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정리:2005.1.1
06:00대성교-07:10대성동마을-09:50남부능3거리-10:40세석산장-12:00출발-12:50칠선봉-13:40선비샘-13:50임걸년못-15:40의신마을
지리산을 많이 올랐어도 그토록 강한 바람을 맞아 본 적은 없었다. 온몸의 살갗을 칼로 도려낼 듯 차갑던 바람. 세찬 대성골의 겨울바람은 그렇게 무서웠다. 빨치산의 한 맺힌 절규처럼 강풍은 오름길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최근 들어 의신쪽의 산행이 뜸했던 관계로 그곳으로 들머리로 잡았다. 남원산O과 함께 대성교에 도착하니 오전 6시. 하늘을 보니 달빛과 별빛이 훤하다. 날씨가 맑을 조짐이다. 대성교 앞 공터에 차량을 주차하고 출발을 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대성교 코스를 폐쇄한다고는 했으나 그래도 이곳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산님들이 많았던지 입산을 가로막았던 출입구는 안타깝게도 뜯어진 채 휑하다. 땅이 움푹 패고 낙엽이 수북이 쌓인 된비알 길을 따라 헉헉 숨을 몰아쉬며 정신없이 차고 오르는 덕분에 초장부터 땀을 질펀하게 흘린다. 이렇게 가파른 오름길이 20여 분간 지속된다. 의신마을에서 오는 길과 맞닿은 능인사 터에 도착하니 조금씩 어둠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이후 산비탈을 따라 옹색한 길이 이어지는데 우측 아래로는 대성골의 계류 소리가 요란하다. 쏴~하고 들려오는 물소리가 유난히 서늘하다. 대성마을을 가기 전 아담하게 지은 하얀 목조 건물 한 동이 있었던 거로 기억되는데, 이제는 그 집 앞을 통과하지 못하게 <등산로 아님>을 표지해 놓았고, 계곡 쪽 아래로 길이 우회하여 진행하도록 등산로를 교묘히 변경해 놓았다. 약간의 헷갈림도 있으나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곳이 아마 대성마을 일 듯싶다.
아직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제대로 맞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고 약간 의심스럽지만, 어느새 바로 앞에는 대성마을. 음수대의 물은 이미 강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두껍게 얼어붙어 엄동설한 이곳의 추위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이곳까지 오느라 바삐 움직인 육신은 땀에 젖어 열이 나고 김이 피어오른다. 평상에 앉아 배낭을 열고 귤을 까먹는데, 인기척을 들었던지 고 임O출씨 며느님이 나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아침 추위에 몸서리를 치고 곧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대성골. 지도상으로 볼 때 대성골은 별반 힘들 것 같지 않으나, 실상 땀깨나 흘려야 하는 지리산 루트 중의 하나이다. 특히 큰세개골 입구를 지나 남부능선을 만나는 삼거리까지는 다리가 뻑적지근할 정도로 한숨을 몰아쉬며 올라야 한다. 대성교부터 세석대피소까지의 오름 시간은 백무동-천왕봉이나 중산리-천왕봉의 등정 시간을 한참 초과하고도 남는다. 거기에 비하면 오히려 뱀사골 계곡은 지도상에서는 무척이나 길게 보이지만 콧노래를 불며 쉬엄쉬엄 노닐면서 올라도 3시간이면 도달한다. 대성마을을 지나 계곡을 우측에 끼고 그리 가파르지 않은 길을 조금 따라 오르면 빨치산 최후 격전지가 나온다. 그러나 지금은 아쉽게도 안내판이 사라지고 없다. 그 안내판 바로 위가 원대성 마을이 있었던 자리이다. 지리산에서 사라진 작은 마을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사실 지금도 집이 몇 채 있는 거로 기억하고 있다.
작은 세개골 입구에 도착해 휴식을 취한다. 얼어붙은 귤 알맹이를 입안에 넣으니 그렇게 시원하고 맛이 좋을 수가 없다. 아마도 이렇게 귤을 맛나게 먹어본 것은 처음일 것이다. 좀처럼 산행을 하면서 간식을 먹지 않는 나에겐 특미였던 것이다. 작은 세개골 입구 다리를 건너면서 본격적으로 적설량이 점차 많아지는데, 대성골은 비록 지리산의 남녘이기는 하나 하루에 약간의 일조량만 들어올 뿐, 사실상 곧 응달에 들어가므로, 이곳이야말로 지리산의 오지이며 깊고 깊은 계곡임을 알 수 있다. 곧 큰 세개골을 만난다. 큰 세개골을 따라 들어서서 끝까지 치고 오르면 그 마지막 끝은 칠선봉이 가까운 주능선이며, 그 전 바로 우측으로 영신대로 오르는 길이 조심스럽게 열려있다. 큰 세개골의 얼어붙은 너덜을 조심스럽게 밟아가며 큰세개골 입구를 지나친다. 지금까지의 등로는 순하고 아기자기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남부능 삼거리까지는 가파른 길만이 남았다. 사실 아직도 갈 길은 많이 남은 것이다. 게다가 바람은 아까보다 한참 더 거세졌음을 피부로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앞길 남부능선 너머로 찬란한 새해의 첫해가 떠오른다. 지리산 신이여. 올 한해 무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아마 오늘 천왕봉에는 많은 인파로 북적댔을 것이다. 1년에 한 번 지리산국립공원 측은 합법적으로 야간 산행을 어쩔 수 없이 허용하는데, 새해 첫날은 새벽 2시부터 매표소 문을 연다. 일출을 보려고 수많은 사람이 몰리면서 오름길 천왕봉 정상까지 극심한 정체 현상을 빚기 때문에 시간을 고려한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배려이다. 바람이 점점 더 거세지기 때문에 개털 모자를 더욱 깊게 뒤집어쓰고 귀 가리개까지 내렸다. 이렇게 혹독하고 춥고 무서울 수 있을까. 지리산의 겨울은 두렵다. 반세기 전 빨치산들은 이곳 지리산에서 굶어 죽고, 맞아 죽고, 얼어 죽었다. 그 원혼들의 외침이 다시 환생한 것처럼 강풍은 계속되고 있다. 강철같은 의지와 투쟁심으로 똘똘 무장한 빨치산들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란 말인가.
가까스로 육신을 수습하여 뒤를 바라보니 토끼봉에서 뻗어내린 범왕능선과 왕시루봉 능선이 어느 틈에 나와 높이를 같이 했고, 그 북쪽 끝자락에는 반야봉이 늠름하다. 한결 가까워진 주능 쪽을 바라보니 칠선봉과 우측으로 망바위가 가깝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큰 세개골이 가파른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강한 바람에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걸어 나간다. 두터운 고어텍스 장갑을 끼웠건만 그래도 손끝이 애리고 저리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뭐 하려고 고생을 그렇게 사서 하느냐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에게 나는 정중히 되묻고 싶다. 그대 역시 부질없은 생을 뭐 하려고 살아가려 하는가. 그대의 어리석은 물음에 이렇게 대답을 가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체력적으로 힘들다고 느껴질 때 다행히 곧 남부능 갈림길 이정표를 만난다. 반가움에 배낭을 눈밭에 내동댕이치고 긴 한 숨을 토한다. 말없이 뒤따르던 남원산O 또한 힘겨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몸을 수습한 후 세석을 향한다. 지리산의 능선에는 바람 때문에 눈이 쓸려와 많이 퇴적되어 있는데 남부능선 또한 예외는 아니다. 오늘 산행 동안 처음으로 산님들을 만나는 듯싶다. 젊은 남녀 대여섯 명이 중무장 한 채 하산하는데 반가움에 어디로 가느냐 물으니 갈길이 머나먼 '쌍계사' 라 한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스쳐 지나가는 앳된 젊은 아가씨의 모습이 어디선가 본듯하다. 음양수 샘터를 거쳐 세석을 향하는데 다행히 바람이 잠잠하다. 세석산장 아래 샘터에서 물을 받아 취사장 안에 들어서니 빈자리가 있어 배낭을 내린다. 취사 준비를 하기 전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소주를 연거푸 몇 잔 들이켜 체온을 올린다. 버너의 강력한 화력에 끓어 오르며 수증기를 내뿜는 김치찌개의 국물 맛이 끝내준다. 반주로 마시는 소주 맛도 기가 막힐 정도다. 아마 최고의 성찬에 최고의 술맛일 것이다. 점심때가 되어 자꾸 사람들이 밀려들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 주기 위해 짐을 꾸려 밖으로 나온다. 오전까지 대성골 바람에 온몸이 땡땡 얼어붙었으나 따끈한 밥에 뜨끈한 국물을 먹어서 추위는 어느새 잊은 지 오래다.
오후의 일정은 시간적으로 넉넉하다. 영신봉에 올라서니 눈 내린 지리산의 모습이 장관이다. 마치 파란 잉크를 도화지에 칠한 것처럼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랗다. 이후 칠선봉을 거쳐 망바위까지는 산행이 순조롭게 이어진다. 북사면은 어김없이 많은 눈과 빙판길을 이루고 있다. 세석을 향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쉬엄쉬엄 진행하는데 어느새 선비샘에 도착을 한다. 다른 계절에는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로 많은 사랑을 받는 휴식처인데 오늘은 그저 쓸쓸하기만 하다. 선비샘에서 물을 마시려고 물통을 꺼내니 세석에서 받은 물이 단단히 얼어 있어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오늘 그만큼 날씨가 춥다는 얘기다. 다소 미안한 마음으로 선비샘에서 출입제한 표시판을 넘어 내려선다.
선비샘에서는 덕평능선과 오토바이 능선으로 떨어지는데 오늘은 발자국이 뚜렷한 덕평능선을 따라서 하산을 하기로 한다. 덕평능선의 종점은 대성교이다. 산적 임걸년의 전설을 가진 연못자리를 지나 부드럽고 완만한 내리막길을 따라 산행이 계속된다. 뒤를 바라보니 형제봉과 덕평봉 사이의 안부에 벽소령 산장이 애틋하게 보인다. 선비샘을 내려선 지 30여 분쯤 되었던가. 고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되는데 마른나무 가지 사이로 바라보이는 남부능선이 매우 가깝다. 바로 좌측 아래의 계곡은 작은 세개골이다. 내리막길에 곧 커다란 암봉을 만나 급격히 대성골의 작은 세개골 쪽으로 길이 좌측으로 돌아간다. 마치 작은 세개골을 치고 내려갈 듯한 이 길은 다행히 다시 산등성이 위로 이어진다. 10여 분 뒤 다시 근사한 암봉이 있어 남원산O을 쉬게 하고 배낭을 내려놓고 올라섰는데 우측을 바라보니 돼지평전에서 뻗어내린 왕시루봉 능선이 멋지다. 바로 밑에는 의신마을이 훤히 보인다.
이 암봉 아래의 계곡을 따라 그냥 의신마을로 내려서기로 한다. 가파른 계곡이라 너덜이 많으며 험준하고 이렇다 할 표지기도 없다. 의신마을이 빤히 보이건만 한참을 걸음 품을 팔아야 했다. 오래된 집터가 몇 개 눈에 띄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여러 가구가 모여 촌락을 이루기도 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남원산O은 무릎이 아프다고 먼저 내려가라고 한다. 대성교에 도착하여 의신까지 차를 가져올 생각으로 대성교까지 빠르게 치고 내려간다. 곧 의신마을을 만난다. 마을 가게 앞 자판기가 눈에 보여 따끈한 커피가 생각났으나 그대로 진행을 한다. 포장도를 걸어가면서 뒤를 바라보니 아까 올라 주변을 조망하였던 암봉이 까마득하다. 아마도 의신에서 그 암봉을 역으로 오르려면 한동안은 버벅거려야 할 것이다. 대성교에서 차량을 회수한다. 지리산 종주 길에 나섰다가 비상 탈출한 곡성의 산님을 동석하고 의신마을을 떠난다. 남원에 도착하여 저녁으로 먹을 대성식당의 생태탕 생각에 벌써 군침이 돈다. 어느 지리 산꾼의 새해 초하루는 이렇게 지났다. 올 한해는 무탈하고 좋은 일만 생기기만 바라면서 산꾼은 간절한 마음으로 지리 산신께 다시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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