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을 정벌하여 1등공신이 되어 26세 때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유자광 일파에 의해 역모 죄의 누명을 쓰고 27세의 젊은 나이에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그 후 1818년(순조 18)어명으로 관직을 되찾고 충무공이란 시호를 받게 되었다. 장군이 26세 때 여진족을 정벌하고 나서 두만강 변에서 읊은 아래의 시는 남아의 기개가 넘쳐 흐른다 하겠다.
白頭山石은 磨刀盡이요 豆滿江水는 飮馬無라 男兒二十에 未平國이면 後世誰稱大丈夫라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물은 말에게 먹여 없앤다.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고 불러 주리오.
남이장군 사당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문헌에 나타난 바는 없으나 300년전부터 장군의 넋을 기리는 당을 모시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장군의 사당을 이곳에 모신 이유는 장군이 이시애의 난을 토벌할 당시 용산(현재의 삼각지 부근)에서 정병 300명을 모병하여 훈련 시켰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당한 사실을 감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래 당의 위치는 원효로2가 거제산(당고개)이란 작은산에 위치해 있었으나 1904년 철도 부설 등 주위가 소란스러워 지역 유지들이 의논한 끝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현재의 영정은 1935년도에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사는 매년 3회(음력 4월1일, 7월1일, 10월1일) 지냈으며, 1972년 당굿을 끝으로 대제치성은 중단되고 매년 간단한 제사만 지내오던 중 1982년 경희대학교 김대곤 교수의 당제 조사보고에 의해 복원작업이 착수되어 1983년부터 원형이 복원된 남이장군 당제행사가 음력 10월1일 성대하게 거행되고 있다.
당제는 걸립, 꽃받이행사, 당제, 장군출진, 당굿, 사례제 등 다양하게 약 5일간 진행되며 91년도 10월 전남 여수에서 거행된 제32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서울특별시 대표축제로 출연하여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의 사당은 종전의 사당이 협소하여 주민의 요구에 따라 ·91~·92년도에 사당·삼문·관리사·담장을 새로 개축한 것이다.
<남이장군 사당 2>
소 재 지 : 성동구 사근동 190-2 청계천변
이 곳에 남이장군 사당을 세우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아차산에서 이곳까지 출몰하여 인명을 해치는 백호(白虎)를 잡기위해 남이장군이 이 사당 부근에서 기거하며 지키다가 호랑이가 나타나자 맨주먹으로 잡았다고 한다. 이에 주민들이 장군을 기려 이곳에 사당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세운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79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 사당을 백호당이라고도 하고 당 안에는 남이장군의 화상이 모셔져 있다.
음력 10월 1일에 제사를 지내는데 부정한 사람은 참여할 수 없게 되어 있고 제삿날은 동리 축제일이 되고 있다. 평소에는 출입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충무공 남이 장군 묘>
경기도 기념물 제13호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2리 산145
조선 전기의 무신인 남이(南怡, 1441~1468)의 묘이다. 남이는 의령남씨로 의산군 남휘의 손자, 권람의 사위로 세조 3년(1457) 17세 때 무과에 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무직(武職)을 역임하였다. 이시애의 반란 때 여진을 토벌한 공으로 26세(세조 12)의 나이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예종이 즉위 후 세력을 공고히 하려는 훈구세력과 남이에 대한 예종의 개인적인 편견이 겹쳐져 유자광의 ‘남이가 역모를 도모한다’는 무고로 28세에 처형되었다. 350여년이 지난 순조 18년(1818)에 이르러서야 남이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청으로 관직과 작위가 복구되었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의 일반적인 묘의 구조는 봉분(封墳) 앞에 묘비(墓碑)·혼유석(魂遊石)·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을 놓고, 장명등(長明燈)을 상석 앞에 놓고, 그 좌우에 동자석(童子石),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을 각각 1쌍씩 배열하였다. 묘비를 쓰기도 하지만 대개는 묘비를 간소화한 묘갈을 세웠으며 풍수설의 영향을 받아 봉토 뒷머리에 곤미(坤尾)를 붙이거나 담장을 두르기도 하였다. 남이 묘의 뒤쪽을 둘러싼 둔덕[사성(莎城)]으로 둘러쌓여 부인과의 합장묘인 쌍분이 호석으로 잘 단장되어 있다. 석물은 월두형(月頭形) 묘비, 상석과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세우는 문인석,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표시인 망주석이 각각 1쌍씩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부인의 묘는 1971년 충북 음성에서 이장해 와 현재 함께 묻혀 있다.
화성시남이장군부부묘-문회재청자료
현재 묘역에는 장군과 부인이 합장되어 있고 봉분은 2기이며, 봉분 아랫부분은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1쌍씩 있다.
남이장군묘-남이섬자료
남이장군사당
집터
새남터(남이장군처형지)
北征歌(북정가) / 남이장군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석 마도진)
백두산 돌은 칼로 갈아 다하고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수 음마무)
두만강 물은 말 먹여 없애네.
男兒 二十未平國(남아 이십 미평국)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한다면
後世 誰稱 大丈夫(후세 수칭 대장부)
훗날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
예종 즉위 후 대궐에서 숙직하다가 彗星(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이 깔릴 징조라 말하였는데',
평소 그의 승진을 시기하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 반역을 꾀한다
장군이 지은 詩(시) 北征歌(북정가)의 글 한자를 바꾸어
역적으로 몰아 그를 처형당하게 하였다.
男兒 二十未平國(남아 이십 미평국)을 노래했던 장군의 詩(시)를
男兒 二十未得國(남아 이십 미득국)이라, 글자하나를 바꿔 모함한
유자광에 의해 어이없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