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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先妣) 이씨의 세계(世系)는 선원(璿源)에서 나왔으니, 헌릉(獻陵 태조의 능호)의 별자(別子) 효령 대군 정효공(孝寧大君靖孝公) 휘 보(補)의 후손이다. 대군이 보성군(寶城君) 휘 합(㝓)을 낳았고, 보성군은 율원군 적개공신 환양공(栗原君敵慨功臣桓襄公) 휘 종(徖)을 낳았고, 율원군은 여양군(呂陽君) 휘 자겸(子謙)을 낳았고, 여양군은 용강 현령 증 이조 판서 전성군(龍岡縣令贈吏曹判書全城君) 휘 대(薱)를 낳았고, 전성군은 충훈경력 증 공조 참의(忠勳經歷贈工曺參議) 휘 박(樸)을 낳았다. 참의는 아들을 두지 못하여 형님 수안 군수(遂安郡守) 휘 노(櫓)의 아들 규빈(奎賓)을 입후하였는데, 이분은 창녕 현감(昌寧縣監)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참판은 죽산 부사 동지중추부사(竹山府使同知中樞府事) 휘 척(滌)을 낳았는데, 이분은 무용(武勇)으로 출세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큰 지조를 지녔으나, 훈상(勳相) 김류(金瑬)의 비위에 거슬려 관직이 승진되지 못했다. 정축년(1637, 인조 15) 이후 집안에서 세상 일을 끊고 지내다가 별세하였는데, 선비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상원(尙元)인데 금부 도사(禁府都事)이다. 조부의 휘는 영한(榮漢)이며 성균 진사(成均進士)이다. 문장을 잘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고상한 품행이 있었다. 선고의 휘는 익령(益齡)이니,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베풀기를 좋아하였는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 청송심씨(淸松沈氏)는 첨추(僉樞) 휘 유준(儒俊)의 따님이고 동돈녕(同敦寧) 휘 봉원(逢源)의 후손인데, 사리에 환히 통달하고 성품이 심후하여 부덕(婦德)을 겸비하신 분이다. 선비(先妣)께서는 숙묘(肅廟) 갑술년(1694, 숙종 20) 윤 5월 6일 진시(辰時)에 한성(漢城)에서 태어나셨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영리하여 첫돌이 지났을때 말을 잘하였다. 여종 둘이 마주 서서 절구질할 때 숫자를 세며 서로 놀이하는 것을 보고 선비께서 그대로 따라하되 하나에서 열까지 차례로 틀리지 않게 세었으므로, 옆에 있던 사람이 우연한 일로 여겨 여러 번시켜 보았으나 처음과 똑같이 하였다. 6세 때에 우리 나라의 말을 적는 언문(諺文)을 환히 알았고, 7, 8세때에 어른을 대신하여 편지를 썼는데, 안부 말 이외에 심정을 말하고 일을 서술한 것이 각기 격식에 맞았다. 그리고 여자들이 하는 일[女工]도 다른 사람들보다 배나 정교하고 민첩하게 하였다. 9세 때에 외조부님의 상을 당하셨는데 정도에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호상(護喪)하는 자가 선비의 나이가 어리다 하여 상복을 짓지 않았더니 선비께서 상복을 지어주기를 간절히 청하여 입고 조석곡(朝夕哭)에 참여하기를 예(禮)대로 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17세 때에 우리 선군(先君)에게 시집오셨는데, 가문에 들어오신 이후로 시부모님을 섬기시는 데에 조금도 잘못하시는 일이 없었다. 동틀 무렵에 세수하고 머리를 빗으시고 반드시 새벽참의 음식을 올렸다. 그리고 편찮으신 때를 당하면 약을 손수 달이시고 음식을 직접 지으시며 밤낮으로 곁에서 시병하시어 병이 나으신 뒤에야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조부님께서 선비의 재기(才器)를 훌륭하게 여기시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상의하셨고,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 같은 것은 부인들이 알 만한 일이 아닌데도 반드시 물으셨다. 조모님은 성격이 본시 준엄하시어 좀처럼 사람을 칭찬하시지 않았는데 선비께서는 효성과 공경에 매우 힘쓰시어 시종 게을리 하시지 않았다. 조모님께서 만년에 병석에 누워 계시며 대소변을 받아 내게 하셨는데, 선비께서 속옷을 직접 빨기까지 하시어 추한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조모님께서 선비의 성의에 감동하여 말씀하기를,
“나는 너의 효성이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를 줄은 몰랐다.”
하였다.
가업이 본시 넉넉하지 못한데다가 선군께서 손님을 좋아하시고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셨는데도 반드시 뜻을 받들어 따르시고 난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리고 불초자(不肖子)의 동류들이 찾아왔을 때에도 반드시 음식을 대접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어떤 부인은 머리털을 잘라 술과 안주를 마련하고 앉는 풀자리를 썰어 말에게 먹이기까지 하면서 아들의 벗을 대접한 사람이 있었으니, 나는 이 부인을 흠모한다.”
하셨다.
자녀들을 기르는 데 있어서는 자녀들을 매우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셨지만 올바른 도리로 엄격하게 교육하시어 어릴 때부터 법도로써 가르치셨다. 그 중에서도 더욱더 의리와 이익의 분계(分界)에 삼가도록 하시며 이르시기를,
“대체로 이기심은 가르치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두 잘 아는 것인데, 더구나 부모된 사람이 이익으로 유도하여 단지 욕심만 키워 준다면 그 폐단이 어떠한 경지에 이를 것이겠는가.”
하셨으므로, 불초의 형제들에게는 자기 몫으로 저축한 재물이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접대하시는 데 있어서는 서먹서먹한 간격을 버리시고 자랑하려는 겉치레를 일삼지 아니하셨으며, 자신을 해치려는 자에게도 반드시 성의를 다해 대우하셨다. 조모님의 친정 얼속(孼屬) 가운데 과부로 지내며 의탁할 데 없는 여자가 있어서 우리 집에 와서 살았는데, 그녀는 본시 수다스러웠으므로 선비께서 곤란스러운 일을 여러 번 당하셨다. 그러나 훗날 또 왔을 때 선비께서 그녀를 대우하심에 아무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감복하였다. 그리고 무주(茂朱)에서 이사 올 때에는 마을의 할머니 몇 분이 떠나오는 선비의 손을 부여잡고 차마 이별을 하지 못해 하며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또 노복(奴僕)들을 거느리심에 은정과 위엄을 병행하시어 그들의 굶주림과 추위를 염려해 주셨으므로, 모두가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이웃에 양식이 떨어져 매우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힘이 닿는 데까지 구제해 주셨는데, 저녁 지을 쌀을 모두 털어 주시면서도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으셨다. 그러나 성품이 청렴 결백하시어 어떠한 것도 남에게 요구하신 적이 없으셨으니, 채소 과일 등의 하찮은 물건 조차도 함부로 받지 않으셨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불의의 재물을 가지고 와서 간청하는 일이 없었다. 이익을 탐내어 의리를 잊어버린 채 시세에 붙쫓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시게 되면 마치 자신이 더럽혀진 듯이 부끄러워하셨다. 그리고 어느 집 여자가 이자놀이를 하여 10분의 1의 이식을 받는 것을 보시고 공척하여 경계하시기를,
“부녀자의 행실에는 잘못하는 것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으니 단지 술과 음식 만드는 것만 일삼아야 하는데, 재물을 잘 증식시킨다는 것으로 명성이 난다면 이것이 어찌 규중 부녀자의 좋은 명성이겠는가.”
하셨다.
우리 나라 풍속은 본시 부녀자들에게 학문을 배우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선비께서도 문자를 학습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총명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시어 어릴 때부터 옛날 사적 보시기를 좋아하셨으므로, 중국의 상고 시대부터 황명(皇明) 시대까지와 우리 나라의 고려말부터 근대까지 나라의 치란(治亂)과 사람의 현부(賢否)에 대해서 모두 환히 아셨다. 그리고 언문 소설은 그 종류가 무려 수백 사람이 지은 것이지만 한번 보시기만 하면 모두 기억하시어 종신토록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만년에 늘 말씀하시기를,
“소설은 모두가 거짓으로 꾸며내어 이야기를 만든 것이어서 한 가지도 진실이 없는 것이고, 또한 사람들의 심술을 사악한 데에 빠지게 할 만한 것이니, 볼 만한 것이 아니다.”
하셨다. 그리고 늘 며느리와 딸들에게 경계하시를,
“부인의 나쁜 덕은 질투와 시기가 으뜸인 것이다. 질투와 시기의 마음을 가지면 못하는 짓이 없게 되어 끝내 남편에게 누를 끼치게 되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셨다. 검소한 것을 편안하게 여기시어 의복을 입으시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성한 것과 깨끗한 것만을 취택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시대의 여인들의 의복은 좁은 소매에 천록색(淺綠色)인데, 시대의 유행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옷은 좋지 못한 옷에 가까우니 따를 만한 것이 아니다.”
하셨다. 그리고 평소에 앞일을 미리 아시는 식견을 가지고 계시어서 어떠한 일의 시비를 말씀하셨을 경우 나중에 모두 그대로 맞았다.
우리 외조모님 산소가 금천(衿川)에 있는데 외숙께서 영광(靈光)에 사시는 탓에 제때에 성묘도 못하고 묘제(墓祭)도 대부분 지내지 못했으므로, 선비께서 늘 애통해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출가했다 하더라도 자신을 낳아 주신 부모의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셨다. 그리고 절사(節祀 절기에 따라 지내는 제사)를 지내는 날을 당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시며 슬퍼하셨고, 우리 형제들로 하여금 수시로 성묘하게 하셨다. 송파(松坡)에 사시는 이모님은 선비에게 아우가 되는데 일찍 과수가 되시어 매우 가난하게 사셨으므로, 선비께서 때때로 구제해 주시되 집에 재물이 있고 없는 것을 따지지 않으시며 마음을 다하셨다. 이에 이모님이 감격하시어 말씀하시기를,
“언니의 대단한 우애는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외숙께서 약간의 토지를 분배해 주시려고 하자, 선비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에게는 괜찮지만 나에게는 분배하지 말라. 기어이 나누어 주고자 한다면 그 몫을 금천(衿川)의 묘위전(墓位田)으로 떼어놓는 것이 좋겠다.”
하시고, 끝내 받지 않았다.
선비께서 기품이 본시 강건하시어 질병이 없으신 분인데, 여러 차례의 출산 때 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시어 중년 이후에 질병의 증세가 늘 나타났다. 그리고 무진년(1718, 숙종 44) 겨울에 풍허증(風虛症)이 발생하여 약으로 치료하였으나 효험이 없었고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런데 정해년(1767, 영조 43) 윤7월 1일에 우연히 돌림병 이질(痢疾)에 감염되시어 8월 5일 묘시(卯時)에 돌아가셨는데, 수는 74세이다.
선비께서 14세 때인 정해년(1707, 숙종 33)에 마진(麻疹)을 앓으시어 열이 솟아 혼절하셨는데, 그 때 마치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이 아이는 다음의 정해년에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듯하였고 얼마 안 되어 깨어나셨다. 그리고 무신년(1728, 영조 4) 겨울에는 꿈 속에서 귀신이 사람 수명의 길고 짧음을 말하는 것을 보시고 선비께서 “나의 수명은 얼마인가?”라고 물으시자, 귀신이 74세라고 답하였는데, 선비께서 깨시어 그 꿈을 말씀해 주셨다. 당시 선비의 연세가 젊으시어 앞날이 매우 먼데다가 세상 사람들이 70세를 희수(稀壽)라 하기 때문에 나는 그 말씀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물 흐르듯 하여 정해년이 점점 다가오자 걱정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는데 끝내 이 해에 돌아가셨으니 사람의 수명이 과연 미리 정해진 것이어서 그러한 것이던가. 병이 위독하실 때 약을 올리자 손을 저어 말리시며 말씀하시기를,
“수명은 약으로 연장시킬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수명이 이미 만족스러운데 어찌 약을 먹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셨다. 이 때 송파(松坡)의 이모님이 오셔서 병을 보살폈는데, 선비께서 기력은 매우 약했지만 정신은 맑으시어 간혹 이야기하며 웃으시고 농담도 곁들여 하셨으니, 조금도 죽음을 슬퍼하시는 뜻을 갖지 않으셨다. 대개 선비께서는 어릴 때부터 천성이 초매(超邁)하시어 세속 부녀자들의 잗달고 좁은 습성이 없으셨는데다 고명한 식견과 정직한 품행에 실로 옛날 여사(女士)의 기풍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 때에 이처럼 조용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선비께서는 자매들 중에 셋째이신데, 외조부께서 여러 딸들 중에서 선비를 가장 사랑하셨다. 외조부께서 일찍이 네 개의 달이 함께 떠오른 꿈을 꾸셨는데, 세 번째 달은 매우 밝게 빛나는 반면 다른 달은 모두 구름에 가려져 빛이 흐릿하였다. 꿈을 깨고나서 외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달은 여자의 상(象)이다. 우리가 네 명의 딸을 두었고 꿈이 또한 이러하니, 이것은 셋째 딸이 필시 귀하게 될 징조이다.”
하셨는데, 그 후 다른 따님들은 모두 운수가 막히었거나 과수가 되었다. 그리고 외조모께서 만년에 선비께 말씀하시기를,
“옛날 너의 아버님의 꿈은 아마도 너의 심덕(心德)이 달과 같기 때문인 듯하다.”
하였다.
이 해 10월 7일에 선군(先君)의 묘소에 부장(祔葬)하려고 하였더니 옛 광중에 물이 찬 폐단이 있었으므로, 선영(先瑩) 국내의 자좌(子坐)의 자리에 옮겨 합장하였다. 급작스럽게 상사를 치르느라 자리를 고를 여가도 갖지 못하여 임시로 장례를 모신 것과 다름없기에 애통하고 박절한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선비께서는 3남 4녀를 두셨으니, 장남은 바로 불초자 정복(鼎福)인 나로서 감찰(監察)이고 창녕(昌寧) 성순(成純)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둘째는 딸인데 어려서 죽었고, 셋째는 딸로서 동복(同福) 오석신(吳錫信)에게 출가하였으며, 차남 재득(再得)은 어려서 영특하고 총명했었으나 5세에 죽었고, 그 다음의 두 딸도 모두 요절하였으며, 막내 아들 정록(鼎祿)은 무안(務安) 박사정(朴思正)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불초자인 나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경증(景曾)은 생원(生員)으로 파평(坡平) 윤동열(尹東說)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고, 후취는 밀양(密陽) 박지종(朴志宗)의 딸인데 1녀를 낳았다. 나의 딸은 영가(永嘉) 권일신(權日身)에게 출가하여 3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정록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 경연(景淵)은 광주(廣州) 이명복(李命復)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그 밑의 자녀는 모두 어리다. 오석신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순(珣)은 연안(延安) 이세연(李世延)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나는 어려서 질병을 많이 앓았으므로 선비께서 애써 길러주심을 받아 성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형편없는 인물로서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봉양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비께서 일생 동안 곤궁하게 사시게 하였고, 선비의 마음을 위안시켜 드릴 만한 일이라고는 한 가지도 한 것이 없었다. 요행으로 음사(蔭仕)를 차지하여 몇 말의 녹봉을 받게 되었으므로 영광의 녹봉으로 봉양해 드리려는 기대를 가졌었는데, 곧바로 또 병으로 직임을 그만두게 되어 줄곧 자식의 병에 대한 걱정만을 끼쳐 드린 채 지극한 심정을 펴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지없이 애통한 일을 당했으니 아,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나의 병세가 한창 심해지고 있는데 만약에 갑자기 죽어 선비의 훌륭한 덕행을 기록할 수 없게 된다면, 이것은 나의 불효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이상과 같이 사실을 대략 기술함으로써 후세에 말을 전하는 군자(君子)에게 고하여 알려 주고 채택하기를 기다린다. 경인년(1770, 영조 46) 4월 26일 불초자 정복은 삼가 행장을 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