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번에 읽는 삼국지 [3]
조 성 민 (한양대 로스쿨 명예교수)
[3] 강동을 제패한 손권
1. 오나라의 국론분열
손견이 사망한 후 그의 장남인 손책은 원술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손책은 아버지 유품인 옥새를 원술에게 맡기고 군사를 빌려 강동으로 와서 강동일대를 평정하고 독립했다. 손책은 주유, 장소 등 인재를 모아 오나라의 기반을 다졌으나, 자객의 습격으로 26세에 사망했다. 그러자 손책의 동생인 손권이 그의 뒤를 이어받았다(200년). 손권은 대권을 물려받은 후에 수성과 안정을 기본정책으로 삼았다.
하북을 통일한 조조가 영토확장을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이때 제갈량이 손권에게 와서 오나라와 유비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적벽에서 조조에게 맞서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손권의 참모들 사이에 항복하자는 주화파와 싸우자는 주전파로 의견이 대립되었다.
주화파인 장소와 고옹 등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항복을 주장했다. ① 조조는 100만 대군을 거느리고 황제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있으므로 대항하기가 어렵고, ② 오나라의 강점은 장강을 이용하는 것인데, 조조가 형주의 수군을 얻어 수전에서 이로운 점이 없다는 점을 들었다. 이에 대해 주전파인 정보, 황보, 한당 등은 ⓐ 조조군사는 보병이라 육전에는 강하나 수전에는 약하고, ⓑ 엄동설한에 말에게 줄 마초가 부족하며, ⓒ 조조군사는 중원에서 수 백리를 이동했으므로, 물과 풍토가 맞지 않아 질병에 많이 걸리는 점 등을 내세워 결전한 것을 주장했다.
이와 같이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들과 조조와 싸우겠다는 신하들로 국론이 분열되자, 손권은 재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설치게 되었다. 이때 손권은 나라 안의 일은 장소와 논하고 나라 밖의 일은 주유와 논하라는 손책의 유언을 떠올렸다. 손권은 파양호에서 수군을 조련하고 있는 주유를 불러들이게 했다. 주유가 사상으로 돌아올 때 노숙이 나가 영접하며 그간의 과정을 모두 말해주었다. 주유는 노숙에게 제갈량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제갈량을 만난 주유는 조조가 황제를 앞세웠으니 거스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싸우면 완패가 뻔하고, 항복은 쉬운 일이니 주공인 손권을 만나면 항복을 권할 생각이라고 했다. 이 말은 들은 제갈량이 두 여인을 배에 태워 조조에게 보내면 조조가 물러날 것이라는 계책을 말했다. 주유가 기뻐하며 두 여인이 누구냐고 묻자, 제갈량이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 음악은 물론 문장에도 뛰어난 팔방미인인 대교와 소교 자매라고 능청스럽게 답했다. 그리고 조조가 강동의 대교와 소교를 탐낸다는 시를 읊었다(제목은 동작대부-銅雀臺賦). 주유가 제갈량의 계책을 듣고 갑자기 얼굴이 벌개 지더니 화를 버럭 내며, 대교는 손책의 부인이고 소교는 주유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모르냐고 따졌다. 제갈량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며 몰라서 실언했다고 주유에게 사과를 했다. 그러자 주유가 좀 전에 자기가 항복하겠다고 한 것은 제갈량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면서, 사실은 처음부터 조조와 싸울 생각이었으니 도와달라고 제갈량에게 부탁했다.
다음날 손권이 여러 장수들을 소집하여 어전회의를 열어, 주유의 의견을 물었다. 주유는 조조가 한나라의 승상이라고는 하나 사실은 역적이고, 손권 주공께서 부친과 형님이 남긴 가업을 이었기 때문에 조조에게 항복할 수 없으며, 오나라는 군사가 용맹하고 물자가 풍부한 까닭에 조조와 한판승부를 가려볼 절호의 기회라고 했다. 주유의 말은 들은 손권이 갑자기 일어나 칼을 빼어 들더니 옆에 놓인 탁자를 잘라 버리며, 다시 항복이라는 말을 꺼내는 자가 있으면 탁자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주유의 의견에 따라 손권이 조조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것으로 결정했다. 손권은 그 자리에서 주유를 대도독, 정보를 부도독, 노숙을 친군교위로 임명했다.
2. 오·촉 연합군과 조조의 적벽대전
(1) 적벽대전의 상황
대도독에 임명된 주유는 제갈량을 만나 조조군을 화공(火攻)으로 공격하자는데 합의했다. 주유의 계책을 부탁받은 당대의 명사인 방통이 조조진영으로 갔다. 그는 조조에게 북방군사들은 배 멀리에 약하니 배 50척을 쇠고리로 연결해 하나로 묶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면, 강한 바람이 불어도 배가 흔들리지 않아 평지처럼 자유자재로 활동할 수 있는 연환계를 쓰라고 했다. 방통의 계책대로 조조군의 배들이 모두 이어졌다. 조조의 참모 정욱이 연환계를 쓰면 좋으나, 오나라 군사의 화공에 대비해야 한다고 충언했다. 이에 조조가 지금은 엄동설한이니 서풍이나 북풍만 불뿐, 남풍이나 동풍은 불지 않으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한편 주유에게는 커다란 고민거리가 생겼다. 화공으로 조조군을 공격하려면 동남풍이 불어야 하는데, 그것은 겨울이라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주유의 고민을 천문학에 밝은 제갈량이 칠성단을 쌓고 기도를 하여 사흘 동안 동남풍을 불게 하여 풀겠다고 했다. 약속한 날 밤에 주유가 막사 밖으로 나가보니 깃발이 북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겨울에 동남풍이 불어오자 주유는 깜짝 놀랐다. 주유는 제갈량의 비범한 능력에 감탄하면서 그를 살려두어서는 유비와 함께 화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정봉과 서성 두 부하 장수에게 칠성단으로 가서 제갈량을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주유의 속내를 읽은 제갈량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조자룡의 호위를 받으며 장강 하구에 유비의 군영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항상 자신보다 한 발 앞서 대책을 세우는 제갈량이었지만, 주유는 화만 내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동남풍이 있는 동안 조유는 조조를 물리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주유는 동남풍을 이용하여 돛단배 20척을 조조진영으로 접근시켜 불을 지르자, 조조진영의 배들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주유는 불길이 번지자 모든 군사들을 일시에 일으켜 조조군을 살육했다. 이날 조조의 군사들은 불에 타죽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었고, 물에서 헤엄쳐 나왔다가도 오나라 군사들의 창에 찔리고 화살에 맞아 죽었다. 궁지에 몰린 조조는 기병 백여 명을 거느리고 강 언덕으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오나라 군사보다 월등한 전력을 가졌음에도 조조의 100만 대군은 오나라군의 화공에 속수무책으로 완패를 당한다. 이 전쟁이 유명한 적벽대전이다(208년).
(2) 조조를 놓아준 관우의 의리
주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초나라 군영으로 돌아온 제갈량은 모든 장수를 소집해 지시를 내렸다. 조자룡과 장비 등 여러 장수들에게는 조조를 치기 위한 임무를 부여했지만, 관우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관우가 못마땅해 하며 자기에게는 임무를 맡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자, 제갈량이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기려고 하는데 걸리는 게 있다고 했다. 조조가 패해 화용도로 달아날게 분명한데. 관우가 그곳을 지키면 전에 포로로 있을 때 입은 은혜를 생각하여 조조를 놓아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관우가 놓아주면 군법에 제재를 받겠다는 군령장을 쓰고,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화용도로 가서 매복했다.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불타는 함선에서 강 언덕으로 나와 패잔병들과 험난한 산길로 들어섰다. 얼마를 가다가 새벽비로 진흙구덩이가 된 산길에 앞서 가던 군사들의 발발굽이 빠져 행군이 멈춰 섰다. 군사들이 갈팡질팡 하고 있을 때, 조조가 호통을 치며 군대는 산을 만나면 길을 내서 가야하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만들어 건너는 법이라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풀과 갈대를 베어다 진흙구덩이를 메우면서 험한 비탈길을 오르도록 독려했다. 조조의 군사들은 화상에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힘겹게 행군을 해나갔다.
이때 관우가 적토마를 타고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다. 관우가 조조에게 군사(軍師) 제갈량의 명을 받고 여기 화용도에서 오래 기다렸다고 했다. 이에 조조가 자신은 싸움에 패해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으므로, 옛정을 생각해 길을 비켜달라고 했다. 이에 관우가 이미 안량과 문추를 베어 은혜를 갚았고, 오늘 일은 사적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라고 했다. 조조가 다시 대장부는 신의를 중시한다면서 길을 터달라고 간청했다. 의리를 중시하는 관우는 옛날 조조가 베푼 은혜가 떠올라 마음이 동했을 뿐만 아니라, 조조의 군사들이 처량한 기색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더더욱 불쌍한 생각이 들어 마음이 흔들려 조조에게 길을 터주었다.
조조를 살려 보내고 하구에 돌아온 관우에게 제갈량이 군법대로 시행하겠다고 언성을 높이고, 무사들에게 관우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얼굴이 백짓장이 된 유비가 제갈량에 운장이 군법을 어기기는 했으나, 도원결의로 같은 날 죽기로 맹세를 했으므로 운장에게 공을 세워 속죄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다. 유비의 간청에 제갈량은 못이기는 척 관우를 사면해 주었다.
(3) 적벽대전의 대차대조표
오나라와 위나라가 전쟁 중에 유비는 형주의 남부를 장악하여 근거지를 마련했다. 따라서 적벽대전의 결과 손권의 강남의 지배가 확정되고 유비도 형주 서부에 세력을 얻어 천하3분의 형제가 확정되었다.
적벽대전에서 패배하여 화용도로 도주하다가 관우의 의리로 생명을 부지한 조조가 허도로 돌아가면서 조인에게 남군성을 지키게 하고 형주성은 조홍, 양양성은 하후돈에게 지키라고 했다. 손권은 조조가 힘을 잃은 형주를 차지하기 위해 먼저 남군을 점령하고자 했다. 이때 손권의 명령을 받은 주유가 적벽대전에서 대승을 거둔 기세를 몰아 군사를 이끌고 남군성을 지키고 있는 조인의 군사와 공방을 벌였다. 오나라 군사와 위나라 군사가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제갈량이 조자룡으로 앞세워 잽싸게 남군성을 차지해버렸다. 제갈량이 남군성을 얻는 과정에서 조인의 병부(장수가 군대를 동원할 때 쓰는 징표)를 수중에 넣고, 이를 이용하여 형주를 지키는 조조군사들에게 남군성이 위험하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속임수를 썼다. 제갈량에게 속은 형주의 병사들이 남군성으로 이동하는 틈을 타서 장비가 형주를 점령해버렸다. 또 제갈량은 양양을 지키는 병사들에게도 병부를 이용하여 그들을 성 밖으로 끌어낸 뒤 관우를 시켜 양양을 점령했다.
이렇게 되자 손권은 적벽대전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사실상 얻은 게 없었다. 손권이 노숙을 유비에게 파견하여 형주를 되돌려 달라고 요청했다. 제갈량이 노숙을 설득하여 서천을 얻을 때까지 형주에 머물겠다고 하면서, 오나라로부터 형주를 잠시 빌렸다는 문서를 만들어 노숙에게 주었다. 노숙을 만난 주유는 계책을 만들어 그를 다시 형주로 되돌려 보냈다. 유비를 만난 노숙은 오나라가 서천을 치고 점령하면 서천을 줄테니 그 때 형주를 돌려달라고 했다. 유비는 이를 승낙했다. 주유의 계책은 서천으로 가는 척하면서 길목에 있는 형주를 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갈량은 주유의 계책을 꿰뚫고 있었다. 주유는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형주로 향했다. 형주성에 도착하자 성위에서 유비의 장수 조자룡이 전투태세로 나타났다. 주유가 조자룡에게 서천을 치러 가는 중에 유비에게 인사를 하겠다고 하자, 주유의 계책을 안 제갈량이 성을 굳건히 지키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조자룡이 말했다. 이에 당황한 주유가 말머리를 돌려 성을 떠나려는데, 엄청난 군사들이 몰려와 주유를 사로잡으라고 외쳐댔다. 충격을 받은 주유가 말에서 떨어져 배로 옮겨져 안정을 취했으나, 후유증으로 형주를 차지하려고 고군분투하던 주유는 36세에 사망했다(210년), 주유의 뒤를 이어 노숙이 오나라의 군사지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단번에 읽는 삼국지" [1] - [5] 중 [3]
(참고문헌) 조성민, 삼국지에서 내 성격을 찾다(제2쇄), 박영사, 2018.3
첫댓글
주 박사님
언제나 행복한 시간 되시길 기원합니다