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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조춘숙
말 씀 사무엘하 6장 1-11절
제 목 베레스 웃사[7]
다윗은 하나님께서 천군천사를 동원하여 블레셋과의 전쟁을 대승으로 이끌어 주신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전쟁에서 피를 흘리기 전에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공격하셨기 때문에 그는 게바에서 게셀까지 정복하는 대승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세상에서 자신을 쫓는 사람도 없고, 이제 들이나 굴에서 잘 필요도 없이 아름다운 궁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에 육적인 고난은 끝이 났습니다.
모든 것이 안정되자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궤를 궁으로 잘 모셔올 수 있을까 생각을 거듭한 끝에 삼만명의 백성들을 모으고, 새 수레를 만들어 각종 악기를 앞세우고, 온 백성이 환영하는 가운데 모셔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대로 행했을 때 축복의 축복을 받았던 다윗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거룩한 법궤를 가져올 때는 철저한 인간의 생각안에서 많은 사람과 정성껏 준비한 새 수레와 각종 악기로 흥에 들떠서 눈에 보이는 행사로 준비한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하며, 그 분의 능력과 귀한 성품과 영광이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궤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궤를 중심으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레위인 중 고핫 자손들만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성을 보이고 싶었던 다윗은 새 수레를 정성껏 준비하였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는 백성들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의 신앙을 보면서 그를 닮기를 원했을 것이고, 다윗 스스로도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정성과 열심을 원하고 계시는지 성도들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인간의 정성은 우상을 향한 것이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삼만명의 사람과 새로 만든 수레와 귀가 아프도록 울리는 악기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 것이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들의 믿음에 만족하여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실었을 것입니다.
6절에 궤를 실고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뛴다는 말은 소들이 미끄러지다, 걸려 넘어질뻔 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소들이 중심을 잃으면서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가 순간적으로 궤를 잡았는데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며 웃사를 죽이셨습니다.
떨어지려는 법궤를 잡는 것은 어쩌면 상식적으로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고핫자손일지라도 법궤를 만지거나 들여다보지 말라고 이미 명령하셨으므로 웃사가 법궤를 만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여긴 증거입니다.
하지만 웃사보다 더 책망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다윗입니다.
작은 일에도 기도하던 다윗은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대로 순종하지 않은 것이 이 모든 일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신 한 사람의 실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고 하나님을 진노케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사건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머물러 계신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작은 실수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무관심이 얼마나 큰 사건을 만들 수 있는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세심하게 관심을 가지고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안에서 드리는 정성이나 최선은 상급이지만 하나님의 법을 벗어난 인간의 정성이나 최선은 그 자체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생명의 길을 알려 주셨는데도 다윗과 웃사는 그 법대로 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대로 충성하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도 웃사가 죽자 자기의 충성을 받아주지 않은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했습니다.
만약 다윗이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화를 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고 있는 여러분은 다윗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제 법궤가 궁에 있지 않다고 책망하신 적이 있으며 언제부터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로 옮겼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인간의 열심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조금 초라해도, 법대로 하기 조금 힘겨워도, 나만 희생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행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인간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이런 충성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하고, 순종의 중요성을 알아야 하며, 말씀의 깊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정성을 무시한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분노는 사단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면 그 작은 틀안에 갇히게 되므로 절제할 수 없는 분노가 생기고 온유와 겸손함이 없어진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단이 눈과 귀를 가리면 지금까지 받은 축복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도 가볍게 여기게 되며, 자신을 도와주었던 많은 사람의 사랑까지도 함부로 대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윗과 같은 생각과 의로 움직인다면 결국 인간의 생각이 곁에 있는 영혼들을 죽이게 될 것이고, 많은 영혼들을 넘어뜨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면 돌이키는 지혜를 보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를 보자 법궤를 모셔오는 것이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10절에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 자기에게로 모셔오기를 즐겨하지 않았고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갔습니다.
자기에게로 법궤를 가지고 오기를 원치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재앙을 주실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축복을 받았었는지 모두 잊어버리고, 다윗은 그저 하나님을 두려워만 하고 멀리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잘못했다고 느낄수록 매달려서 회개해야만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회개하는 것도 잊은 채 오벧에돔의 집으로 법궤를 옮겨 놓고 말았습니다.
지금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악한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은 싫고, 오벧에돔이 당할 수 있는 재앙은 상관없다는 태도는 지금까지 자신을 희생해 가며 생명을 사랑했던 다윗이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을 때 그의 신앙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 놓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을 때 그의 신앙은 자신만 보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긴 법궤가 그 집에 복을 내리지 않고 재앙을 내렸다면 다윗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고 회개했다면 다윗은 육적인 복을 받은 것처럼 영적인 복 또한 받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오벧에돔은 다윗이 강제로 법궤를 맡겼을 때 순종했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으로 간 법궤 때문에 이미 블레셋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벳세메스 사람들이 큰 재앙을 당했으며 이제 눈앞에서 웃사까지 죽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든 사실을 아는 오벧에돔은 비록 모두가 법궤를 피해 흩어졌지만 자신에게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늘 하나님을 사모했고 가까이서 섬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삼개월만에 그 가정이 엄청난 축복을 받는 것을 볼 때 오벧에돔이 평상시에 믿음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늘 믿음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그렇게 크게 축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2절에 하나님의 궤를 인해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기 때문에 복을 받던 다윗처럼 축복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지기로 살아온 그의 믿음이 비록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해도 하나님을 섬기는 그의 삶과 믿음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모두가 피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그에게 기회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모두가 위기라고 말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안에서 준비한 사람은 그 위기가 오벧에돔처럼 축복을 받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기도로 준비하고 말씀으로 성장한 성도에게는 세상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축복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법궤를 통해 한 사람은 축복을, 한 사람에게는 징계하시며 어떤 믿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믿음인지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윗은 이 사건으로 상심했고, 웃사는 죽었을지라도 오벧에돔은 후손들까지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벧에돔과 같이 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는 백배의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모두가 하기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하나님 일을 맡아서 감당한다면 위기를 축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남들이 하는 일만 따라 하고 남들이 하는 만큼만 헌신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다윗만의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의 축복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알고 듣고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많은 기회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늘 믿음으로 준비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12절에 이제 다윗은 지난번처럼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새 수레대신에 레위자손들을 모았고 그들의 몸을 성결케 하였습니다.
언약궤를 어떻게 모시느냐에 따라서 생사가 달렸다는 것을 깨달은 다윗은 자기의 정성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을 보면서 잘못된 것을 깨닫는 순간 빨리 돌이키는 지혜를 배우기 바랍니다.
잘못된 믿음을 고치지 못하는 것은 웃사가 하나님을 위한다고 법궤를 잡는 행동이고, 다윗이 분노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역대상 15장 16절에 다윗은 레위사람의 어른들에게 명령하여 그의 형제들을 노래하는 자들로 세우고 비파와 수금과 제금등의 악기를 울려서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두 번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레위족속의 어른들에게 부탁을 하여 믿음이 있는 자들을 노래하는 자로 세우고, 믿음 있는 자에게 악기로 찬양하도록 세웠습니다.
똑같은 악기로 연주를 하되 그저 기쁨에 들떠서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실 만한 찬양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믿음이 있고 현명한 자들을 세워서 일을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대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성으로 향하는 법궤가 너무 기뻐서 다윗은 옷이 다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만큼 법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오는 것이 다윗에게는 의미가 컸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을 축복하고는 이제 자기의 가족을 축복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아내 미갈은 다윗이 춤추는 것을 비웃으며 왕이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는 것은 천하고 가치없는 행동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내가 옷이 벗겨지도록 기뻐하며 춤을 춘 것은 여호와앞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조롱 받을 이유가 없다고 진노하였습니다.
미갈은 하나님의 법궤를 기뻐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조롱하였기 때문에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행하는 일들을 함부로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이라는 것을 세상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뛰어넘는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움 없이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은 생명의 열매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는 성도들을 보며 조롱하는 세상에 사망이라는 심판을 주시기 때문에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 성도입니다.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인간의 생각에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분명한 것은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