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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카이로스적 결정의 고유한 독자성>의 줄거리:
카이로스 시간은 수직으로 흐릅니다. 참 성도는 이런 시간 안에서 예배의 삶을 삽니다. 지금 마음은 천국으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를 마주하고, 지금 하나님의 생각은 땅으로 내려와 내 몸을 움직여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런 시간 안에서 성도 각자에게는 절대적으로 고유한 독자성이 생겨납니다. 누구도 개입해서도 안 되고 어떤 경우에도 포기되면 안 되는 독자성입니다.
내 카이로스적 결정의 고유한 독자성
(로마서 14:1~12)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카이로스적 결정의 고유한 독자성>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카이로스적 결정의 고유한 독자성”
본문 중에 8~9절 말씀을 먼저 접근해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살아도 주를 위한 것이고 죽어도 주를 위한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주님을 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2장 26절에서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몸에 달라붙어 있던 마음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은 주님의 몸에 달라붙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실 때에 주님과 함께 있고, 승천하셔서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시는 중에도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통해서 마음이 천국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우리는 흔히 봉사나 충성을 하고 오지에 가서 선교라도 해야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하려면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떠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의 자리까지 따라가서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은 봉사와 충성 혹은 선교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으로 말씀드리겠지만 그 일들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들은 주님을 따름으로써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릴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몸에 붙어 있다가 십자가에서 죽으면 예수님의 몸에 붙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천국의 보좌 우편까지 따라가 주님과 함께 머물고 있는 상태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몸을 붙잡으시고 움직이시며 봉사도 하고 충성도 하고 선교도 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8절 마지막에서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따라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우리는 주의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곧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몸이 처한 삶의 처소가 각기 다를지라도 동일하게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 있는 현상 전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은 이런 교회들 중에서 로마에 함께 살고 있었던 성도들 간에 갈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고린도 교회에서도 발견됩니다만 당시 사람들이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사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장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고기들은 이방종교의 제물로 바쳐졌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교인들의 의견이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믿음을 가진 교인들은 오직 신은 하나님뿐이라는 믿음이 분명했기에 이방의 우상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라도 얼마든지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직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일이 마음에 걸림이 되어서 채소만 먹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갈등은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을 중시해서 안식일이나 각종 절기들을 중요시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교인들 간에 반목과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은 채소만 먹는 사람을 믿음이 약하다고 업신여기고, 한편 채소만 먹는 사람은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향하여 고기를 탐하여 꺼림칙한 일을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직 로마교회를 방문하기 전이었으나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 고린도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침을 줍니다. 이 지침을 보면 교인이 누구이며 성도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교훈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믿음은 크고 작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초기단계로부터 진행되어 온전한 단계에 이르는 점차적인 진행일 수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믿음의 전제입니다. 7절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는 전제는 어떤 믿음의 상태에서나 똑같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교인에게 적용되는 공통적 전제입니다. 이 사실을 유일한 진리로 붙잡는 사람이라면 사나 죽으나 몸의 일은 주를 위한 것이 됩니다. 마음이 주님 안에 들어가 있으면 어차피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전제를 바탕에 놓고 보면 타인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3절에서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대전제를 진리로 붙잡고 있는 모든 사람은 믿음의 크고 작음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독자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로부터 감사가 나옵니다.
6절 하반부를 보면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마주 대하고 있기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어떠한 것인지는 공생애 때의 예수님의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13장 11절을 보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시기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예수님이 사셨던 공생애 때의 시간입니다. 지상에 계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수직으로 올라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마주 대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받으신 아버지께서는 마찬가지로 수직으로 예수님의 몸에 당신의 생각을 내려보내시며 땅에서 뜻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이렇게 수직으로 올라감과 내려감이 이루어지는 시간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도 예수님과 똑같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정리해봅니다. 마음이 몸을 떠나 예수님의 몸에 달라붙으면 하늘로 올라가 독생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마주하게 됩니다. 마음이 수직으로 올라가면 하나님의 생각이 수직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생각은 몸을 붙잡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삶을 살아갈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공통적인 기반 위에서 각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와 독자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절대적인 독자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몸으로 살기 위해서는 행동을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 결정에 있어서 고유한 독자성이 나타납니다. 각 사람의 얼굴이 다르듯이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가 있음은 공통적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독자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나만 관계하시듯이 이 땅에서 행해지는 결정이 독자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독자성에는 누구도 개입할 수 없고 허용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서 예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몸으로 하는 행위의 결정이 절대적으로 고유한 독자성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최 성도님과 박 성도님이 같은 날 같은 차를 사게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같은 회사의 색까지 똑같은 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일한 행동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사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독자적 관계에서 일어난 행동이 아니라 남의 눈치를 보거나 스스로 결정한 일이라면 앞장 마지막에서 언급된 대로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몸을 하나님께 드리면 몸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되는 예배의 삶이 됩니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한날한시에 똑같은 차를 사는 행위조차도 각자가 하나님과의 독자적 관계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지는 결정과 행동에 대한 독자성은 다른 성도에 의해서 무시되거나 침해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스스로 이러한 독자성을 포기하거나 내버려서도 안 됩니다. 독자성의 포기는 마치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은 에서의 행위와 비견될 수 있는 그릇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절대적 독자성에 대해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의 독자성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상담과 권면과 지도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될 때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독자성을 보여야만 합니다. 내담자는 삶의 형편이 급하기에 마음이 쫓기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를 묻고자 합니다. 이때 제가 상담자로서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요? 그분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유일한 진리임을 고백하는 자이고, 저 또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이 유일한 진리임을 고백하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려야 될 독자적 결정에 대해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내담자가 조급한 마음에서 행위에 대한 결정을 부탁하더라도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것이고 빼앗는 것이기에 결정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상담자가 권면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믿음의 대전제를 강조하는 것뿐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독자적인 관계의 상황을 회복하도록 만들어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의 생각을 넣어주시고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종과 주인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엄연히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는 종에 대해서 타인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목사님들을 비롯하여 권면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기도 중에 환상을 본다든지 꿈을 꾼다든지 해서 성도의 삶의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행위와 말을 집어 넣어주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독자성을 염두에 둔다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도 성도님들에 대한 계시가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그 계시를 일 년이나 마음에 품고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계시가 주어졌더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라고 하실 때까지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만 의미가 있기에 그 외에는 일체 나설 수가 없습니다. 성도님이 하나님과 맺어야 하는 고유한 독자적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이고 교인이라면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독자적인 관계가 맺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상태를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 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힘쓰고 다른 성도를 위해 도와야 하는 일은 주를 위해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돕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사는 것은 곧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카이로스의 시간에서 사는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믿음이 앞선 자는 그렇지 못한 자가 하는 모든 결정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으면 됩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우상의 제물로 생각하여 먹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또한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가서 머물러 있어야 함을 진리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독자성을 절대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단계에서는 채식을 하는 것이 합당하기에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비판한다면 하나님과의 독자성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나에게 확장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 개인의 삶에 대해서 예언기도를 받으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던 때와 똑같은 일을 하려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을 신랑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이러한 비유대로 말하자면 하나님과 나는 신혼부부입니다. 그런데 신부인 내가 자꾸만 다른 남자를 방에 끌어들이려고 한다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서 하늘보좌 우편까지 따라가야 함을 진리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상대의 행동이나 결정이 내 마음에 안 들거나 모자란다고 생각해서 비판하거나 업신여긴다면 스스로 성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의 독자적 관계를 충분히 맺고 있지 못할 때 발생합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늘로 흘러가고 하나님의 생각은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상태이고, 행위의 모든 결정이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독자성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카이로스의 시간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일수록 타인을 비난하고 비판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머물러 있는 것을 진리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 행위를 비난하거나 업신여길 수 없습니다. 독자성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문제와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는 문제가 언급되었습니다. 다만 성경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 하라고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이런 문제를 “아디아포라(ἀδιάφορα)”라고 합니다. 해도 죄가 아니고 안 해도 죄가 아니지만 무엇을 해야 될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사람의 얼굴이 다른 것처럼 각 사람의 삶의 현장과 처지는 다릅니다. 모든 삶의 현장에서 행위의 결정 또한 아디아포라에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를 가야 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느 정도 크기의 집으로 갈지는 성경에서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옳은 행위를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옳음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일에 대한 생각을 갖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 없는 삶의 순간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행위를 위한 결정이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과 얼마나 일치하거나 틀렸는지가 낱낱이 드러나서 밝혀질 때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디아포라”라는 문제를 확대하여 해석해보자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야할 독자성의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만의 삶에서 내가 결정해서 몸이 움직여야 하는 모든 상황에서 카이로스의 시간, 즉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절대적 독자성입니다. 세상적인 차원에서는 누구도 개입할 수 없고 물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결정이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의 어떤 전문가도 개입할 수 없는 이유는 상대하는 하나님이 조물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전문가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시는 조물주 하나님께서 아버지로 나와 독자적으로 관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독자성의 포기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포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독자성을 유지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서 예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오직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를 독대하고, 아버지의 생각이 내려와 순간순간마다 몸을 움직여 나가십니다. 이러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고유한 독자성은 행위 결정에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습관을 따른 결정은 카이로스의 삶이 아니라 육체의 일을 도모하는 크로노스의 삶입니다. 우리는 어제에 이어서 오늘을 살거나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러한 수평적 시간의 연대기적 크로노스의 삶은 육체의 일을 도모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카이로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몸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당장은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몸에 붙는 대신에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몸에 붙어야 한다는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앞선 13장 14절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면 하나님께서 태양처럼 빛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향해야 될 유일한 관계입니다. 의식은 하나님의 있음만을 존재감으로 느껴야 하고 마음은 하나님의 좋음만을 열망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생각이 내려와 몸을 움직여가시게 됩니다. 나의 생각 속에 당신의 생각을 넣어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자면 행위에 대한 결정은 반드시 독자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 있어서 마음을 위로 흘려보내고 있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생각이 내려오고있는 중이라면 독자성에 대한 비난은 무의미해집니다. 나의 행위에 대해서 가타부타하는 것은 달리는 기차를 향하여 짖는 개들의 소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성도님들과 전화를 하거나 만나서 삶의 문제를 들을 때에 목표로 하는 것은 주를 위하는 사람이 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삶의 상황이 사나 죽으나 마음이 주님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에 주력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각은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급한 상황에 몰린 분들은 자꾸만 저에게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하실 때가 많지만 저는 절대 그러한 이야기는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잘못된 체질이나 습관으로 인해서 아예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여겨지거나,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요소가 보인다면 그것을 지적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니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 매여 있는 사슬을 끊으십시오.”라는 식의 말씀을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진리임을 믿는 분들에 대해서는 제가 함부로 행위를 결정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도 나 자신의 독자성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한 독자성에 대해서도 같습니다.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지는 고유한 독자성을 보물처럼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지구에 75억 명이 살아도 내 삶의 일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고유한 독자적 관계 안에서만 결정됨을 알았습니다. 이제부터 카이로스 시간의 예배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