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 교수님께서 1993년 4월부터 1994년 4월까지, 월간 [해인]에 12회에 걸쳐 연재하신 내용 중 9회의 내용 입니다.
어록해설(9) -『오등회원』
요즈음 세상에 시험을 안 쳐 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자신이 직접 치르지 않더라도 가족 가운데에 누군가를 통해 간접으로라도 모두 경험했을 것이다. 입학 시험, 취직 시험, 승진 시험,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시험하면 먼저 중국의 관리 등용 시험인 과거를 들 수 있다. 괴나리봇짐을 메고 임금님이 계시는 장안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가다가 날이 저물면 외딴집에서 신세도 지고 때로는 그 집 처녀와 사랑을 속삭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길가 떡 장수 할머니 덕분으로 허기를 면하기도 하고 덤으로 신수점도 본다. 고갯마루를 지나다 성황님께 소원도 빌고 절간에 들러 향도 올린다.
이렇게 해서 난다 긴다 하는 천하의 재주꾼들이 구름처럼 시험장에 모여든다. 얼마나 많이 모이는지 장안의 쌀이 동이 나서 사년만에 한 번 치르는 과거를 쉰 적도 있다. 신라에서도 지원자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과거에 급제함은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이다. 그러다 보니 갖가지 방법이 동원된다. 그 가운데에 하나가 이른바 커닝이다.
과거를 둘러싼 중국 사람들이 커닝 술은 볼 만하다. 과거에 붙으려면 「예기」,「춘추」를 비롯한 이른바 경서는 물론 그 주까지 줄줄 외워야 한다. 그래서 궁리를 해낸 것이 바로 커닝 페이퍼이다. 붓뚜껑에다 적어두기도 하고, 사타구니 밑에 슬쩍 종이 쪽지를 숨겨 두기도 하는 따위의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된다.
일본 경도의 후지이유린간(藤井有隣館)에는 커닝 내복이 있는데, 내복 안팎에다 콩알만한 크기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빽빽하게 적어 놓았다. 시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한다. 그 심정이 가히 짐작이 간다.
Ⅱ
학생 신분을 이십여 년 이상 달고 다니다 보니 시험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물리가 나 있다. 그러나 시험도 박사 과정을 마지막으로 안녕을 한 셈이다. 그렇지만 커닝할 기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커닝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은 「벽암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러니까 1990년 여름이었다. 백련불교문화재단으로부터 「벽암록」을 윤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컴퓨터에 입력을 해서 내부 교정도 마치고 프린터로 뽑은 원고라기에 쉽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막상 원문을 대조하며 하나하나 살펴보니 만만치 않았다. 결국은 이 초교를 모두 개정하여 새로 컴퓨터에 입력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과정에서 나의 커닝은 시작되었다. 「벽암록」은 당나라 선승들의 이야기를 백 개로 추려서 만든 공안집(公案集)의 하나이다. 그 이야기에는 등장하는 인물도 많고 뒤에 얽힌 사연도 많다. 게다가 당나라 때의 구어(口語), 속어(俗語)등이 수 없이 나온다. 덤으로 판본도 십여 종이 넘고 그에 따른 글자의 출입과 차이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번역이란 결과적으로는 가능한 여러 해석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번역자의 의도가 들어간다. 이런류의 책은 본문만 가지고는 도저히 온전한 번역을 할 수 없다. 자연히 다른 책을 참고해야 한다. 좋은 말로 하니 참고이지, 역자 주를 달아서 참고한 내용을 밝히지 못했으니 결국은 슬쩍 본 것이다. 말하자면 커닝을 한 셈이다.
어느 부분을 어떻게 커닝했는지는 번역자 마음껏 자세하게「벽암록」에 주석을 달아도 좋다는 출판사가 나오면 그 기회에 고백할 계획이다. 마침 지면이 허락하니 아주 부분적인 것을 하나 고백하려고 한다.
Ⅲ
「벽암록」에서 어떤 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먼저 「선학대사전(禪學大辭典)」(駒澤大學編, 東京, 大修館書店, 昭和 53년)을 찾아서 그 스님의 전기가 어디에 실려 있는지를 확인한다. 이와 함께「중국선종인명색인(中國禪宗人名索引)」(鈴木哲雄, 東京, 其弘堂書店, 1975)과「당오대인물전기자료총합색인(唐五代人物傳記資料總合索引)」(傳璇琮, 北京, 中華書局, 1982)을 함께 참고한다. 이렇게 해서 그 스님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원문을 찾아 읽어 둔다.
이때 이용하는 원문은「조당집」(952),「송고승전」(988), 「전등록」(1004), 「오등회원」(1253)이다. 이 가운데에 조당집과 전등록은 이십 년 전쯤에 월운스님이 번역하여 동국역경원에서 나왔다. 그리고「송고승전」과「오당회원」은 북경의 중화서국에서 점교본을 내어 많은 편리를 돕고 있다. 더구나「송고승전」은 고맙게도 뒤에「인명색인」을 달아 주었다. 위의 네 가지 책 가운데에서도 사전의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은「오등회원(五燈會元)」이다. 이 책은 제목이 말해 주듯이 다섯 종류의 전등 서를 모아 놓았다. 「벽암록」을 번역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이 이「오등회원」이다.
이「오등회원」을 볼 때면 언제나 생각나는 것이 국민학교 다닐 때 보던 동아전과이다. 한 책에 모든 것이 다 나온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동아전과만큼 이용도를 높이려면 한참 손을 봐야 한다. 동아전과는 단지 낱권의 교과서를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 말고도 자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이 책을 동아전과처럼 이용도가 높게 만들어 놓은 나라는 아직 없다. 물론 현대어로 번역되어 있지도 않다.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워낙 방대하기 때문이다. 육십만 자쯤 되니 이백자 원고지로 옮겨 쓰면 삼 천 매이고, 한글로 번역하면 다섯 배라고 해도 만오천 매이다.
이렇게 양이 방대하니 웬만한 불교출판사는 번역 출판할 엄두도 못 낸다. 먼저 비용이 대단히 많이 든다. 그러나 동아전과를 사 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수지가 맞지 않는 일도 아니다. 문제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어떻게 자세하고 편리하게 주변정보를 제공하는 가이다. 자세함과 이용의 편리를 제공하려면 몇 가지 보조 장치가 있어야 한다.
첫째, 찾아보기 편리해야 한다. 인명색인을 비롯하여 어휘색인 따위의 여러 가지 색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둘째, 이 책이 다섯 종류의 책을 대본으로 편집한 것이라면 원대본의 어느 부분에서 뽑아 왔는지 밝혀 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용자들이 필요하면 본디의 문헌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오등회원」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잘못 베껴 쓴 부분을 시정하고 번역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셋째, 이 책의 원문은 문단의 구별이 엉성하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있던 대화인데도 문단을 나누지 않았다. 번역 과정에서는 이것을 나누어 번역자 자신은 물론 읽는 이가 헷갈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넷째, 문헌학적인 훈고의 과정을 거쳐서 번역을 하되, 그 과정을 주를 통해서 공개해야 한다. 말하자면 커닝을 해서는 안 된다.
Ⅳ
중국 당나라 때 선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먼저 「오등회원」을 통해서 그 앞 뒤 이야기를 살펴보기를 권한다. 아쉽게도 한글 번역이 없지만 그렇다고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당집과 전등록이 한글대장경으로 나와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면 된다. 벽암록의 번역 과정에서 나는 이것을 많이 커닝했다.
「오등회원」이 다섯 종류의 전등서를 보고 편집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경덕전등록」,「천성광등록」,「건중정국속등록」,「연등회요」,「가태보등록」이다. 이 책들은 모두 서른 권으로 되어 있다. 모두 합치면 백 오십 권인 셈이다. 이것을 스무 권으로 줄인 것이니 겉으로 보면 약 칠 분의 일이지만, 내용으로 보면 약 이분의 일 정도로 줄인 것이다.
이 책은 대혜종고 스님이 3세 손자뻘인 대천보제(大川普濟 : 1179-1253) 스님의 지휘로 그 제자드이 편집한 것으로 송나라 보우원년(寶祐元年 : 1253)에 간행되었다. 그 뒤 원나라 말기 지정(至正 2년(1364)에 중각된 뒤로도 여러번 중각되었다. 그러다가 가흥속장의 제 60함과 제 61함에 들어갔으나 이것은 관판은 아니었다. 결국 나라에서 인정하는 대장경에 정식으로 입장(入藏)이 된 것은 청나라의 용장(龍藏)이다. 이 용장에서는 육십 권으로 나누어 실었는데 명나라 뒤로는 원나라 시대의 ‘지정본에’ 따라 다시 스무 권으로 하였다.
용장의 보급이 잘 안 된 지금으로서는 일본의「속장경」판이 통용되었다. 그러다가 광서(光緖)초에 송판이 발견되었다고 발표는 되었는데 그 원본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중국 화동사범대학(華東師範大學)의 쑤즈옹시앙(蘇仲翔)씨가 상해의 어느 절에서 송나라 ‘보우본’을 얻어 중화서국에서 1984년 10월에 세 권으로 총 1,418페이지에 이르는 점교본을 내었다. 많은 신세를 졌다. 그 뒤 1989년 9월에 제 2차 수정본이 나왔다. 이 오년 사이에 사천대학(四川大學)의 시앙츠우(項楚) 씨에 의해 두 편의 논문이 발표되어 중화서국의 점교본의 오류가 많이 지적되었다.
시앙츠우 씨는 문화혁명 십여년 동안 농촌으로 이른바「시아황(下放)」되는 가없은 처지였다. 중국에서 나오는「문사지식(文史知識)」(1987년, 12월)에 따르면 해방후 시앙츠우시 씨는 오대 이전의 정사와 「전당시」를 여러 번 정독하고 대장경을 세 번을 독파하고 저 방대한 「태평광기(太平廣記)」를 통독했다고 한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바로 「돈황변문선주(敦惶變文選注)」(巴蜀書社, 1990년, 2월, 총 847페이지), 「돈황문학총고(敦惶文學叢考)」(上海古籍出版社, 1991년 4월 총 709페이지), 「왕범지시교주(王梵志詩校注)」(상하, 상해고적출판사, 1991년, 10월, 총 1,112페이지)이다. 그 고증의 정밀함과 방대함에 놀라울 뿐이다.
내가 시앙츠우시에 다시 한번 탄복한 것은 중화서국 점교본「오등회원」의 오류를 지적하는 두 편의 논문을 읽고 였다.
그 정교함과 독서 량의 방대함과 기억력에는 완전히 두 손 들었다. 사천대학의 문헌학 전통에는 일찍이 소문을 듣고 있었지만 역시 사천대학이구나 하는 생각이다. 또 한번 유학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천대학에 가고 싶다.
Ⅴ
이 「오등회원」연구는 중국 자체에서는 물론 일본의 하나조노(花園)대학 안에 있는 재단법인 선학연구소에서도 열을 올리고 있다. 이 연구소에서는 이미 일본 JIS코드로 속장경을 대본으로 컴퓨터에 입력을 끝냈다고 발표했다. 이 연구소는 자료의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그 정확도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이리야 요시다카(入矢義高) 선생을 중심으로 한 면밀한 연구 성과를 발표한 이 연구소의 저력으로 미루어 보아 가까운 장래에 「오등회원」에 관한 기념비적인 작업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문헌학적인 고증을 통해 정확하게 읽는 훈련과 컴퓨터를 이용한 테이타 검색이 결국은 승패를 가름할 것이다.
데이터 검색에 필요한 컴퓨터상의 기술은 이미 국경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중국 상해에 있는 전산연구소에 「오등회원」이 육십만 자이니 이천사백 달러가 드는 셈이다.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약 이 백만 원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렇게 외국에 의존하다 보면 결국은 국내의 기술 축적에는 아무 도움이 안된다. 우리나라가 이십세기의 산업화 과정에서 외국에 의존한 오점을 선어록의 번역에서 다시 되풀이해야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