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들어 두 개층의 열돔으로 인해 폭염중대경보가 이어져 사는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8월 8일 입추 다음날 2시간 가까이 대낮에 마른 번개와 폭풍이 몰아치더니 이내 다시 살만한 날씨로 변했다 중국으로 향한 태풍 돌핀의 영향이라 하는데 올 여름 유럽, 미주 등에서 똑같은 현상이 벌여져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으니 지구환경을 도외시하고 갈수록 자기종족만을 위한 이기적인 인간생물에 의한 지구종말이 머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오늘은 살만하여 제천으로 와서 의림지와 이곳 배론성지를 찾았다
배론성지에 도착하니 넓은 장미꽃밭과 이 더위에도 그 장미꽃밭을 가꾸는 신앙인들이 먼저 반긴다 누구는 나만을 위해 살고 누구는 이타적인 생활을 하며 일생을 보낸다 평소 서양종교인 크리스트교를 비판하는 입장인데 기독교 개통이 나에게 그런 반감을 주었지만 이 천주교 계통은 나에게 오히려 호감을 주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가르침이다
대한민국 초기 명동성당이 왜 민주화 인사의 도피처가 되었을까? 바로 조선시대부터 서인노론 기득권 정권에 저항했던 남인의 후세가 주축이 되었던 역사 때문이리라 바로 민주화는 곧 남인이 세운 이 시대의 보편 가치인 것이다
배론성지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있다. 이곳은 1791년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생활하며 신앙공동체를 이룬 곳으로, 마을이 위치한 계곡이 배[舟] 밑창을 닮았다 하여 배론[舟論]으로 불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이곳의 옹기굴에 숨어 있으면서 조선 교회의 박해상황과 외국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의 백서를 작성하여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순교했다.
황사영의 세례명은 알렉시오, 자는 덕소(德紹). 본관은 창원. 승문원 부정자를 역임한 석범(錫範)의 유복자로 서울 아현에서 태어났다. 1790년(정조 14) 1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정약용의 맏형인 약현(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하였다.
1791년 그의 처고모부인 이승훈(李承薰)에게 교리서를 얻어 보고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 이후 과거를 포기한 채, 정약종(丁若鍾) · 홍낙민(洪樂敏) 등과 밤낮으로 교리를 연구했으며, 입교 직후에 발생한 신해박해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신부를 만난 뒤 성사를 받고 신부를 도와 교회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 많은 사람을 입교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신심 서적을 필사하는 일을 하였으며,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명도회의 하부 조직인 6회(六會)의 한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을 계기로 일어난 신해박해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지켰으며 관직 진출을 단념했다.
1795년 숨어서 전도하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만나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여 남송로(南松老)·최태산(崔太山)·손인원(孫仁遠)·조신행(趙信行)·이재신(李在信) 등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전교활동을 벌였다. 1796년에는 이승훈(李承薰)·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주문모와 협의하여 베이징(北京)에 서양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기도 했다. 1798년 경기도 고양에서 서울 애오개(阿峴洞)로 이사하여 신도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계속 전도활동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신유박해로 타격을 입은 조선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 책을 북경주교에게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황사영백서』이다.
이곳으로 찾아온 황심(黃沁)과 상의한 끝에 베이징 주교에게 박해의 전말을 알리고 조선교회 재건책을 제시하는 백서(帛書)를 작성하여 옥천희(玉千禧)를 통해 중국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발각되어 같은 해 9월 체포되었다.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지자, 황사영은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이라는 토기 굽는 마을로 피신하여, 토굴에 숨어 지냈다.
이 때 박해를 피하여 배론까지 찾아온 황심(黃沁)을 만나 조선 교회를 구출할 방도를 상의한 끝에, 박해의 경과와 재건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길이 62㎝, 너비 38㎝의 흰 비단에다 총 122행, 도합 13,384자를 검은 먹글씨로 깨알같이 써서, 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10월에 중국으로 떠나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에 끼어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옥천희는 1801년 6월 북경에서 돌아오다 의주에서 체포되었고, 황심도 음력 9월 15일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황심의 자백으로 배론에 숨어 있던 황사영마저 음력 9월 29일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러면서 백서(帛書)도 발각되었다.
백서의 내용은 1785년(정조 9) 이후의 교회의 사정과 박해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한 다음, 신유박해의 상세한 전개과정과 순교자들의 간단한 약전(略傳)을 적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와 그의 죽음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끝으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즉,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였고,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내용에 접한 조정에서는 아연실색하여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그리고 백서의 사본이 중국에 전달되어 주문모 신부의 처형사실이 알려질 것을 염려하여, 그 해 10월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진주사(陳奏使)를 겸하게 하여 신유사옥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토사주문(討邪奏文)과 함께 황사영백서의 내용을 16행 922자로 대폭 축소하여 청나라 예부(禮部)에 제출하게 하였다.
이 축소된 백서를 이른바 ‘가백서(假帛書)’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감호책이나 종주권 행사 등에 관한 내용은 빼고, 서양 선박과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적어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황사영백서의 원본은 1801년에 압수된 이후 줄곧 의금부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우연히 당시의 교구장이던 뮈텔(Mutel,G.C.M.) 주교가 입수하여,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로마교황에게 전달되었다.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편지를 황심(黃沁)과 옥천희(玉千禧)에게 시켜 1801년 10월에 떠나는 북경 동지사(冬至使) 일행 편에 끼어 보내려고 하였으나 음력 9월 15일에 체포된 황심의 자백으로 음력 9월 29일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대역 부도죄로 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고, 어머니·작은아버지·아내·아들은 모두 귀양 가게 되었다.
1998년 천주교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시복 시성 통합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어, 교황청에 제출한 '하느님의 종' 125위의 시복 청원서에 순교자로서 포함되었다. 그러나 '백서'의 역사적 의의를 둘러싼 논란으로 인해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한 시복 미사에서는 제외되었다.
배론성지에서 또 한 명의 위인과 만나는데 그의 이름은 최양업이다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1821년 3월 홍주(洪州) 다락골(현재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새터 마을에서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 사람들은 조선 천주교 초창기부터 대대로 신자였으며, 그의 부모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아명(兒名)은 양업,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조선 복음화의 선구자이며 가톨릭의 참된 토착화를 위한 선각자였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15세 때 최방제·김대건 등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37년부터 마카오에서 본격적인 사제수업을 받았다. 1844년 소정의 신학공부를 마친 뒤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삭발례(削髮禮)와 부제품(副祭品)을 받았다. 그뒤 1846년부터 4차례에 걸쳐 귀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해 상하이[上海]로 돌아왔다.
1849년에 강남 교구장인 예수회원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서품(司祭敍品)을 받아 김대건에 이어 한국의 2번째 신부가 되었다. 온갖 어려움 끝에 1849년말 귀국한 뒤에는 조선 전교의 어려움과 선교사와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시복(諡福)을 위한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교우들을 위한 교리서를 편찬하며, 효과적으로 천주교의 기본교리를 전달할 천주가사(天主歌辭)를 만들기도 했다. 귀국 후 12년에 걸친 힘겨운 사목활동 끝에 1861년 과로와 식중독으로 죽어 배론 신학교 산기슭에 안장되었다.
현전하는 저술로는 먼저 사목활동과 조선 교회의 설립을 은사(恩師) 신부에게 보고한 라틴어 서한(書翰) 19통이 있다. 조선인으로서 당시 조선교회의 상황을 면밀히 관찰해 정치·사회 제도 및 선교사들의 전교형태를 기술했으므로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1847년초 귀국을 기다리며 홍콩에 머무는 동안 한국 순교자의 전기를 라틴어로 옮긴 〈1839년과 1846년에 조선 왕국에서 발발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 현 가롤로와 이 도마 수집. 벨리나 주교의 프랑스 원문으로부터 최 토마스 부제 번역〉이란 긴 제목의 번역서가 있다.
1864년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한국 교회가 공식 교리서로 최초로 채택한 〈성교요리문답 聖敎要理問答〉이 있으며, 〈천주성교공과 天主聖敎公果〉 등의 주요기도서를 번역하기도 했다. 한편 교우 중에 특히 배우지 못한 서민계층을 위해 난해한 교리와 종교적 사상에 음률을 달아 조선인의 전통적 생활감정에 맞도록 〈사향가 思鄕歌〉·〈하주삼덕가 何主三德歌〉·〈칠성사가 七聖事歌〉 등의 천주가사를 지었다.
이중 〈사향가〉는 천주가사 가운데 이본이 가장 많고 신자들 사이에 널리 애송되던 작품으로 인간의 본향(本鄕)이 어디인지 생각하라는 내용의 노래이다. 그의 저술활동은 천주교의 보급과 진정한 토착화를 위한 노력의 결정체이다. 그의 저작들은 한국천주교회사를 재조명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인으로서 첫 번째 신학생이며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는 현재까지 ‘땀의 증거자(순직)’로 지칭되고 있을 정도로, 12년에 걸친 그의 전교 활동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초기 천주교는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뿌리인 칠죄종(七罪宗: 교만, 질투, 탐욕, 분노, 식탐, 음란, 나태)을 극복해, 완덕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천주교 윤리 수신서 칠극을 중시했다. 총 7권으로 한 권에 하나의 죄종을 다루고 있으며, 먼저 해당 죄목에 관해 성찰한 후 그 죄의 극복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 칠극을 배론성지 다리에 제시했다
『칠극』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함께 명 · 청 시대 중국과 18세기 조선 지식인들, 특히 천주교회 창설자들의 주목을 끌었고, 일찍부터 한글로 번역되어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큰 영향을 준 중요 한문 서학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