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일보', 1946.4.15.(1면) 인천 축항의 노역 죄수 金龜 지금은 건국도상의 거인 김구 주석
작일 내리 기독교당에 청년 김구 씨 재현 건국도상의 거인, 김구 주석은 작 14일 상오 10시 15분 용산공작소 지배인 한택열씨를 隨하여 자동차 래인(來仁) 내리기독교회 예배당에서 일반신도와 함께 일요 예배를 올린 다음 당일이 일요일임으로 인천시내 모처에서 안식하였는데 금 15일은 조선차량, 조선기계, 일입제작소, 기타 공장 시설을 시찰 후 귀경할 예정인데 선생은 내리교회당에서 예배 중 약 45분간에 걸치어 인천의 감옥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술회로써 예배중의 신도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나는 황해도 해주읍 서촌 출생으로 가난하야 9세까지 소를 끌고 꼴을 뜯기고 있었다. 어느 날 부친에게 자기 집은 학문이 없어 벼슬을 못하였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말을 듣고 그날부터 공부하겠다고 졸랐으나 11세 되는 해에 겨우 허락을 얻어 “마상에 봉한식(馬上逢寒食)하니”를 배우기 시작한 지 5년 만에 과거를 보았으나 그만 낙제를 하고 말았다. 그때 마침 학문을 했다는 노인들이 글을 지어 부호학자들에게 팔고 있는 것을 보고 “돈에 팔리는 학문은 무용이다” 생각하고 공부하기를 단념하였다.
그 후 갑오년 일청전쟁이 개전되자 나는 여러 가지로 처신할 길을 구하여 중국 방면을 돌아다니고 있던 중 을미년에 고종황제 때의 민중전을 왜놈이 석유로 불살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된 도리로 국적을 죽여 원수를 갚을 결심 하에 귀국하여 인천 해상에 도달하자마자 수상해 보이는 왜놈을 죽이고 인천시내에 들어와 그 사실을 기록하야 표를 부쳤었다.
그 후 4개월 만에 체포되어 인천감옥에 투옥되었었는데 그때 나의 자친이 가져다주시는 “밥”의 모양이 여러 가지임을 보고 여러 집에서 빌어오신 것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옥내에서 금일 김창수(당시의 김구 이름)를 사형에 처한다는 신문을 읽었다. 꼭 죽을 줄 알고 있었는데 사형시간(당시 사형은 오후 3시경)이 지나도 집행치 않으므로 도리어 궁금히 생각하고 있던 바 동석(同夕) 6시경 사형만은 취소하였다는 통지를 조선인 관리에게 들었다. 그 원인은 고종황제께서 황후를 위한 범행자를 사형까지 당케 하면 나라의 체면상을 위해 ○○였다고 하여 특청이 있었던 까닭이라 하였다. 구사일생을 얻은 나는 탈옥을 계획하여 익년 2월경 간신히 목적을 달성하여 천신만고로 겨우 서울 잠입에 성공하였다.
다음 두 번째 징역은 일한병합 후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즉 신해년이었는데 이때는 데라우치(寺內)총독 암살미수죄로 15년 체형을 받고 부두축항공사에 노역을 하게 되었는데 인천축항공사에서 지게에 흙을 잔뜩 담아지고 허리에는 철쇄로써 다른 죄수와 연락당한 채로 높은 층계에 운반케 하였으나 2, 3일 간 ○었지나 피로에 ○든 전신을 움직일 수 없었으며 또 한편 왜놈들이 나의 고난을 재미있게 여길 것을 생각하고 하루라도 더 왜놈의 조소를 받기가 싫어 죽기를 결심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죽으려면 흙짐을 진 채로 층계에 올라가다가 그대로 떨어져 죽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은 하였으나 왜놈의 감시 하에 자기(自己)와 철쇄로 연결된 다른 한 죄수를 떼어 놓고 죽을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약 3개월 체형밖에 아니 남은 남을 같이 죽일 수도 없어서 자살을 중단(斷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는 나는 갖은 고난을 감수하여 가며 왜놈들의 지휘에 순종하였든 것이었다.
나는 그 동안 ○○○○ 때마다 감리사나 경무관 등의 면전에서 그들에게 굴치 않고 오히려 그들을 설복하기에 노력하였고 ○○이 또한 계사(係事)이었었다. 고종황제가 나의 사형을 면제케 하였다는 사실이 이 세상에 전(傳)번 되어 여러 지사들은 나의 양친을 찾아보고 위로도 하고 원조도 하였었고 또 당시 인천에는 박영근(朴永根), 안호연(安浩然)이란 분의 집에 나의 자친께서 식모 노릇을 하여가시면서 하루에 밥 두 끼씩을 받아 옥중의 나를 살려오시느라고 악○고민하셨던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옥중에서 계몽운동도 하였고 노역에도 충직하였으므로 모범죄수로 가출옥을 하게 되었든 것인데 나의 제 2회 옥중 생활에는 김구(金龜)란 위명으로 종시하였던 것으로 제 1회의 김창수 위명으로 탈옥한 사실이 발각되면 사형은 면할 수 없는 터이었으므로 은인인 안호연, 박영근 양씨에게 치사도 할 수 없이 출옥하는 길로 상해도 탈출하였든 것이었는데 그 후 상해서 안씨에게 시계 1개를 보내어 사은의 표시를 하였는데 그 시계는 그 유손(遺孫)이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자친께서 나의 옥중생활을 위하여 밥을 빌으시던 인천의 거리를 추상하면서 인천의 거리를 한 바퀴 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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